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화. 7장. 운명과 페널티 (4)
“널 이렇게 두고 돌아가라고?”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새삼스럽게 왜 그래? 지금까지 내가 쓰러진 동안 옆에 있으면서 도와준 적 있어?”
“…없지.”
“그러니까 가 봐. 같이 있어 봐야 스트레스만 받아.”
귀찮은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며 손을 휘휘 젓자, 레이프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묘하게 비에 젖은 강아지를 연상시키는 모습이 신경에 거슬렸다.
인제 와서 불쌍한 표정 지어 봤자 안 먹히거든?
한마디를 하려고 입을 달싹였을 때였다.
“그럼 이제 안 돌아올 셈이야?”
레이프의 물음에 나는 멈칫했다.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었다. 시스템이고 데스티니고 다 던져두고 공략캐들과 무관한 생활을 즐기고 싶었다.
하지만 방금 전 에이브의 말에 따르면 이 이야기를 마무리 짓지 않는 이상, 신에게 지금 당장 원래대로 돌려달라고 부탁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는 뜻은 공략캐 중 누구 하나와는 무조건 엔딩을 봐야 한다는 의미였다.
참으로 최악의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날 선 투로 대답했다.
“방금 들었으면서 뭘 물어? 돌아오고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그럼에도 레이프는 놀라는 기색 없이 차분하게 원하는 바를 말했다.
“그렇지만 넌 해냈잖아.”
그건 아이템빨입니다. 심지어 기간 한정이고.
어느 정도 상황을 안다고 해서 이것까지 말할 수 없는 노릇이었기에 나는 손을 설레설레 저었다.
“그건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고. 일단 돌아가.”
레이프는 입을 다무는가 싶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세이딘, 손 좀 줄래?”
어쩐지 속이 답답했다.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물어보는 건지.
“옜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레이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레이프는 옅은 미소를 띠고는 내 손을 잡았다.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여러 가지 감정들이 뒤섞여 착잡해지는 가운데, 레이프가 말했다.
“기다릴게.”
짧았지만 많은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그만큼이나 많은 감정들을 담은 시선이 나를 향했다.
혹시라도 무슨 말을 더 하지 않을까 기다렸지만 그게 전부였다.
내 손을 한번 꼭 쥔 레이프는 그대로 자취를 감췄다. 돌아간 듯싶었다.
방 안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비로소 혼자가 된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해방감과 동시에 이상하리만치 심장이 덜컹거렸다.
“…뭐야, 진짜. 왜 자꾸 안 하던 짓을 하고 난린데.”
참 이상했다.
배신감도 여전하고 화나는 것도 여전한데, 왜 이렇게 얼굴이 화끈거리는지.
뒤늦게 심호흡을 가다듬으며 쿵쿵거리는 가슴을 애써 외면했다.
거기에 쏟을 신경이 있으면 다른 데 쏟아야 했다.
“이제 앞으로 어쩌지?”
나는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자세한 건 에이브가 돌아와 봐야 알겠지만, 지금으로선 공략캐 중 하나와 연애를 하는 것이 내가 자유를 되찾을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결국 헛수고였단 거잖아….”
아티야를 만나면 전부 해결될 일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과거를 떠올리니 절로 한숨만 푹푹 새어 나왔다.
실망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마음이 무너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피로가 쌓인 탓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나는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 * *
“레이프 님!”
단테의 외침과 함께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에 쏠렸다.
세이딘이 즐겨 앉는 소파 근처에 이제 막 돌아온 레이프가 서 있었다.
“그웨니르 영애는? 어디에 있지?”
단테를 제치고 나타난 것은 이티엘이었다. 다급하게 레이프의 어깨를 잡은 그는 세상을 잃은 표정이었다.
레이프는 이티엘을 찬찬히 올려다보았다. 제르아일의 황제인 그는 갑자기 세이딘이 눈앞에서 사라진 뒤로 황궁에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집착하는 사람은 별로야.’
언젠가 세이딘이 했던 말을 떠올린 레이프는 어깨에 있는 손을 가볍게 털어 냈다.
“어딘지는 알려 줄 수 없지만 세이딘은 잘 있어.”
“알려 줄 수 없다니 그게 무슨…!”
“세이딘이 원치 않아.”
짧은 한마디에 다시 한번 레이프를 잡으려 했던 이티엘이 멈칫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과 함께 허공에 있던 팔이 스르륵 떨어졌다.
“정말 그웨니르 영애와 만나신 겁니까?”
예리한 물음에 레이프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모두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린든은 차분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착각인가? 마치 내가 세이딘을 어딘가에 숨긴 것처럼 말하는 걸로 들리는데.”
“이해가 빠르셔서 다행이군요. 정확히 제가 의도한 대로 들으셨습니다.”
노골적인 비아냥거림에 레이프는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처음 볼 때부터 느꼈지만 참 꺼림칙한 남자였다.
“여기서 세이딘이 사라진 걸 못 본 사람이 있나? 그걸 보고도 어떻게 내가 그녀를 숨겼다는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당신이 위대한 대마법사 레이프 유클리드라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웃음기 어렸던 레이프의 표정이 메마른 가을처럼 건조해졌다.
아무래도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단테가 말을 옮긴 모양이었다.
레이프는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 턱을 살짝 들었다. 오만으로 가득한 모습이었다.
“주장을 하면 그에 상응하는 이유 정돈 있어야겠지, 안 그래?”
“그웨니르 영애는 당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위험이 닥친 상황에서 당신을 부른다는 게 말이 됩니까?”
“흐음, 정말 고작 그 정도 이유로 나를 의심하는 거야?”
호박빛을 띠는 레이프의 눈동자가 얼핏 황금빛처럼 찬란해졌다.
어지간한 사람들이라면 견디지 못할 정도의 압박이었지만, 상인으로서 숱한 경험과 황제를 친구로 둔 탓에 린든은 눈 한 번 깜박하지 않았다.
레이프는 피식 웃었다.
“이야, 정말 세상 좋아졌어. 별 볼 일 없던 브누아가 이 정도까지 말할 수 있는 수준이 되다니 말이야.”
“제 가문을 모욕하지 마십시오.”
“욕? 욕이라니, 난 사실을 말할 뿐이야. 내 시절의 브누아는 당대 가주가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해서 무너져 가고 있었으니까. 그 후에 아마…, 보다 못한 동생이 가주를 죽이고 당주에 올랐다지, 아마?”
무거운 내용과 달리, 레이프의 어조는 무척이나 가벼웠다.
린든의 얼굴이 굳었다. 연한 청록빛 눈동자가 일렁거렸지만, 그럼에도 그는 함부로 나서지는 않았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 때문이었다.
레이프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그를 바라보다 미소 지었다.
“그래, 이 정도는 너도 알고 있겠지. 섣부르게 반응하지 않았던 걸 감사히 생각해. 그렇지 않았으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게 말한 레이프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린든의 등을 겨눴던 날카로운 얼음 조각들이 전부 사라졌다.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레이프가 입을 열었다.
“내가 세이딘을 어디론가 데려갔다고 의심하는 건 나쁘지 않아. 그녀가 걱정 돼서 한 말일 테니 말이야. 하지만 착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호박색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게 진심으로 우러난 마음이 아니라는 걸 말이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레이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뒤에서 단테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 정도 높이에서 뛴들 다치지도 않을뿐더러 무엇보다도 우중충한 저들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레이프는 곧장 저택을 지나면 나오는 작은 길을 따라 걸었다.
그 길의 끝에는 그웨니르 백작이 세이딘의 10살 생일을 기념해서 만든 정원이 있었다.
정원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지만 동화 같으면서도 아기자기한 것이 그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었다.
레이프는 세이딘을 따라 종종 이곳에 왔었다.
그녀는 이티엘과 린든, 그리고 단테를 만날 때면 이곳에 와서 괜히 나무에 머리를 박고 있거나 온갖 넋두리를 쏟아 냈다.
“없으니까 이상하네.”
정원을 둘러보던 레이프가 중얼거렸다.
모든 건 다 전과 같은 모습으로 그대로였다. 세이딘이 없는 것을 제외하고는.
레이프는 정원 중앙에 있는 플라타너스에 매달린 그네에 앉았다.
“참 이상한 일이야.”
레이프는 세이딘을 떠올렸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쓰러진 그녀를 봤을 때,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과 동시에 세계가 무너지는 절망을 처음으로 느꼈다.
빈손으로 드래곤을 토벌할 때도, 인생을 건 실험에 실패했을 때도, 그리고 금기를 범해 신의 앞에 섰을 때도 그런 절망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 순간 레이프는 깨달았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
그 생각을 했을 때는 이미 몸이 멋대로 움직여 세이딘을 안고 있었다.
에이브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레이프는 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이 세계가 반복된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를 조이는 봉인들이 느슨해지는가 싶더니 일련의 상황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났으니까.
그럼에도 레이프는 그 안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아니, 벗어날 수 없었다.
어떤 여자를 만나 바이올린에서 봉인이 풀리는 순간까지는 떠올랐지만, 그 이후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조금도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면 언제나 처음처럼 데스티니에 봉인된 채였다.
자유를 누림과 동시에 갇히는 순간들이 반복되면서 레이프는 마음이 깎여 나갔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이 모든 것들이 당연해져서 더 이상 벗어나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됐다.
그랬기에 필사적으로 이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세이딘의 행동은 충격이 컸다.
“넌 어떻게 그렇게 용감할 수 있지?”
다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겁 많고 눈치도 많이 보는 세이딘은 희대의 대마법사인 그조차 포기한 것들을 전부 손에 그러쥐고 발버둥 쳤다.
그것이 당연한 거라고 외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