제50화. 8장. 일단 엔딩만 보자 (3)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앤이 펜과 편지지를 들고 나타났다.
어지간히 기분이 좋았는지 가져온 편지지는 화려하다 못해 반짝반짝 빛났다.
“…이런 건 어디서 났어?”
“주인님 서재에서요. VIP 고객들에게만 쓰시더라고요.”
그렇게 귀한 걸 가져왔다고?
“아버지한테 혼나면 어쩌려고 그래? 얼른 갖다 놔!”
“하지만 주인님께서 쓰라고 주셨는데요?”
‘아아, 아버지…!’
광산을 운영하는 아버지에게 있어 대륙을 아우르는 헤브론 상단은 좋은 유통처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주저 없이 편지지를 내준 것일 테고.
‘이해는 하지만…. 아니, 정말 이해하는데….’
“…그래, 알았어.”
입안에서 맴도는 수많은 말들이 있었지만 나는 전부 삼키고 편지지를 받아 들었다.
그래, 이리 굴러도 호감도가 오르고 저리 굴러도 호감도가 오르는 마당에 편지지가 좀 번쩍거리면 어때.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냥 보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서둘러 책상에 앉은 나는 빠르게 편지를 써 내려갔다. 인제 와서 사교적인 말투를 쓰는 것도 우스운 일인지라 최대한 간략하게 용건만 썼다.
나는 편지 봉투를 인장으로 봉하며 말했다.
“여기 있어.”
“벌써 다 쓰셨어요?”
놀란 앤은 나와 괘종시계를 번갈아 가며 보았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을 확인한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가씨, 너무 빨리 쓰신 거 아니에요?”
“용건 있으니 오라는 건데 이 이상 필요한 말이 뭐가 있어?”
“아무리 그래도 남녀 사이에 오가는 편지인데 조금 더 뭔가 쓸 수 있잖아요!”
나는 답답해하는 앤을 향해 피식 웃었다.
“아직 모르는구나, 앤? 이런 건 길이가 문제가 아니야.”
“…그럼요?”
“누가 더 관심을 갖고 있느냐의 문제야. 상대에게 관심이 있으면 편지의 길이에 상관없이 알아서 오게 되어 있어.”
앤은 놀란 듯이 나를 바라보더니 곧 무언가 걸리는 듯 물음을 던졌다.
“그러다 상대가 지치면요?”
“다른 사람을 찾겠지, 뭐.”
산뜻한 내 대답에 앤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다 아무도 곁에 남지 않아도 전 몰라요.”
“애초에 관심 가져 달라고 한 적도 없는걸? 바라던 바야.”
“욜로 때문에요?”
“그럼 내가 뭐 때문에 이러겠어?”
어쩐 일인지 앤은 평소와 달리 납득하고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조금 망설이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 욜로라는 건 연애를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응? 딱히 그런 건 아냐.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인생을 즐기는 게 목표니까 연애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강제성은 없어.”
“그런데 아가씨는 왜 그렇게 연애하기 싫어하세요?”
왜 연애를 싫어하냐고?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나는 놀랐다.
딱히, 연애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기회가 되면 해 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원래 세계에서의 경험에 비춰 봤을 때, 연애를 해서 좋았던 기억이 눈곱만큼도 없어서 선뜻 마음이 가지 않을 뿐.
이 세계에 오면서 처음으로 안락하고 편안한 환경을 갖게 되자, 돈 걱정 없이 편하게 오래 사는 게 제일이라는 생각이 커지면서 더욱이 연애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딱히 연애를 싫어하지는 않아. 그렇다고 해서 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지금에 충분히 만족하는데 굳이? 라는 느낌이거든. 그리고 지금 나에게 호의를 갖는 사람들은 유명한 사람들이잖아? 너무 과해서 부담스러워. 그런 사람들 옆에 있다간 사람들의 시선에 찔려 죽을 거야.”
“으음, 그렇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진심을 담은 대답에도 앤은 여전히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느끼기엔 아가씨는 하고 싶은 마음이 없으신 게 아니라 의식적으로 그쪽에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하거나 피하는 것처럼 보여요.”
솔직히 조금 놀랐다.
내 연애에 대해 이렇게까지 앤이 깊이 생각할 줄이야.
일개 하녀로서는 상당히 주제넘은 발언이었지만, 자매처럼 자라 온 사이인지라 딱히 기분이 불쾌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단지 내 모습이 그렇게 보이는구나, 하고 놀랄 따름이었다.
놀란 나를 힐끗힐끗 살피던 앤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기분이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아가씨가 걱정되는 마음에 너무 참견을 해 버렸어요.”
“아냐, 앤. 그냥 좀 놀랐을 뿐이야. 참견이라고 생각 안 해.”
내가 진심으로 아무렇지 않음을 알자, 앤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다행이에요. 누가 뭐래도 전 아가씨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그러니 언제 어디서 무엇을 선택해도 행복할 수 있게 아가씨가 많은 가능성들을 염두에 두셨으면 좋겠어요.”
느닷없는 앤의 기습 고백에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뭐야아, 앤!”
내가 두 팔을 벌려 달려가자, 앤은 기겁하며 몸을 피했다.
감동이 거품처럼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다.
“저 아직 화 안 풀렸거든요? 하여튼 이건 얼른 보내도록 할게요.”
거짓말, 이미 다 풀린 주제에.
머쓱하게 양팔을 내린 나는 의심스러운 시선을 보냈지만 앤은 깔끔하게 무시하고 방을 나섰다.
그녀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그나저나…, 조금 충격이네.”
의식적으로 연애를 관심 없어 하거나 피하는 것같이 보인다니.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었다.
세이딘에 빙의를 하게 되면서 더욱이 안락함을 추구하게 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어차피 이 세계는 게임이었다. 그것도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여주인공과 공략캐들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 속에서 괜찮은 사람을 만나 연애를 할 수 있는 확률은 지극히 희박했다.
그런 곳에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고 사랑을 갈구해 봤자 마음에 남는 것은 상처뿐이었다.
이런 생각은 데스티니를 다루게 되면서 더욱 강하게 느꼈다.
내게 구애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데스티니에 걸린 마법 때문이었다.
그뿐인가? 그들은 내게 있어 게임 속 인물이자, 동시에 임자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지금은 사랑을 속삭인다고 해도 그것들은 전부 언젠가는 사라질지 모르는 감정이었다.
그것을 믿고 따라가기엔 나는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아이고, 너무 깊게 생각해 버렸네.”
점점 무겁고 깊어지는 생각에서 헤어나오기 위해 나는 일부러 혼잣말로 너스레를 떨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가볍게 기지개를 폈다.
하도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던 탓인지 몸 여기저기에서 비명을 질렀다.
“린든이 올 때까지 남은 시간 동안 뭘 하고 있으면 좋으려나….”
중얼거림과 동시에 책상 위에서 무언가가 번쩍거렸다.
“레이프가 걸어 둔 마법인가?”
저런 걸 할 만한 사람은 레이프밖에 없었다. 애초에 단테는 우리 집에 자주 오질 않았으니까.
“아…!”
불빛을 따라 지저분한 책상 위를 뒤적이던 나는 탄성을 흘렸다.
그것은 아티야가 준 통신석이었다.
돌아온 뒤, 짐을 꺼낸다고 아무렇게나 둔 채로 잊고 있었다. 미안하게도.
【세이딘? 들려요?】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몰라 한참을 끙끙거리고 있을 때, 마정석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티야였다.
“신기해라…!”
이보다 더 첨단 문명을 접해 봤으면서 놀라는 게 우습긴 하지만, 오랜만에 접한 통신기구는 새삼 대단했다.
【세이딘?】
계속해서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서둘러 대답했다.
“네, 네! 들려요, 아티야! 통신석을 사용해 보는 건 처음이라 신기해서 쳐다보느라 대답이 늦었어요.”
【아하하! 그렇죠? 저도 처음에는 그랬어요. 어떻게 이런 보석에서 소리가 나는지 신기하지 않나요?】
“맞아요, 이래서 다들 마법 마법, 하나 봐요.”
이런 걸 보면 마법을 배워 보고 싶단 말이야.
단테의 말로는 소질이 없다고 했지만, 그래도 조금 배우다 보면 뭐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나저나 본다던 연극은 잘 봤어요?”
안부를 묻는 내 물음에 아티야는 들뜬 목소리로 답했다.
【네, 너무 좋았어요! 왜 사람들이 몇 번이고 이 먼 곳까지 오는지 알 것 같았어요. 기회가 된다면 또 보러 오고 싶어요!】
“다음에는 저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땐 세이딘도 같이 가요! 분명 마음에 들 거예요!】
“그래요!”
생각 없이 넙죽 대답한 나는 현 상황을 떠올리고는 마른 웃음을 흘렸다.
연극을 보러 가려면 일단 이놈의 게임의 엔딩을 찍어야겠지?
밀려오는 울적함을 떨치기 위해 나는 애써 밝은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
“근데 아티야, 지금 제르아일 제국에 오고 있어요?”
【아, 네! 마법이 걸린 마차를 타서 앞으로 이틀 뒤면 도착할 거예요. 세이딘은 잘 도착했어요? 아니면 아직 도착 전인가요?】
“저는 무사히 잘 도착해서 푹 쉬고 있었죠!”
아이템으로 한 큐에 집에 왔거든요.
속으로 허허 웃던 나는 마침 할 말이 떠올랐다.
아티야가 우리 집에 머무를 수 있도록 허락받은 것이었다.
“아참! 부모님께 말씀드렸는데 며칠이고 상관없으니 원하는 만큼 있다 가라고 하셨어요.”
【어머나…! 말씀은 고맙지만 그렇게 신세를 질 수는 없어요.】
몇 번이고 괜찮다고 했지만 아티야는 한결같았다.
결국 짧은 실랑이 끝에 그녀는 5일간 우리 집에 머무르기로 했다.
【어떡하죠?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오래 신세를 지는 것 같아요….】
“괜찮다니까요? 그리고 아티야, 결정한 건 더 말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으으….】
“그렇게 미안하면 와서 맛있는 디저트 사요. 여기에 되게 유명한 애플파이 가게가 있거든요. 하루에 딱 30개밖에 안 팔아서 열기 전부터 줄 서서 기다려야 해요.”
내 말에 아티야는 밝게 대답했다.
【아, 애플벌룬 말이죠?】
“어? 아티야도 알아요?”
【그, 그게…, 엄청 맛있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애플벌룬이 그렇게 유명했나?’
애플벌룬은 지난달에 수도에 생긴 디저트 가게였다.
아무리 맛있다고 해도 이제 막 생긴 가게가 다른 나라까지 소문이 퍼졌다니, 조금 의문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