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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42)화 (42/122)

제42화. 7장. 운명과 페널티 (3)

“하, 거 참….”

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이 이상 에이브의 말을 들으면 나는 아마 높은 확률로 기절하겠지.

온몸을 전류처럼 휘감던 통증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바르르 떨렸다.

“괜찮아? 세이….”

“데스티니, 너 지금 회복된 마력이 얼마나 돼?”

말이 잘렸음에도 레이프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즉각 답했다.

“5할 정도야.”

“그 정도면 기절한 사람 깨울 수 있어?”

“몇 번은 가능할 거 같은데…. 설마 세이딘, 너…!”

당황한 레이프의 반응에도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아픈 건 싫었지만 적어도 왜 내가 지뢰를 밟을 확률보다 어려운 일을 겪게 된 건지 정도는 알아야 했다.

그리고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이게 데스티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과 이어져 있다고.

[경고!]

나는 눈앞에 뜬 경고창을 스쳐 에이브를 바라보았다.

그 또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하는 듯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었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나는 입가를 씨익 올렸다.

“자, 그럼 어디 한번 이야기 좀 들어 볼까?”

“정말 괜찮겠어? 위험할 수도 있어.”

“신경 쓰지 말고 넌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건지나 말해.”

날 선 내 말에 에이브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래야 했고.

에이브는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과정들을 들으면서 당연히 나는 몇 번이고 기절하고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레이프의 마법 덕에 깨어나는 시간이 단축된 데다가 저릿저릿한 통증도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오죽하면 너무 충격적이어서 페널티에 의한 충격이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미안하다.”

에이브는 이제 고개를 푹 숙인 채 나를 바라보지도 못했다.

그 모습이 가증스러워 멱살을 잡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눈앞에 뜬 경고가 부산스럽게 깜박이는 걸 봐선 곧 또 기절할 예정이기에 그만두었다.

그 대신에 나는 가슴에서 맴도는 온갖 된소리들을 뒤로하고 이 상황에 대한 감상을 뱉어 냈다.

“세상이 다 적이네, 적.”

“…면목 없다.”

면목 같은 소리 하고 있다.

속에서 불이 화르륵 끓어올랐다.

“당신 천사라며. 천사가 그렇게 편파적이어도 돼?”

그래, 이게 가장 큰 문제다.

저놈은 천사다. 그리고 저놈이 날 추천한 상대는 당연히 신이고.

사랑과 정의의 대명사나 다름없는 놈이 반복되는 아티야의 인생이 불쌍하다며 신을 붙들고 사정사정을 해서 얻어 낸 결과가 나다.

‘이래서 페널티라고 했구만.’

꼴에 게임 속이라고 배경에서 벗어난 이야기가 핵심이 될 경우, 시스템이 제한하는 모양이었다.

쓸데없는 디테일에 새삼 놀랐다.

한 번 더 기절하고 깬 나는 에이브에게 요구했다.

“당장 원래대로 돌려놔.”

아티야를 생각하면 안타까웠지만 그렇다 해서 그녀의 삶을 물려받아 이어 갈 생각은 없었다.

매섭게 노려보는 나를 쳐다보지 못하면서도 에이브는 할 말은 확실히 했다.

“미안, 그건 내 영역이 아니야.”

“그럼 가서 신에게 말해.”

“그것도 어려워…. 이 세계는 한번 설정이 되어 버리면 결말이 날 때까지 그 누구도 손을 댈 수 없어. 설령 그게 신이라 해도.”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나는 얼굴을 왈칵 구겼다.

단번에 험악해진 내 얼굴을 본 에이브는 우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대신 신께 부탁드리면 네게 걸린 제약 정도는 풀 수 있을 거야!”

“…그거 참 위안이 되네.”

“하하, 고마워.”

“칭찬 아냐.”

“…미안.”

쭈글거리는 에이브를 한번 흘겨본 나는 레이프를 보았다.

지금까지 하는 이야기들을 다 들었으니 혼란스러울 거라는 예상과 달리, 그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레이프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 그래, 세이딘? 혹시 또 기절할 것 같아?”

“그게 아니라… 아무렇지도 않아?”

“뭐가?”

“그, 지금 들은 일 말이야.”

굉장히 기분이 묘해졌다.

내가 저놈한테 왜 이런 것까지 설명해야 하지?

‘지긋지긋한 놈이지만 여기저기 휘둘리는 건 굉장히 불쾌한 기분이니까 말해 준 것뿐이야.’

변명인지 납득할 만한 말인지 모를 생각을 스스로에게 들려주며 다시 눈을 든 순간, 나는 밀려드는 후회를 막을 수 없었다.

감동으로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레이프 때문이었다.

“세이딘, 날 걱정해 준 거야?”

“아니, 그게….”

“고마워, 나의 세이딘. 넌 역시 천사야.”

어린 모습을 하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이렇게까지 순수한 반응을 보인 것이 처음이어서일까.

천진한 레이프의 태도에 잠시 멍하니 있던 나는 곧 정신을 차렸다.

“착각하지 마. 나처럼 여기저기 휘둘린 것 같아서 물어본 것뿐이니까. 그리고 아까부터 왜 평소에 하지도 않던 행동을 하고 그래?”

“무슨 행동?”

“애처럼 해맑게 구는 거 말이야!”

꿍꿍이 가득한 행동만 할 때는 언제고.

이 기세를 틈타, 나는 더욱 단호하게 말했다.

“태도가 변한다고 해서 내가 너에 대해 달리 생각할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내 말을 들은 레이프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티 없이 밝았던 모습을 거두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생각 안 해. 오히려 난 네가 지금처럼 변함없었으면 해. 그저 내가 달라진 것뿐이야.”

레이프는 살짝 눈을 찌푸린 나를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저 일에 대해서는 네가 걱정할 필요 없어.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일이니까.”

“알고…, 있었다고?”

놀라는 내게 레이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대단한 건 아냐. 너를 만나고 봉인이 조금씩 풀려 가면서 의문점들이 생겼거든. 그것들을 하나씩 파헤치다 보니 이 세계가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물론 이 정도로 심각할 줄은 몰랐지만.”

거기까지 말한 레이프는 에이브를 노려보았다. 서늘한 시선을 받은 천사는 온몸으로 움찔거렸다.

그러면서도 할 말은 확실히 하는 놈이었다.

“넌 날 그렇게 볼 자격 없어, 레이프 유클리드! 네가 아니었다면 이 세계가 이렇게 될 일은 없었을 거야!”

이건 또 무슨 말이야?

눈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이야기들을 들은 탓에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레이프의 매서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에이브는 입을 열었다.

“이 세계는 반복되고 있어. 아티야가 사랑을 이루는 시점이 끝나면 모든 것이 다 제자리로 돌아와.”

“응, 알고 있어.”

그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대화를 통해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다. 애초에 내게 있어 이 세계는 게임이었기 때문에 엔딩 후 새로운 게임을 시작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그다지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이 세계의 이야기가 점점 피부로 와닿는 상황이 되어 가고 있다는 거지.

“그래서 그게 왜 데스티니의 탓이 되는 건데?”

궁금한 건 이거였다.

에이브는 눈을 굴렸다. 지금까지는 어찌어찌 소신껏 말을 하고 있었지만, 레이프의 눈매가 흉흉해질수록 그러기 힘든 모양이었다.

결국 죽일 듯이 노려보는 시선을 이겨 낸 에이브는 사실을 말했다.

“레이프가 신의 금기를 어겨서 세계가 돌기 시작한 거니까.”

그 말과 동시에 나는 온몸이 찢어지는 통증과 함께 쓰러지고 말았다.

어떻게 파도 파도 페널티를 먹을 만한 내용밖에 나오지 않는 건데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겨우 몸을 추스르고 일어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에이브와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한 게 점심 때쯤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어느새 어두운 밤하늘에 별이 총총하게 빛나고 있었다.

침대에서 겨우 눈을 뜬 나는 중얼거렸다.

“…무슨 말 한번 들을 때마다 기절을 해야 하냐.”

“미안해, 세이딘 그웨니르. 지금 당장 신께 찾아가서 더 이상 기절하지 않도록 말씀드릴게.”

미안함이 하늘을 찌른 에이브는 말을 하자마자 곧장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좋겠다,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편해서.’

쓸데없는 생각과 함께 나는 고개를 돌렸다.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은 레이프가 나를 걱정 어린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세이딘, 이제 더 무리하지 않는 게 좋아. 마력이 동나 버렸거든.”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

사실 레이프가 왜 이 세계가 반복되는 이유인지 무척 궁금했다. 지금만 해도 묻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이렇게 마음이 굴뚝같아도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체력이 바닥난 이상, 이 이상 캐는 것은 위험했다.

게다가 레이프도 답해 주지 않을 거고.

“물어봐도 대답하지 않을 거지?”

“세이딘, 이 이상 쓰러지면 며칠 동안 못 일어날 수도 있어.”

“그럼 쓰러지지 않는 상황이면?”

“…….”

레이프는 입을 다물었다. 대답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뭐, 그래. 알았어.”

지금 당장 못 듣는다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닌 데다, 에이브에게도 들을 수 있는 일이기에 나는 더 묻지 않았다.

방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잊고 있던 피로가 몰려와 조금씩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조금 잘까?’

그런 생각도 잠시,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끈질긴 나머지 나는 한마디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지금껏 네가 한 말이 사실이구나 싶어서.”

“내가 한 말? 어떤 걸 말하는…, 아.”

아티야에 대해서구나.

얼마 전의 일이었지만 오늘 하루 겪은 일만 해도 상당했기 때문에 굉장히 오랜 시간이 흐른 것만 같았다.

나는 얼굴 가득 비웃음을 머금었다.

“인제 와서 사과네 뭐네 해 봐야 안 들을 거야. 그러니까 미안하면 돌아가 줬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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