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45)화 (45/122)

제45화. 7장. 운명과 페널티 (6)

아티야 세르비아스.

레이프의 봉인을 도운 소녀는 본디 신을 섬기는 성녀였다.

그녀는 봉인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이 세계가 반복되는 사실을 사람들이 모르도록 타인의 기억을 자신의 몸에 새겨 모든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회귀를 반복했다.

줄곧 그 모습을 봐 오던 에이브는 아티야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고 싶었다.

신의 사자이자 인간의 변호자인 자신이 그녀를 위하지 않으면 누굴 위한단 말인가.

에이브는 주먹을 꽉 쥔 채 레이프를 바라보았다.

사랑을 깨달은 대마법사는 조금도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일은 레이프가 움직일 상황을 만드는 수밖에.

“그래, 알았어.”

레이프의 눈이 가늘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던 에이브가 순순히 물러나는 것이 의심스러웠다.

“뭐야, 그 의심스러운 시선은.”

“별거 아냐. 무슨 속셈을 꾸미는 건가 싶어서.”

“대체 날 뭘로 보는 거야?”

“아둔한 천사놈.”

거침없는 대답에 에이브는 눈을 찌푸렸다.

되받아치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잘 숨기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의 계획을 말해 버리면 곤란했다.

에이브는 실수하지 않기 위해 몇 번이고 할 말을 되새긴 뒤, 입을 열었다.

“그런 거 아냐. 네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됐다는 사실이 많이 놀랍긴 하지만 그런 이유라면 정말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네 말대로 사랑은 한쪽만 가지고 있어서는 성립할 수 없으니까.”

꽤나 진지하고 그럴듯한 이유였지만 레이프는 여전히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신의 지시라면 무엇이든 따르는 천사가 사적인 마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인제 와서 마음을 달리 먹을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레이프는 미소를 지었다.

에이브의 의중이 무엇인지 확실해질 때까지는 노골적으로 의심하는 것보다 그러려니 넘어가는 척을 하는 것이 살피기 더 수월할 것이었다.

“그렇게 받아들여 줬다니 다행이네.”

‘믿은 모양이군.’

레이프의 의중을 모르는 에이브는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고는 안도했다.

안 그래도 대하기 껄끄러운 상대였는데 의심 없이 넘어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전할 말들은 어느 정도 전했으니 에이브는 돌아가려 했다. 지금쯤이면 아티야가 깨어났을지도 몰랐다.

“세이딘에게 가는 거지?”

뒤에서 들려오는 물음에 에이브는 속으로 뜨끔했다. 아티야를 생각하느라 세이딘과 마무리 짓지 못한 대화들이 있다는 것을 잠시 잊었다.

어차피 가는 방향은 같았기에 에이브는 긍정했다.

“제약이 풀렸다고 알려 줘야지. 그리고 궁금한 것들도 많을 테고.”

“…그래.”

“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전해 줬으면 하는 거라든가.”

의외로 에이브는 이런 데선 제법 눈치가 빨랐다.

레이프는 속으로 감탄함과 동시에 생각에 잠겼다.

전하고 싶은 건 많았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선을 생각하니 생각보다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결국 한참을 생각한 그는 자신의 머리에 꽂은 머리핀을 뺐다.

붉은 꽃을 연상시키는 그것은 긴 앞머리가 거추장스러워 보인다며 언젠가 세이딘이 줬던 것이었다.

레이프는 머리핀에 조용히 마법을 새겼다. 지금 가지고 있는 마나로는 그가 원하는 효과가 나타나기엔 턱없이 부족했지만 어느 정도는 세이딘에게 도움이 될 것이었다.

“이걸 전해 줘.”

머리핀을 건네받은 에이브는 이리저리 살폈다.

레이프는 속으로 웃었다. 몇 겹으로 결계를 쳐서 감춘 마법이었다. 고작 천사가 알아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결국 어떤 것도 알아낼 수 없었던 에이브는 별다른 의심 없이 머리핀을 품 안에 잘 갈무리했다.

“아참, 세이딘 그웨니르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 원치 않아도 며칠 내로 돌아올 수밖에 없거든.”

에이브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채, 그대로 자취를 감췄다.

레이프는 그가 사라진 자리를 한참을 바라보았다.

무슨 의도로 한 말인진 알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조만간 다시 세이딘을 볼 수 있을 거라는 사실에 조금씩 가슴이 뛰었다.

“세이딘….”

다른 건 바라지 않았다.

다시 만날 때는 부디 세이딘이 조금이라도 누그러졌기를.

*  *  *

“와, 실화냐.”

나는 고급스러운 무늬로 가득한 천장을 본 채로 중얼거렸다.

피로가 잔뜩 쌓여 정신없을 때는 일단 잠 좀 자고 보자 싶었는데 막상 깨서 드는 마음은 그저 억울했다.

“큰맘 먹고 아이템을 쓰면 뭐 해? 신나게 처자서 남는 시간이 없는데.”

물론 어제는 여관 밖 거리를 돌아다니고 아티야도 찾고 레이프도 보고 에이브에게 이것저것 이야기를 들었지만, 거리를 돌아다닌 것 외에는 전부 도주와 거리가 먼 일들이었으니 세지 않았다.

그러니 그걸 빼고 내가 한 일은 오로지 잠, 잠, 잠을 잔 것뿐이었다.

“하, 어이가 없어서. 일주일 내내 야근만 한 사람도 아니고 이게 뭐야!”

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왔다.

앞으로 엑스트라의 휴일의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해야 했지만,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무서워서 좀처럼 시스템창을 켤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아니야, 이제부터라도 잘 보내면 돼.”

현실도피를 하며 허허허 웃어대던 나는 뒤늦게 깨진 멘탈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잘 들어, 세이딘. 중요한 건 남은 시간이 아니라 쉬는 동안 얼마나 잘 알차게 보냈는가야.”

마음 한편에서 이건 아닌데 싶은 마음이 빼꼼 고개를 쳐들었지만 나는 모른 척했다.

내가 어떤 민족이었냐!

노는 것마저도 노동자처럼 노는 민족이 아닌가!

잊고 있던 한국인의 얼이 끓어오르려고 할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 너머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세이딘, 일어났어요?”

새처럼 고운 목소리에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인 목소리가 저렇게 예뻤던가?

의문과 함께 돌기 시작한 머리는 곧 누군가를 떠올렸다.

어젯밤 나와 신나게 먹부림을 하던 금발의 미녀였다.

“아티야?”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대답이 돌아왔다.

“네, 저예요!”

“잠시만 기다려요. 곧 열게요!”

번쩍 정신이 든 나는 서둘러 침대에서 튀어나왔다.

이제 막 일어나서 좋은 행색은 아니었던지라, 대충 옷매무새와 머리를 정돈하고 부랴부랴 문으로 달려갔다.

“미안해요, 오래 기다렸죠?”

“앗, 미안해요! 혹시 제가 깨운 건가요?”

나를 본 아티야는 토끼처럼 놀라서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당황할 만도 했다. 급하게 최선을 다했다고 해도 내 몰골은 여전히 이제 막 일어난 사람이었으니까.

“아니에요, 일어나 있었어요. 그냥 침대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을 뿐이지….”

괜히 말하다 보니 머쓱해지네.

하지만 아티야는 너무도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사람이 피곤하면 그럴 수도 있죠! 저도 가끔은 일어나기 싫어서 이불을 돌돌 말고 있어요. 그러면 얼마나 포근한지 저도 모르게 또 잠들어 버린다니까요?”

나는 지금 별로 궁금하지 않았던 여주인공의 정보를 알고 말았습니다.

그와 별개로 좀처럼 상상이 가지 않았다. 이렇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정하게 차려입은 미인이 집순이처럼 이불을 돌돌 말고 다니는 모습은.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조금 지저분하지만 괜찮다면 들어와요.”

나는 생각을 떨쳐 버리며 아티야를 방으로 들였다.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각종 기념품의 흔적들을 본 아티야가 말했다.

“재미있게 노셨나 봐요!”

“아하하, 아무래도 처음 와 본 곳이다 보니….”

어제 처음 본 여주인공 앞에서 아주 민망함이 치솟는구나!

나는 아티야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빛의 속도로 움직여 물건들을 최대한 정리했다.

그래 봐야 한곳에 모아 두는 정도의 일이었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봐줄 만했다.

“그렇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는데….”

내가 권한 소파에 앉은 아티야가 미안해하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하지만 어떻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을까? 이렇게 예쁜 사람을 쓰레기장 속에 방치하는 건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한없이 진지하게 대꾸했다.

“신경이라뇨! 제가 아티야를 지저분한 곳에 있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럴 뿐인걸요.”

“세이딘…!”

아티야의 얼굴에 감동이 넘실거렸다.

쑥스러움에 괜히 가슴께가 간질거렸지만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이렇게 보면 아티야는 참 재미있는 사람이란 말이야?’

여기저기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으면 이런 반응을 당연하게 여길 수도 있을 텐데 그녀에게서는 조금도 그런 기색을 볼 수 없었다.

오히려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면 했지.

‘그게 또 마음에 들지만.’

만약에 동생이 있다면 이런 기분일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에요?”

상념들을 한구석에 몰아넣은 나는 물음을 던졌다.

아마 아티야의 성격상, 어제 일에 대해 사과하려 할 것이었다.

애초에 사과는 에이브가 해야 하는 거지만, 책임감이 강한 그녀는 그의 잘못 또한 자신의 일처럼 생각할 테니까.

그리고 내 예감은 정확했다.

“어제 제 일행의 일로 사과드리려고 왔어요. 죄송해요, 세이딘. 에이브가 무례하게 굴어서. 단순하고 솔직해서 그렇지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음, 악의라곤 눈곱만큼도 없고 말투도 조곤조곤하고 부드러운데 왜 욕처럼 느껴지는 걸까.

‘아니, 틀린 말은 아니니까 욕은 아닌가?’

의문을 뒤로하고 나는 아티야에게 고개를 저었다.

“아티야가 사과할 일이 아니에요. 잘못은 에이브가 했는걸요.”

“에이브…?”

“아, 실은 아티야가 잠든 후에 어쩌다 조금 대화를 나눴었거든요. 그때 사과했어요.”

그것과 별개로 사과를 받을지 말지는 내 마음이지만.

“잠이… 들었다고요?”

“네, 술 취했었거든요.”

내 말을 들은 아티야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런 민폐를 끼치다니 죄송해요, 세이딘! 혹시 제가 취해서 세이딘을 곤란하게 만든 건 아니죠?”

“에이, 그런 적 없어요.”

물론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재워 버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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