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44)화 (44/122)

제44화. 7장. 운명과 페널티 (5)

레이프가 세이딘을 만난 것은 반복되는 시간들에 대해 모든 것을 내려놨을 때였다.

‘못 보던 여자네.’

처음 그녀를 본 순간, 그는 당황했다. 잘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지금껏 자신을 깨운 여자와 달랐다.

세이딘이 눈을 뜨고 대화를 나누면서 레이프는 처음으로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꼈다.

매번 앵무새처럼 반복되는 내용이 아니었다.

무언가 아는 것 같으면서도 모른 척 허둥대는 모습이 신선했다.

무엇보다 레이프의 관심을 끈 것은 잔뜩 경계하고 겁먹은 게 눈에 보이는데도 아니다 싶으면 반사적으로 할 말을 하는 태도였다.

본인은 모르는 모양이었지만 그녀는 조용히 사는 것과 굉장히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데스티니의 유무와 관계없이 세이딘은 이 세계에서 볼 수 없는 사고를 가지고 있어서, 한 번이라도 그녀와 대화를 해 본 사람이라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레이프가 그러했듯이.

언제부터였을까.

처음에는 그저 신선함과 흥미 때문에 세이딘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마음은 점점 옅어지고 하나둘 다른 마음이 생겼다.

올곧은 연둣빛 눈동자가 오롯이 자신만을 바라보길 바랐다.

웃을 때도, 화낼 때도.

아직 우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그조차도 자신이 독차지하기를 바랐다.

그래서였다.

몇 번이고 충동에 이끌려 세이딘에게 다가간 것은.

처음에는 레이프도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그는 세월이 지나도 회자될 만큼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모두가 우러러보는 대마법사이자 음악가였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업적을 이뤘다.

이러한 배경 탓에 레이프의 주변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처음에는 관심이 없던 사람조차도 단 한 번의 미소만으로 단번에 호감을 갖게 되곤 했다.

그러니 세이딘도 관심 없는 척하지만 사실은 그에게 관심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갑자기 그녀가 사라지게 되면서 레이프는 깨달았다.

세이딘은 자신의 감정에 대해 단 한 순간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데스티니로 얽혀 세이딘에게 호감을 드러내는 사람들 중, 우습게도 그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레이프뿐이었다.

‘하지만 착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그게 진심으로 우러난 마음이 아니라는 걸 말이야.’

린든에게 그렇게 말했지만 실은 레이프도 알고 있었다.

이티엘도, 린든도, 단테도, 계기는 데스티니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세이딘 자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단지 그렇게 말하지 않은 것은….

“하, 우습군!”

스스로를 향해 던진 말과 함께 레이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퍼졌다.

외면하려 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경계였다.

봉인을 풀기 위해 세이딘이 누군가와 사랑하길 권하고 그런 상황들로 유도했지만, 그녀의 곁에 모이는 남자들을 볼 때마다 레이프는 심사가 뒤틀렸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하나같이 완벽했지만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을 봐 온 레이프는 단번에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았다.

가장 쉽게 눈에 보이는 건 이티엘이었다.

성군은 바꿔 말하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왕이라는 뜻이었다.

때문에 세이딘에 대한 마음을 깨달은 뒤로 그는 거침없는 구애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 강요했다.

반면에 린든은 빈틈이 없는 사람이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좋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레이프가 본 그는 모든 일에 있어 계산적이었다.

처음에도 그는 마법의 영향을 받고 있음에도 철저하게 자신에게 이득이 될 것들을 계산하며 세이딘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단테 에레즈라….”

레이프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단테 에레즈.

레이프가 봉인된 이후로 처음 나온 대마법사는 감정 결여가 극심했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그러했지만, 단테는 그중에서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심한 케이스였다.

역대 최고의 대마법사인 레이프에게 굉장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세이딘에게 보내는 관심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나도 참 바보지. 이런 놈들과 사랑을 하라고 하다니.”

레이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한때는 연애를 권장했던 남자들이었지만, 지금은 그들이 세이딘에게 관심을 갖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반대로 세이딘이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아니더라도 그녀가 다른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을 상상해도 그렇게 끔찍할 수가 없었다.

레이프는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그래도 여전히 가슴은 답답했다.

“놀라운 일이야. 천하의 레이프 유클리드가 이런 표정도 짓고.”

누군가의 목소리에 레이프는 멍하니 움직이던 그네를 멈췄다.

첨예하게 빛나는 호박색 눈동자가 정원의 가장 구석진 곳을 노려보았다.

부스럭거리는 풀잎 소리와 함께 나타난 것은 에이브였다.

달빛을 머금은 분홍색 머리카락이 하얗게 반짝였다.

밤 속에서도 찬란한 황금빛 눈동자가 호를 그렸다.

“이러니 신께서 기대를 거실 만도 해.”

가뜩이나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받은 것도 불쾌한데 불쾌한 서두를 꺼내니, 레이프로서는 결코 곱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입가를 끌어 올린 레이프가 말했다.

“천사가 여긴 무슨 일이지? 놈에게 도망간 거 아니었나?”

“무엄한…! 감히 신을 향해 그런 지칭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보다시피 지금껏 무탈하게 지냈으니 앞으로도 그럴 거라 보는데.”

“이익…!”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한 에이브는 분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천사들은 신의 사자인 만큼 일정 수위의 행동 외에는 취하지 못했다.

레이프는 얼굴 가득 귀찮은 기색을 드러냈다. 별것도 아니면서 도발을 하려 드는 것이 우습기만 할 뿐이었다.

“이런 시답잖은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닐 테고. 용건이 있으면 본론만 간단히 하도록 해.”

“세이딘 그웨니르를 사랑해?”

뜬금없는 질문에 레이프는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들을 가치도 없었군.”

“다 듣고도 과연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에이브의 의미심장한 미소 앞에서도 레이프는 그저 평온하기만 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대충은 짐작이 갔다.

“세이딘과 사랑할 수 있도록 돕겠다, 뭐 이런 말을 하려는 거잖아?”

“어, 어떻게…!”

깜짝 놀라는 에이브를 보며 레이프는 혀를 찼다.

천사를 만난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적어도 그가 봐 온 천사들은 저 정도로 생각하는 게 티가 나지 않았다.

“어찌 됐건 그런 거라면 거절한다.”

“뭐라고? 어째서?!”

이번에도 에이브는 놀라기 바빴다.

사랑한다면 이보다 더 매혹적인 제안은 없을 터였다.

그 모습을 보는 레이프는 미간을 찌푸렸다. 황당한 물음이 아닐 수 없었다.

“세이딘은 관계없는 사람이잖아.”

단순한 이유였다.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이 그대로였지만 세이딘만 달랐다.

그러니 그녀는 원래 있을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한편 에이브는 당황스러웠다. 원하는 것은 어떻게든 이뤄 내는 레이프였다.

그런 그가 자신이 바라는 것보다 세이딘을 우선하는 모습이 믿기지가 않았다.

“잘 생각해 봐! 세이딘 그웨니르와 네가 사랑하면 네 봉인은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풀릴 거야. 그렇게 되면 이 세계의 시간도 원래대로 흐르게 될 거고.”

“그래서?”

필사적인 설득에도 불구하고 레이프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에이브는 떨리는 시선으로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갈 텐데도 그런 선택을 하겠다는 거야?”

“원래대로?”

순진하기 그지없는 단어에 레이프는 비웃음을 머금었다.

자신만만하게 패를 꺼낸 것까지는 좋았지만 에이브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세이딘이 날 좋아할 거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지?”

여러 남자들의 끊임없는 구애를 받는 상황에서도 세이딘의 바람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었다.

얇고 길게 인생을 즐기고 싶다고 꾸준하게 말해 온 그녀가 인제 와서 마음을 뒤집을 리 없었다.

아니, 설령 마음이 바뀌더라도 레이프를 돌아보지는 않을 것이었다.

한결같이 거절해 온 그녀였으니까.

에이브는 당황한 나머지 황당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지 거기까지 내가 무슨 수로 신경을 써?”

“알아서 하라고? 진실된 사랑을 하라면서 정작 그 상황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너희들이 할 말인가?”

레이프는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애초에 이 세계는 레이프가 진실된 사랑을 하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이 세계에서 세이딘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결국 그녀 또한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는 반복 속에서 살아가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이 세계는 회귀를 반복하지만 이를 아는 사람은 미미했다.

설령 알아도 더는 벗어나려는 그런 노력조차 하지 않게 되어 버렸다.

그 안에서 세이딘은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나고자 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정작 그녀는 이 상황이 답답하고 자유가 없다 여겼지만, 레이프가 보기에는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행동 자체가 자유로워 보였다.

때문에 레이프는 더욱이 생각했다.

“내가 세이딘에게 관심을 두는 건 그녀가 자신의 의지대로 자유로이 움직이기 때문이야. 고작 내 감정을 채우기 위해서 세이딘을 억압할 생각은 없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한편, 레이프의 이야기를 들은 에이브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세이딘을 좋아한다는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사랑하냐고 묻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그녀를 마음에 품고 생각하는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500년 전 사람들이 지금의 레이프를 봤다면 하나같이 놀랄 것이었다.

당시의 레이프 유클리드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이대로 가면 안 돼.’

에이브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아티야를 위해서라도 레이프는 세이딘을 꼭 붙잡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수없이 반복된 세계의 모든 것들을 기억한 채 무너져 갈 테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