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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49)화 (49/122)

제49화. 8장. 일단 엔딩만 보자 (2)

쟤 진짜 왜 저래?

“뭐…라는 거야?”

“그러니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

레이프는 마치 비운의 여주인공처럼 가련하게 바닥에 철퍼덕 엎어졌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가까워서 그렇다고 하지만 그는 예외였다. 

나는 차가운 시선으로 레이프를 바라보았다.

“재미없어, 장난 그만해.”

입으로 흑흑, 소리를 내던 레이프는 슬그머니 내 눈치를 보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에이, 뭐야. 그렇게 놀랐으면서 재미없게. 언제부터 눈치챘어?”

“가슴에 손을 얹고 그간의 네 모습을 돌아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게 과장되게 말하면 모르고 싶어도 알 수밖에 없어.”

“하하, 그런가?”

능글맞은 웃음소리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왜 그렇게 멀찍이 떨어져 있는 건데?”

요 며칠간, 내 나름대로 여러 가지를 생각해 봤다.

레이프야 워낙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였으니 이거다 싶은 건 딱히 없었다.

그나마 그중에서 그럴듯했던 생각은 미안해서 거리를 두는 것이었다.

페널티로 쓰러진 나를 찾아왔을 때 보였던 얌전한 태도를 생각하면 아예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세이딘도 참, 외로우면 외롭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그럼 얼마든지 가까이 다가갈 텐데…, 이렇게.”

온몸으로 같잖은 농담을 지껄인 레이프는 어느 순간 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마음의 준비 없이 당한 상황에 놀란 나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뒤로 물러나고 싶었지만, 소파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뒤로도 앞으로도 꼼짝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어때?”

오롯이 나를 담은 호박색 눈동자와 뺨을 스치는 얕은 숨결에 온몸에 있던 피가 얼굴로 모여들었다.

얘는 어떻게 돼먹은 게 매번 이렇게 극과 극이야?!

나는 재빨리 정신을 차려 레이프의 양 볼을 잡았다.

그리고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아직 덜 가신 충격으로 인해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라 가능한 짓이었다.

“아악! 아아!(아파!)”

“그럼 아프라고 하지 안 아프라고 이러니? 넌 좀 아파 봐야 해.”

“아악! 세이인, 자시안!(세이딘, 잠시만!)”

레이프의 사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분이 풀릴 때까지 볼을 잡아 뜯었다.

“으, 너무해라…. 내게 이러는 게 전 인류적 피해라는 거 알고 있어, 세이딘?”

볼을 문질거리며 불만을 토로하는 레이프는 이제 딱 그 나이대 소년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프다고 징징대는 것과 달리, 그는 볼이 조금 빨간 것 외에는 평소처럼 완벽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의 얼굴 앞에 손거울을 비추며 대꾸했다.

“걱정하지 마, 인류 피해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 멀쩡하니까.”

“당연하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곧바로 마법으로 붓기를 가라앉혔는걸.”

어째 며칠 안 본 사이에 단단히 바보가 된 모양이네.

나는 혀를 차며 레이프의 가슴을 밀어냈다.

“가까우니까 떨어져. 이런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나 하려고 말 건 거 아냐.”

제법 힘을 실어 밀쳐 냈는데도 레이프는 조금의 미동조차 없었다.

나보다 어린 소년의 모습이라 너끈히 밀릴 줄 알았는데 조금은 충격이었다.

순간 싱글싱글 웃던 레이프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나를 담아낸 호박색 눈동자가 어쩐지 조금 애틋해서 나도 모르게 쳐다보게 되었다.

‘호감이 있습니다.’

심장이 덜그럭거렸다.

하필 이런 순간에 떠오르는 게 저런 거라니.

나는 단번에 밀려오는 어색함과 민망함과 쑥스러움을 어떻게든 떨쳐 내려고 발버둥 쳤다.

언제나 그랬듯 상황은 내 편을 들어 주지 않았다.

“세이딘은 아무렇지도 않아?”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이프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덕분에 머릿속에 떠올랐던 호감도 코멘트는 한층 더 강하게 자리 잡았다.

“뭐가?”

나는 쏟아지는 어색함을 꾸역꾸역 밀어내며 물었다.

“모르는 척하긴.”

괜히 가슴 뜨끔하게 레이프가 피식 웃었다.

이렇게 티를 내는데 모를 리가 없었다. 알고 싶지 않을 뿐이지.

게다가 레이프와 나 사이에 벽처럼 떠오른 알림이 이 상황이 무엇인지 확인사살을 시켜 주고 있었다.

[데스티니 연애 이벤트 — 너와 나의 거리]

‘왜 이렇게 감성적이야….’

업데이트의 영향으로 이벤트 밑에는 수락과 거절이 떠 있었다.

‘거절! 거절거절거절!!’

나는 필사적으로 거절을 외쳤다.

공략캐 중 하나와 엔딩을 봐야지만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상황에서 레이프의 이벤트는 분명 내게 필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나는 이 상황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이벤트가 거절되었다는 알림과 함께 레이프가 말을 이었다.

“이러고 있으면 난 네게 더 닿고 싶은데 말이야.”

나는 그저 당황스러웠다.

지금껏 몇 번이고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말들을 해 온 레이프였지만, 단 한 번도 지금처럼 진솔했던 적은 없었다.

심지어 내 이마에 키스를 했을 때도 장난스러운 듯 알 수 없는 태도를 취하곤 했으니까.

‘이거 거절된 거 맞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도 의심이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워 아무 말도 못 하는 나를 보며 레이프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너는 내게 관심 없잖아? 가뜩이나 미움받는데 이 이상 더 나쁘게 기억되고 싶지 않아.”

말을 끝맺음과 함께, 얼굴을 간지럽히던 숨결이 멀어졌다.

소파에서 떨어진 레이프는 두 손을 들고는 몇 걸음 뒤로 더욱 물러났다.

“그래서 이 정도라도 거리를 두면 널 보면서 동시에 너도 날 무해하다 여기지 않을까 했어. 그뿐이야.”

그 말을 끝으로 레이프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빙글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얼마나 표정 변화가 감쪽같은지 방금 전의 진지한 모습도 모든 것이 꿈처럼 여겨질 지경이었다.

그 후로도 레이프는 아무렇지 않게 내게 말을 걸었다.

대부분 내가 없는 동안 저택에서 벌어진 이야기들이었는데, 나는 여전히 사고가 정체된 상태여서 고개만 끄덕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단테에게 부탁한 것이 있어서 잠시 다녀올게. 그럼 이따 봐, 세이딘.”

레이프는 내게 손을 흔든 뒤, 곧장 모습을 감추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정적과 함께 나는 소파에서 주르륵 미끄러졌다.

“미, 미친….”

계속 숨을 쉬고 있었는데도 왜 오랫동안 숨을 쉬지 않은 느낌이지?

뒤늦게 심장 소리가 저만치서 달려왔다.

여러 생각이 머릿속에서 뒤엉켜 먼지처럼 굴러다니다가 점점 실타래처럼 몸을 부풀려 갔다.

“나… 살 수 있는 거지?”

이벤트 거절을 해도 이 정돈데 수락을 눌렀으면 어땠을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나는 가슴께를 부여잡으며 심호흡을 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안일했다.

지금껏 숱한 이벤트를 봐 왔지만 스스로를 당사자로 여기지 못했기에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주인공인 아티야가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과 모든 이벤트의 당사자가 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지금은 굉장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으아아!”

나는 소파에 얼굴을 박고 소리를 질렀다.

이래서는 언제 마음의 준비가 가능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대로는 안 돼.”

지금처럼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고 해서 마냥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업데이트되면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뀌었든 안 바뀌었든 페널티는 최대한 안 받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언젠가는 수락을 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게 먼 미래일지, 아니면 오늘 당장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었지만, 어찌 됐건 그날에 대해 대비를 해 둬야 했다.

“일단 한 명씩 다 만나 보자.”

솔직히 만나고 싶은 생각은 안 들었지만 별 뾰족한 수가 있는 게 아니니 별수 없었다.

원래는 이벤트와 관련된, 혹은 도움이 될 법한 아이템을 사 두려고 했다.

그러나 도주하는 날을 위해 조금만 필요하다 싶으면 망설임 없이 사재낀 바람에 남은 H가 없었다.

그렇게 되니 자연스럽게 남은 선택지는 몸으로 부딪치는 방법밖에 남지 않았다.

한숨만 나오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일단 단테는 레이프가 같이 있을 거니까 제외하고…. 남은 건 이티엘이랑 린든이구나.”

나는 망설임 없이 린든을 골랐다.

온몸으로 호감을 티 내는 이티엘보다도 어느 정도 거리와 예의를 지키면서도 호감을 보이는 린든이 대하기도 대처하기도 편했다.

“아가씨, 어디 가시려고요?”

바로 실행에 옮기기 위해 방문을 열자, 앤이 서늘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 맞다. 나 근신 중이었지.’

그간 방에서 지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어서 잠시 잊고 있었다.

부모님은 내가 사라졌다 돌아온 후로 큰 충격을 받고는 혹시라도 또 내가 갑자기 사라질까 싶어 방지책으로 저택의 경비를 늘렸다.

게다가 그것도 모자라 사용인들을 내 방문 앞에 세워 돌아가면서 보초를 세우기까지 했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안녕, 앤.”

“저는 안녕 못 하네요.”

돌아오는 대답이 어찌나 쌀쌀맞은지, 괜히 머쓱해졌다.

뭐, 이해한다. 내가 돌아온 날, 앤은 나를 보자마자 꽉 붙들고 장장 세 시간이나 통곡하며 울었으니까.

많이 걱정했던 만큼 우리 사이에 어떤 언질도 없이 사라진 내게 무척이나 서운할 것이다.

앤은 나를 힐끗 바라보고는 무심한 척 말했다.

“용건이 없으시면 들어가 계세요.”

“으, 으음…. 용건이 있긴 한데….”

“식사와 화장실 이외의 일이라면 안 돼요. 주인님께서 보시면 근신 기간을 늘리신다 하셨어요. 애초에 도울 생각도 없지만요.”

“앤, 그러지 말고….”

“전 안 도울 거예요.”

어쩔 수 없지.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말하니 나가는 건 포기해야겠다.

“그럼 편지는? 보내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

“네, 그 정도는 괜찮아요. 어떤 분 앞으로 보내실 건데요?”

“린든 브누아 영식에게 보낼 거야. 할 말이 좀 있어서.”

린든의 이름을 들은 앤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의 생각이야 뻔했다.

대륙 미남 뭐시기에 자랑하거나 팔 만한 게 없을까 계산기를 두들기는 거겠지.

“브누아 영식에게 사인해 달라고 부탁할게.”

내 한마디에 얼음기둥 같던 앤의 표정이 사르르 녹았다.

“당장 펜이랑 편지지를 대령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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