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7장. 운명과 페널티 (8)
“그렇군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티야는 어쩐지 굉장히 불안한 표정이었다.
에이브가 그간 얼마나 못 미덥게 굴었는지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걱정이 많아진 아티야가 겨우 음식을 골라 종업원에게 주문을 넣었을 때였다.
식사를 다 마친 에이브가 쭈뼛거리며 이쪽으로 왔다.
그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더는 다가오지 못하더니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아티야.”
“서 있지 말고 앉아.”
아티야는 눈에 띄는 것이 싫어 한 말이었지만, 그럼에도 앉으라는 말이 좋았는지 에이브는 활짝 핀 얼굴로 냉큼 앉았다.
어쩐지 개와 주인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착각이겠지?
그렇게 시작된 침묵은 식사가 나올 때까지 이어졌다.
음식을 들고 오는 종업원이 얼마나 반갑던지 하마터면 고맙다고 손을 잡을 뻔했다.
아티야가 나를 향해 활짝 웃었다.
“세이딘, 얼른 드세요!”
그 뒤에서 부럽다는 듯 바라보는 에이브의 시선은 처절했다.
하지만 그래 봐야 자업자득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 불쌍하단 마음은 들지 않았다.
나는 아티야와 함께 철저하게 에이브를 무시하며 식사를 시작했다.
마지막 빵을 꼭꼭 씹어 넘길 때까지 단 한 번도 그가 있는 쪽을 보지 않은 것은 덤이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야무지게 디저트까지 먹고 나서야 아티야는 처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점점 공기와 동화되어 가던 그는 오랜 시간 끝에 구조를 받는 사람처럼 얼굴이 환해졌다.
“아티야, 미안해.”
“이제 그 말은 듣고 싶지 않아. 그렇게 여러 번에 걸쳐 사과할 바에는 그냥 미안한 일을 만들지 않으면 안 돼?”
내게는 한없이 순둥순둥한 아티야였지만, 에이브에게 쏟아 내는 말만큼은 한마디 한마디가 화살처럼 날카로웠다.
‘잘한다, 아티야!’
하지만 구경하는 내게는 그저 시원한 사이다일 뿐이었다.
얼마나 속이 뻥 뚫리는지 페널티 때문에 쏟아 내지 못했던 지난밤의 육두문자들이 마음속에 살아나서 춤을 출 지경이었다.
한참 동안 쏟아지는 아티야의 말을 듣던 에이브는 그녀가 잠시 숨을 돌린 틈을 타 입을 열었다.
“그, 어제 세이딘에게도 진심으로 사과했어. 처음 보는 사이인데 내가 너무 무례하게 굴었다고.”
하, 아티야에게 미움받기 싫어서인지 이런 때는 또 감쪽같이 거짓말하네.
내가 언제 너랑 처음 봤어요? 너 나 납치했잖아.
눈에 힘을 가득 주고 바라보자, 에이브는 황금빛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자기 딴에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는 신호인 듯싶었지만 못 본 척했다.
아티야에게 말할 생각은 없지만 오해해서 실컷 쩔쩔매라지.
“그런 걸로 생색내지 마, 에이브. 네가 세이딘에게 사과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어.”
“…미안.”
거침없는 말에 에이브는 한없이 위축되었다.
“그걸로 할 말은 다 끝난 거지?”
“어? 으응….”
어쩔 줄 몰라 하며 쩔쩔매는 에이브를 보며 아티야는 짙은 한숨을 터뜨렸다.
“이제 다시는 내가 바라지도 않는 일들을 멋대로 하지 마.”
아티야는 천사인 모양이었다. 저렇게 독단적인 놈을 용서해 주는 걸 보면.
수시로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에이브의 얼굴이 봄처럼 화사하게 피어났다.
“그럼…!”
“이번만이야. 두 번은 없어.”
“물론이야!”
에이브는 아티야의 경고에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처럼 넓은 아티야의 마음 덕에 다시 한번 기회를 얻은 에이브는 기분이 좋은지 실실 웃기 시작했다.
“아참, 에이브. <올라가다>를 보고 나면 곧장 제르아일 제국으로 갈 거야.”
“뭐!?”
온몸으로 행복을 표현하던 에이브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그는 의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내가 아티야를 선동해서 제르아일 제국으로 가게 유도했나 하는 눈치였다.
“왜 세이딘을 쳐다봐, 에이브? 가고 싶다 말한 건 나야.”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아티야가 곧장 받아치자, 눈에 불을 켜고 노려보던 에이브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순한 양이 되었다.
“아니, 그게… 세이딘도 바쁠 텐데 우리가 가서 괜히 방해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우리 집에 신세를 지는 것도 아닌 걸요, 뭐. 그리고 우리 집에서 지낸다고 해도 저는 상관없어요.”
“정말요!?”
아티야는 눈을 반짝이며 좋아하는 반면, 에이브의 얼굴은 거무죽죽했다.
‘그래, 안 갔으면 좋겠지. 내가 아티야에게 괜한 소리를 하면 어쩌나 걱정이 될 테고.’
참으로 속 보이는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모르는 척 어깨를 으쓱했다.
“며칠 머무는 건 허락이 없어도 괜찮지만, 장기로는 부모님께 한번 물어봐야 해요.”
“고마워요, 세이딘! 하지만 무리해서 허락을 받는 거라면 그러지 않아도 돼요.”
“아뇨, 전혀요! 저희 부모님은 그렇게 꽉 막힌 분들이 아니거든요. 오히려 좋아하실 거예요. 제가 또래 친구가 거의 없거든요.”
“또래 친구…!”
아티야의 양 볼이 살짝 빨개졌다.
반응을 보니 그녀 또한 친구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아티야와 나는 제르아일 제국에 오면 무엇을 할 것인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녀와 내가 화기애애할수록 에이브는 눈부신 외모가 아까울 만큼 존재감이 흐릿해져만 갔다.
“세이딘, 이후로도 시간이 괜찮으면 저랑…,”
“아티야.”
에이브는 한창 신나게 말하던 아티야를 불렀다.
불만 어린 시선에 그는 어쩐 일인지 위축되는 모습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잠시 자리 좀 비켜 줄 수 있어? 세이딘과 할 말이 있어서.”
의외의 상황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에이브가 계속 말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당당하게 말할 줄은 몰랐다.
아티야는 말없이 에이브를 바라보았다.
불만이 어렸던 눈동자에 알 수 없는 빛이 어렸다.
조금 시간이 흐른 뒤, 한숨 섞인 대답이 흘러나왔다.
“대신 오래 붙들지 마. 세이딘은 좀 있으면 집에 돌아가야 해.”
“알고 있어.”
짧은 대답을 들은 아티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에게 꼭 말하라는 말과 함께 내게 통신구를 주고 갔다.
이후에 연락을 주고받으려면 필요하니 꼭 받아 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비싼데….”
이티엘이 준다는 것을 사양했더니 여주인공이 주네.
그저 웃을 따름이었다.
“받기 싫으면 아티야에게 돌려줄까?”
이놈 봐라, 아티야가 없으니까 곧바로 건들거리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다음에 만나서 돌려줄 거니까.”
에이브는 살짝 눈을 찌푸렸다.
빈틈이 없네 뭐네, 하며 중얼거린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가볍게 무시하고 팔짱을 꼈다.
“그래서 이야기는 잘 하고 왔어?”
신에게 페널티 좀 없애 달라고 부탁한다며.
안 그래도 어떻게 됐나 궁금하던 차였다.
“어제 상황들을 보셨는지 아주 흔쾌히 허락하시더라. 너같이 독한 앤 처음 본다 하시면서 말이야.”
어이가 없네?
나는 헛웃음을 머금었다.
“조용히 살던 사람을 진흙탕에 몰아넣어 놓고는 뭐라는 거야? 독하네 마네, 하기 전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 좀 하시라 그래.”
“칭찬이야!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하셨어!”
아하!
“그러니까 신은 칭찬을 했는데 네가 멋대로 해석했단 말이네?”
“…….”
정곡을 찔린 에이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신님, 보고 계시죠? 당신의 발닦개가 하는 꼬라지를요!”
“바, 발닦…!”
다소 무례할 수 있는 말에 에이브가 아득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며칠 연속으로 멘탈이 와르르 깨지다 못해 바사삭 재가 되어 버렸다.
그런 사람에게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고 멀쩡할 거라 생각하는 놈이 잘못이었다.
‘뭐, 신도 생각이 있으면 이런 걸로 내게 벌을 내리거나 그러지 않겠지.’
그렇게 아니꼬우면 데려가든가.
멘탈이 깨진 나는 위태로움과 동시에 강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와서 돌아다닌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배짱도 넘쳤다.
‘그래, 또 무슨 말을 할지 한번 들어나 보자!’
내 마음가짐이 전해졌는지 에이브는 의자를 들어 주춤주춤 물러서더니 결국엔 테이블과 상당히 어정쩡한 거리에 떨어져 앉았다.
지나가는 종업원들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내 분위기가 워낙 살벌한 탓인지 함부로 다가오지는 못했다.
“자.”
에이브는 느닷없이 그 어정쩡한 거리에서 손을 내밀었다.
‘왜 저러는 거지?’
영문을 알 수 없어 눈만 깜박거리고 있었더니 에이브가 얼굴을 붉히며 발끈했다.
“손! 손 달라고!”
그럴수록 나는 수상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내가 왜?”
“제약 풀기 싫어?”
“아뇨.”
뭐야, 그런 거면 진작 말하지.
나는 에이브에게 바싹 다가가 냉큼 손을 잡았다.
그는 어이없다는 시선을 숨기지 않았다.
“너 진짜 간신배 같다.”
단어 선택도 꼭 저 같은 걸로 골라요.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고마워, 내가 좀 유연한 사고를 하는 편이지.”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닌데.”
불만스레 꿍얼거린 에이브는 손을 잡고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 그가 손을 놨다.
“다 됐어.”
“뭘 했는데 다 됐다고 해? 아무 반응도 없었잖아.”
자랑은 아니지만 내 주변에 마법사만 둘이다.
그들이 마법을 쓸 때면 온갖 빛이 찬란한데 지금은 빛은커녕,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불신을 가득 담아 쳐다보니, 에이브가 되레 나를 황당하게 여겼다.
“이게 마법이랑 급이 같은 줄 알아? 신의 권능이라서 더욱 아무 현상이 없는 거야.”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마법사도 아니고 성직자도 아닌데.
불친절한 설명에 나는 얼굴이 펴질 줄을 몰랐다.
“어서 확인이나 해 봐.”
“어떻게?”
“너만 볼 수 있는 게 있다며. 그걸로 확인해.”
시스템창을 말하는 거구나.
기왕 알려 주는 거, 한 번에 설명을 해 주면 좀 좋아?
그런 생각과 함께 시스템창을 연 나는 깜짝 놀랐다.
“이게… 뭐야?”
알 수 없는 이상한 문자들이 빠르게 스쳐 가고 남은 자리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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