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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46)화 (46/122)

제46화. 7장. 운명과 페널티 (7)

“정말이죠?”

“네, 정말이에요. 조금 더 마시다가 조용히 잠든 게 다예요.”

“다행이다…!”

아티야는 안도에 찬 한숨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번에도 실수했으면 어쩌지 했거든요.”

“…네?”

대체 무슨 실수를 한 거야?

어리둥절한 내게 아티야는 무척이나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그게… 제가 술을 마시면 그때그때 다른 모양이에요. 저번에 마셨을 때는 에이브를 엎어치기를 했었고, 그 전에는 속이 안 좋아서 에이브에게 실례를 했다더라고요.”

“음….”

이쯤 되면 그냥 에이브가 싫어서 그랬던 게 아닐까?

“저랑 마실 땐 안 그랬어요. 굳이 주사가 있었다면 이미 꽤 마셨는데도 이제 한 잔이라고 했던 것 정도?”

“정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우지 않았더라면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가늠이 되지 않지만, 어찌 됐건 평화롭게 넘어갔으니 잘된 일이었다.

아티야는 몇 번이고 확인을 받아 내고서야 안심이 되었는지 비로소 활짝 웃었다.

“그런데 세이딘, 여기엔 언제까지 머무를 거예요?”

갑작스럽게 훅 치고 들어온 화제에 나는 맞지도 않은 명치가 아팠다.

이렇게 현실을 자각하는구나.

“오늘 저녁에 돌아갈 예정이에요.”

나는 꾸역꾸역 시스템창을 확인한 뒤, 겨우 대답했다.

이렇게 말하면 아직도 여유로운 것 같았지만 시간으로 따졌을 때, 남은 시간은 기껏해야 6시간 정도였다.

‘아직 돌아가기 싫은데.’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혔다.

공략캐들은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로 아직 우리 집에 있을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라면 각자 자신들이 가진 힘을 동원해서 나를 찾고 있거나.

‘그것도 아니면 둘 다일 수도.’

어찌 됐건 내가 그들이 보는 앞에서 사라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 어떤 식으로든 행동을 하고 있을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거기서 사라졌던 내가 딱 나타난다면?

소식을 듣자마자 당장 쫓아와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볼 것이 분명했다.

“으으, 끔찍해라.”

“세이딘?”

당황하는 목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나도 참, 얼마나 끔찍하면 속마음을 입 밖으로 꺼낸담.

“미안해요, 아티야.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니 너무 아쉬워서요….”

“그 맘 이해해요. 저도 나왔다가 다시 집에 돌아가려고 하면 한편으로는 그리우면서도 가고 싶지 않더라고요.”

“맞아요, 지금 제가 딱 그런 기분이에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거보단 훨씬 더 절망적인 기분이었지만.

공감하는 나를 보며 방긋 웃던 아티야는 무언가를 조금 생각하더니 내게 물었다.

“그럼…. 저도 갈까요?”

“네?”

가다니, 어딜?

동그랗게 뜬 눈을 깜박거리고 있으려니 아티야가 말을 이었다.

“제르아일 제국이요. 그렇게 관심 있는 나라는 아니었는데 세이딘이 간다면 한번 같이 가 볼까 싶어서요. 어떨까요?”

순간 페널티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온몸이 저릿거렸다.

하지만 눈앞에는 어떤 경고도 없었고, 시끄럽게 앵앵거리는 경고음도 조용했다.

꿈인가 싶어 볼을 힘껏 꼬집어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멍이 생기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얼얼했다.

‘아티야가 제르아일에…?’

한껏 부정하던 나에게 현실이 서서히 다가와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드디어 이제 데스티니와 조우하겠구나!’

기쁨으로 벅차오르는 생각도 잠시, 어제 들었던 에이브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 세계는 한번 설정이 되어 버리면 결말이 날 때까지 그 누구도 손을 댈 수 없어. 설령 그게 신이라 해도.’

아, 그랬었지.

나는 머리를 짚었다.

지금 이 세계에서는 나를 여주인공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아티야가 제르아일에 온다 해서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새삼 떠오른 사실에 기분이 급격하게 바닥으로 내리쳤다.

“역시… 안 되겠죠?”

조심스러운 물음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티야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내 행동에 단단히 오해를 한 아티야는 눈에 띄게 시무룩했다.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서 죄송해요. 세이딘이 껄끄럽다면 가지 않도록 할게요.”

“저, 저기 그게 아니고요! 제가 잠깐 머리가 아파서 그랬던 거예요!”

“머리요?”

“네, 어제 늦게까지 무리했거든요.”

틀린 말은 아니지. 어떻게든 진상을 알아보겠다고 주구장창 이어지는 페널티에 기절했다 일어났다 했으니.

게다가 이런 상황을 만든 에이브는 나쁜 놈이었지만 아티야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으니 괜히 긁어 부스럼을 내고 싶지 않았다.

뒤죽박죽인 마음을 모른 척하고 나는 방긋 웃었다.

“그러니까 아티야가 원한다면 같이 가요. 전 좋아요.”

허둥대던 아티야의 얼굴이 오랜 장마 끝에 갠 하늘처럼 찬란했다.

어찌나 활짝 웃던지 눈이 멀어 버릴 지경이었다.

한참을 천진하게 좋아하던 아티야는 무언가 떠올린 듯 손뼉을 쳤다.

“아, 근데 바로 따라가지는 못해요. 아직 볼일이 남아서요.”

“볼일이요?”

“네, 그…, 앞으로 이틀 후에 <올라가다>라는 연극이 시작되거든요. 예전부터 평이 자자했던 데다 여기서밖에 볼 수 없는 거라 꼭 보고 싶어요.”

과연, 예술을 사랑하는 집안의 사람은 남다르다니까.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그런 거라면 꼭 봐야죠. 재미있게 보고 나중에 어땠는지 알려 줘요.”

“고마워요, 세이딘. 그리고 말을 꺼내 놓고 같이 가지 못해서 미안해요.”

“별말씀을요.”

나는 진심으로 괜찮았지만 아티야는 곧장 같이 가지 못하는 것이 미안한 듯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엑스트라의 휴일을 사용하게 되면 자연스레 어디서 났는지 물을 텐데 그게 또 문제였다.

아무리 마도구가 보편화되어 있다고 해도 텔레포트를 담은 마도구는 어지간한 귀족가라 해도 쉬이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아, 맞아! 세이딘, 식사는 아직이죠? 괜찮다면 저랑 같이 드실래요?”

흘러가는 대로 대화를 이어 가던 중, 아티야가 물었다.

점심이라고 하기엔 조금 지난 시간이긴 했지만 사양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이죠, 저는 항상 배고파요.”

“아하하, 세이딘도 참!”

아무래도 아티야는 센스 있는 농담 정도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난 진심이었는데.

나는 아티야에게 밖에서 잠시만 기다리라고 한 뒤, 서둘러 식당으로 내려갈 준비를 했다.

일반적인 귀족 영애라면 잠깐 근처에 가는 것조차 엄청난 시간을 필요로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뭐든지 빨리빨리 해치워야 성미가 풀리는 민족성은 여전히 건재했다.

그 덕에 나는 세수하고 머리를 정돈하고 옷 입는 데까지 정확히 15분 정도가 걸렸다.

“대단해요, 세이딘! 어떻게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렇게 완벽하게 준비할 수 있는 건가요?”

어지간히도 신기했는지 식당으로 내려가는 내내 아티야는 감탄을 연발했다.

나는 가슴을 펴고 자신 있게 말했다.

“아침에 5분이라도 더 자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에요.”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면 이 정도는 우습지.

그러나 한국이라는 나라는커녕, 존재 자체도 모르는 아티야는 사색이 되어 물었다.

“세이딘의 가족들은 잠을 마음대로 자지 못하게 하나요?”

음….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생각해 보는 거예요. 무조건 밖에 나가야 하는데, 시간은 다가오고 잠은 더 자고 싶은, 그런 경우들요.”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관리할 수 있군요. 대단해요!”

관리라기보단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일에 가까웠지만, 좋게 생각해 주니 좋게 받아들이자.

한 번 가 봤다고 두 번째로 가는 식당은 제법 익숙하게 여겨졌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왁자지껄한 밤 분위기와 달리, 낮에는 식사 위주의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상대적으로 조용하게 느껴졌다.

“아…!”

어디에 앉을지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아티야가 갑자기 정색했다.

깊게 가라앉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니, 그 끝에는 분홍빛 머리의 남자가 있었다.

밝은 데서 봐서 그런지 밤보다 훨씬 튀는 에이브는 우리를 발견하고는 이제 막 오믈렛을 입에 넣으려던 채로 굳었다.

‘이 둘, 아직 화해 안 했구나.’

이 껄끄러운 분위기를 어쩌면 좋을까.

어느새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아티야는 내 팔을 잡았다.

“가요, 세이딘.”

“자, 자깐 기아여, 아이야!(자, 잠깐 기다려, 아티야!)”

“에이브, 먹든가 말하든가 한 가지만 해.”

몽글몽글하고 따스했던 아티야의 목소리가 꽝꽝 얼어 버린 호수처럼 무척이나 딱딱하고 차가웠다.

그 말을 듣자마자 에이브는 허둥지둥 입에 든 음식을 삼켰다.

“잠시만, 잠시면 돼…!”

간절한 에이브의 외침에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의 생각은 거기서 거기였다.

“뭐야, 저 남자?”

“바람이라도 피웠나 봐요!”

“세상에, 염치도 없지. 뭘 잘했다고 저렇게 불러대나 모르겠군.”

“쯧쯧, 하여간 요즘 젊은것들은….”

에이브는 아티야에게 너무 집중한 나머지,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수군거림을 듣지 못했다.

덕분에 부끄러움은 아티야의 몫이었다.

“…다 먹으면 이쪽으로 와.”

모여든 이목을 견디기 힘들었던 아티야는 짧게 말한 뒤, 나와 함께 제일 구석으로 갔다.

이렇게 햇살 좋은 날에 창가에 앉지 못하는 게 조금은 아쉬웠다.

“휘말리게 해서 미안해요, 세이딘.”

“전 괜찮아요! 마침 에이브에게 궁금한 것도 있었으니 저야 잘됐죠.”

“에이브에게 궁금한 거요?”

“어제 마무리 짓지 못한 이야기가 있거든요. 그래서 언제 듣나 생각하던 차였어요.”

저놈이 ‘60초 후에 공개됩니다.’ 같은 짓을 벌이고 가 버렸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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