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8장. 일단 엔딩만 보자 (1)
“왜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어?”
허공만 멍하니 보는 내가 이상했는지 에이브가 의문을 보냈다.
“아니, 아주 문제없이 잘 되고 있어.”
건성인 대답이 에이브에겐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지만 지금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업데이트를 시작합니다. (70%)]
빠르게 진행되는 업데이트를 보며 나는 혀를 내둘렀다.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이렇게까지 극도의 컨셉질을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업데이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마침내 모든 것이 끝났다는 알림과 함께 시스템창이 번쩍거렸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시스템창을 본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럴 리 없어. 잘 봐 봐.”
그럴 거면 네가 직접 보라고 하고 싶었지만 슬프게도 시스템창은 나만 볼 수 있었다.
덕분에 나는 메뉴를 하나하나 누르는 수고를 들여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장 첫 메뉴인 내 정보가 변경되었다는 것이었다.
[세이딘 그웨니르]
▷엔딩까지 앞으로 60%
▷스킬: 협상 lv.2
얼핏 보기엔 이전과 다른 것이 없어 보였지만 ‘엔딩까지 앞으로~’라고 적힌 알림이 가장 큰 변화였다.
“고작 60%밖에 달성하지 못했다고?”
온갖 이벤트란 이벤트를 신나게 봤는데 그것밖에 되지 않은 게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60%? 뭘 달성했다는 거야?”
“그런 게 있어. 이따가 설명할게.”
투명한 상태창 너머로 보이는 에이브는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해 불만이 가득했다.
그 외에도 나는 이것저것 눌러 보았다.
변함없는 소지품 목록을 넘어 호감도를 확인한 나는 당황했다.
각 공략캐의 호감도를 숫자로 보여 줬던 이전과 달리, 호감도 밑에는 몇 가지 짧은 코멘트가 달려 있었다.
[레이프 유클리드]
360
▷당신에게 깊은 호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혼란스럽습니다.
▷고백이 멀지 않습니다.
한 명 한 명 확인하던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플레이어의 입장이라면 굉장히 친절한 게임이라고 생각하고 넘길 일이었지만, 현실이 된 이상 썩 좋은 일이 아니었다.
‘이런 걸 보고 나서 어떻게 얼굴을 봐!’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상대의 상태를 알게 되면 신경 쓰일 뿐이었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건 뭔데?’
제멋대로고 능글맞은 레이프가 혼란스러워하다니, 좀처럼 상상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있을 수 없는 일도 아니었다. 어제만 해도 무서울 만큼 내 말을 잘 듣고 얌전했었으니까.
사실 내가 제일 신경 쓰이는 건 가장 아래에 있는 코멘트였다.
고백이라니, 실화입니까?
더 이상 볼 수 없던 나는 테이블에 그대로 머리를 처박았다.
“와, 진짜 도망가고 싶다.”
“뭐라는 거야? 이미 그랬으면서.”
“아니, 이 세계에서 탈주하고 싶다고.”
“뭐?”
깜짝 놀란 에이브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제약이 풀렸는데도 그런 기분이 들어?”
“그건 잘 모르겠고, 갈수록 더 거지 같아지는 것 같네.”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에이브를 뒤로하고 나는 꾸역꾸역 남은 공략캐들도 살폈다.
하나같이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문구와 함께 덧붙은 코멘트들이 전부 의미심장했다.
[이티엘]
▷불이 지펴졌습니다.
[린든]
▷숨겨 왔던 마음을 드러내려 합니다.
[단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후, 후후후….”
입을 비집고 웃음이 흘러나왔다.
무슨 말인지 알 듯하면서도 알 수 없는 코멘트들에 가슴이 답답했다.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에이브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신은 날 어지간히도 엿 먹이고 싶나 봐.”
“무례한 것도 정도껏…!”
“그게 아니면 천사가 좀 부탁했다고 이런 일을 벌이는 게 말이 돼?”
“당연히 신께서 날 무척이나 예뻐하셔서 그런 거 아니겠어?”
얼씨구.
“그래, 긍정적인 건 좋은 거지.”
“너 되게 빈정거린다?”
이럴 땐 눈치도 빨라요.
나는 어떻게든 이 찜찜한 마음을 털어 내기 위해서 나머지 메뉴도 빠르게 훑었다.
상점은 없던 아이템이 새롭게 입고되었고, 갖고 있던 아이템들은 소소하게 효과가 하나둘 추가되어 있었다.
‘신도 조금은 미안했나 보네.’
기왕이면 조금이라도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 법한 것들을 주면 좋을 텐데 말이야.
아쉬움을 느끼는 것과 함께 나는 마지막으로 이벤트 메뉴를 골랐다.
그러자 다른 창에서는 볼 수 없었던 공지가 떠올랐다.
[공지]
플레이어의 의견을 반영하여 몇 가지 사항이 수정되었습니다.
▷앞으로는 대부분의 이벤트가 수락과 거절이 가능합니다.
(일부 이벤트의 경우, 상황에 따라 거절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벤트 진행 여부를 3회 이상 거절할시 패널티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주의해 주세요.
(이벤트 거절 패널티는 특정 조건을 달성하면 사라집니다.)
▷이 세계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을 때 주어지던 패널티를 폐지하였습니다.
마음껏 이 세계를 즐겨 주세요!
‘오, 이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데?’
공지를 다시금 읽어 본 나는 활짝 웃었다.
페널티가 있긴 해도 3회에 한해서는 거절을 할 수 있는데다, 그 페널티 마저도 특정 조건을 달성하면 없앨 수 있으니 여러모로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조건이었다.
게다가 이 세계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을 때 주어지던 페널티가 없어져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이 세계를 즐기라는 말이 가장 거슬리지만.’
나는 시스템창을 닫았다.
“일단 제약은 풀린 것 같네.”
“그렇지? 신께서 틀릴 리가 없다니까!”
자기 일처럼 으스대던 에이브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이거, 전해 달라고 부탁받은 거야.”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것을 보는 순간, 나는 정색했다.
그것은 매듭으로 엮은 붉은 꽃 머리핀이었다.
“레이프를 만나고 왔어?”
“할 말이 좀 있어서. 많이 걱정하더라.”
에이브의 말과 함께 괜찮냐고 묻던 레이프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나는 고개를 저었다.
“걱정은 무슨, 자기 봉인을 풀어 줄 사람이 사라지면 곤란하니까 그런 거지.”
“정말 그렇게 생각해?”
진지한 물음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데? 좋은 마음이라도 가져야 해?”
“이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은 거 아니었어?”
얼핏 듣기엔 물음이었지만 에이브의 어투에는 은근한 협박이 담겨 있었다.
아티야가 데스티니와 엮이지 않으면 뭐든 괜찮다는 거야, 뭐야?
나는 불쾌함을 조금도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네가 할 말이 아니지.”
“널 끌어들인 건 미안하지만, 애초에 레이프 유클리드만 아니었다면 이런 일도 없었어. 그러니 원망할 거면 그를 원망해.”
아무래도 저 멍청한 천사는 사과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미안한 짓을 했으면 적어도 눈치라도 볼 줄 알아야 하는데 에이브는 그런 게 일절 없었다.
시간 낭비라는 생각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은 머리핀도 함께 챙겼다. 돌아가면 레이프에게 왜 줬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어디 가? 레이프에 대해 듣고 싶지 않은 거야?”
“이제 필요 없어졌어. 그 시간에 조금이라도 심신 안정을 취하는 게 훨씬 이로울 것 같거든.”
“…후회할지도 모르는데?”
참으로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후회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게 존재하긴 해?”
더 이상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나는 그대로 식당을 나갔다.
개선된 시스템에 조금 누그러졌던 마음이 단숨에 메마른 땅처럼 딱딱해져 버렸다.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 방으로 향하자, 문 앞에 선 아티야가 보였다.
나를 기다렸던 것인지 그녀는 나를 보며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아, 잘 왔어요, 세이딘! 에이브와 대화는…. 세이딘?”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상태가 어떤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구겨진 종이처럼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겠지.
올라오면서도 심호흡을 해 봤지만 끓어오르는 화는 좀처럼 가라앉을 줄 몰랐다.
“이거 받아요, 세이딘.”
아티야는 더 묻지 않는 대신 내 손에 종이봉투를 쥐여 주었다.
뭔가 싶어 안을 열어 보니, 다양한 모양의 쿠키가 가득 들어 있었다.
“제가 만든 거예요. 이따 가는 길에 드시면 좋겠다 싶어서요.”
이 정신 나간 세계 같으니라고. 어딜 가나 미친놈들이 판치는 마당에 여주인공은 왜 이렇게 착한 건데.
‘사실 천사는 아티야가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내가 알고 있는 천사의 뜻이 다른 걸지도 모르겠다.
아티야가 만든 쿠키를 보며 나는 조금씩 화를 삭였다.
그래, 화가 났을 땐 단 게 최고지.
나는 조금 누그러진 얼굴에 미소를 그렸다.
“고마워요, 아티야. 잘 먹을게요. 하나 먹어 봐도 돼요?”
내 물음에 아티야는 활짝 핀 해바라기처럼 웃었다.
“물론이죠!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어요.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건 저 해님 쿠키예요.”
나는 아티야의 추천대로 해 모양의 쿠키를 꺼내 먹었다.
바삭한 식감과 함께 달콤한 초콜릿이 입안 가득 퍼졌다.
몇 가지 쿠키를 더 집어 먹고 나서야 그제야 나는 좀 기분이 풀렸다.
“고마워요, 아티야. 방금 전까지 정말 죽을 맛이었거든요.”
“세이딘도 참! 그렇게 칭찬하시면 진짠 줄 알아요. 그래도 기분이 풀렸다면 다행이에요.”
나는 진심이었지만 아티야는 농담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그래도 뭐, 기뻐하는 눈치니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웃음소리가 조금씩 작아지는 것과 동시에 아티야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 저 죄송해요, 세이딘.”
“왜 아티야가 사과해요? 잘못한 건 에이브예요.”
“그렇지만 에이브가 저러는 건 저 때문에 그런 걸요.”
“아티야, 에이브에게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한숨 섞인 내 물음에 아티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아뇨! 전혀요!”
“그럼 에이브의 행동에 책임감을 느끼거나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상대가 원치 않는데도 멋대로 행동한 건 그쪽이지 아티야가 아니니까요.”
단호한 내 말에 아티야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하여간 착해빠져 갖곤.
이래서 여주인공이구나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용케 이 세계에서 버텼구나 싶었다.
‘반복해서 살고 있다는 걸 모르니까 그럴 수도.’
나는 속으로 납득하며 아티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당황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슬픈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세이딘.”
이윽고 여러 감정을 추스른 아티야가 말했다.
당연한 걸 말했는데 칭찬을 들으려니 조금 민망한 기분이었다.
나는 쑥스러움을 감추고자 화제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마음 같아선 제 방에 들렀다 가시라고 하고 싶은데 시간이 촉박하네요.”
“앗, 그런 거라면 신경 쓰지 마세요! 조만간 다시 만날 거잖아요.”
만나는 게 기대된다는 말을 덧붙인 아티야는 천진하게 웃었다.
그녀는 통신구로 연락을 달라고 몇 번이고 당부한 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아티야 덕에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방에 들어간 나는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아티야에게 받은 통신구를 마지막으로 모든 짐을 정리한 뒤, 시스템창을 열었다.
엑스트라의 휴일의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시간은 충분하네.”
3시간 정도면 주변을 한 번 더 둘러보고 갈 수 있었다.
모처럼 먼 곳까지 왔으니 조금 더 구경하고 싶긴 했지만, 며칠 내내 소진된 체력으로는 어려움이 따랐다.
“우선은 그냥 돌아가야겠다.”
돌아가면 몰아칠 후폭풍이 두렵긴 했지만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얼른 가서 해결하고 쉬는 게 내게는 훨씬 더 좋은 일일 수도 있었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나는 짐을 들고 프런트로 내려갔다.
* * *
예상대로 3일 만에 돌아온 집은 난리도 아니었다.
이티엘은 대체 어디 갔었던 거냐며 나를 안고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고, 린든은 돌아와 줘서 다행이라는 말만 반복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단테는 안도를 나타내기보단 그저 ‘신기하군.’이라는 한마디를 했을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레이프는 하루 사이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던 건지 멀찍이 떨어져서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왜 저러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며칠 만에 집에 돌아온 탓에 그럴 여유는 없었다.
정신없이 주변을 진정시키고 나니 어느새 4일이 훌쩍 지나 있었다.
이제야 겨우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지금, 레이프의 기행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너 왜 그래?”
“뭐가?”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러냐고.”
레이프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예쁘게 접었다.
“설마 세이딘, 날 신경 써 주는 거야?”
“뭐…?”
내가 벙쪄서 말을 잇지 못하는 틈을 타, 레이프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양손을 꼭 맞잡았다.
“고맙지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이제 나는 이렇게 멀리서 널 응원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거든.”
절로 얼굴이 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