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7장. 운명과 페널티 (1)
“아티야, 너무 많이 마셨어요. 그러다 금방 취해요. 숙취도 심해지고.”
“에이, 아니에요. 이제 막 한 잔 마셨을 뿐인걸요. 더 마실 수 있어요.”
…취했네, 취했어.
내가 본 것만 해도 열 잔이 넘어가는데 한 잔은 무슨.
경험상 술 취한 사람의 심기를 건드려 봐야 좋은 일은 없었기에 나는 최대한 아티야를 달랬다.
“아, 내 정신 좀 봐. 그랬죠, 참! 괜한 말을 했네요. 그럼 다른 것도 마셔 보는 건 어때요? 여기 꽤 종류가 많은데.”
“으음, 그럴까요? 이상하게 이게 좀 물리더라고요.”
그야 맥주에 꽂혀서 그것만 마셨으니까요.
나는 말을 아끼는 대신, 메뉴판을 가리켰다.
비록 이 세계에서는 아직 술을 마셔 본 적은 없지만, 아버지인 그웨니르 백작이 애주가였기 때문에 이론은 빠삭했다.
“이건 어떨까요? 보드카라는 술인데.”
“보드카? 처음 들어 봐요.”
아티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보드카는 도수가 높아서 흔하게 마시는 술이 아니었으니까.
이걸 추천하는 이유는 단 하나, 아티야가 주사를 보이기 전에 빨리 잠재우기 위해서였다.
아티야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내가 든 메뉴판을 한참 동안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글렀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아티야의 눈치를 살필 때였다.
“그럼 그거 마셔 볼래요!”
아티야는 한 치의 의심조차 없는 맑은 목소리로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다행이다. 양심이 좀 쿡쿡 찔리긴 했지만, 술 취한 사람을 오랫동안 상대하지 않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으니까.
보드카는 주문을 하기가 무섭게 곧바로 나왔다.
“어머나, 색이 예뻐요!”
“그렇죠?”
내가 보기엔 맥주나 보드카나 거기서 거기였지만.
방글방글 웃는 아티야는 곧장 술을 마셨다. 참으로 호쾌한 원샷이었다. 참고로 그렇게 마시는 거 아니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재우기 위해서였다.
“음? 세이딘, 이거 뭔가 목이 뜨거운 게 상당히 독특….”
방금 전까지도 또랑또랑했던 아티야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었다.
그녀는 눈꺼풀이 무거운지 겨우겨우 깜박이더니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그마저도 견딜 수 없어 테이블에 무너지듯 엎어졌다.
작게 오르락내리락하는 등이 잠이 들었음을 증명해 주었다.
“미안해요, 아티야.”
나는 들리지 않을 사과를 중얼거렸다. 아마 내일은 백 프로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겠지.
아티야가 쓰러지는 것과 함께 멀찍이서 우당탕,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허둥대는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분홍 머리의 남자였다.
“너, 너 뭐야! 대체 아티야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나는 일부러 못 들은 척했다.
그러자 남자는 내 얼굴과 가까운 거리에서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려쳤다.
“무슨 짓이냐고 묻잖아!”
“그러다가 아티야가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요?”
벌렁거리는 심장을 외면하며 태연한 척하자, 남자는 그제야 아티야를 살폈다. 깊이 잠이 든 것을 증명하듯 그녀는 조금도 미동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확인한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인지 설명해.”
“보고 있었으면 알잖아요. 아티야가 술 마시고 쓰러진 거.”
“메뉴를 골라 줬잖아.”
“말은 똑바로 해야죠. 추천해 준 거예요.”
“추천? 아티야를 잠들게 한 게 아니고?”
남자는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머금었다.
숨길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조금도 부정하지 않았다.
“맞아요, 일부러 잠들게 했어요. 술 취한 사람을 상대하는 건 피곤하거든요.”
“뭐…? 고작 그런 걸로…!”
고작 그런 거 좋아하네.
저런 말을 하는 거 보니 이놈은 술 취한 사람과 대화를 해 본 적이 없는 게 확실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실랑이를 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가볍게 넘겼다.
“그것 말고도 이유는 또 있어요.”
내 말에 남자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경계로 가득한 태도를 보일수록 나는 더욱 차분한 척을 할 뿐이었다.
“당신이랑 둘이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나는 입꼬리를 힘껏 올렸다.
아까보다 훨씬 빠르게 뛰는 심장은 이제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까부터 나를 보는 남자의 시선은 살기로 가득했으니까.
아니, 이해가 안 가네? 고작 삿대질하는 거 뭐라고 했다고 사람을 죽일 듯이 노려봐?
따지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나는 본래 목적을 상기시켰다.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죠?”
“아티야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한다는 말이 고작 그거인가?”
남자는 코웃음을 쳤다.
하찮다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글쎄, 과연 어떠려나.
“흐음, 곤란한데요. 아티야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요?”
아티야의 이름을 언급하자마자 오만했던 남자의 표정은 단숨에 무너져 내렸다.
역시 여주인공. 데스티니가 없어도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치명적인 매력을 가졌구나.
어쩔 줄 몰라 하던 남자는 생각을 하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가 물음을 던졌다.
“그걸 왜 알려고 하지?”
“저 자신이 걸린 일인데 궁금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예민하군. 착각해서 잘못 말한 것뿐인데 고작 그걸로 이런 일을 벌인다고?”
“착각이요?”
괜히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럴 리가요. 절 보자마자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란 다음에 ‘왜 이 여자가 여기에 있어?’라고 했잖아요.”
“그 정도는 얼마든지….”
“실수할 수 있다고요? 헛소리하지 마요.”
“사실이다. 실수였어.”
그렇게 나오시겠다?
고집스러운 사람이겠거니 생각은 했지만 상상 이상이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봐요, 거하게 취한 게 아닌 이상 처음 보는 사람을 ‘이 여자’라고 지칭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거라고 생각해요?”
“끈질긴 여자군. 정말 아니….”
“어쩔 수 없죠. 자꾸 그렇게 나온다면 아티야에게 물어보는 수밖에요.”
남자는 깜짝 놀란 듯 헛숨을 들이켰다.
이쯤 되니 상당히 안쓰러웠다. 어떻게든 숨기고 거짓말을 해 볼 생각이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남자는 지나치게 솔직했다.
그러니 이 의미 없는 대화의 줄다리기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었다.
왁자지껄한 식당의 분위기 속에서 남자와 내 테이블만큼은 짙은 정적이 흘렀다.
빤히 바라보는 나를 향해 남자가 결국 건들거리며 두 손을 들었다.
“하, 그래. 네 말이 맞다, 됐나?”
분명 항복한 쪽은 저쪽인데 왜 내 기분이 더 더러운 걸까?
나는 저놈의 멱살을 잡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어디서 봤었죠?”
“…대체 왜 그게 궁금한 건데?”
어지간히 할 말이 없는 모양이다. 아까부터 계속 같은 말을 하는 걸 보면.
더 숨길 것도 없으니 말을 해 보는 게 낫겠지.
“제가 며칠 전에 납치를 당했거든요.”
담담하게 꺼낸 말에 남자는 놀란 듯 어깨를 움찔거렸다.
나는 조금 웃음이 날 것 같지만 참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으니까.
“근데 절 납치한 사람이랑 당신이 굉장히 비슷한 느낌이어서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는 남자를 향해 똑바로 시선을 던졌다. 잘게 떨리던 황금빛 눈동자는 이제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불안정했다.
“어떻게 안 거지?”
한참 동안 침묵하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모르쇠를 할 땐 언제고, 순순히 인정하는 모습을 보니 뭔가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여전히 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대답했다.
“우선 체격이랑 말투가 비슷했어요. 목소리는 바꿀 수 있어도 말투는 고유한 거라서 바꾸기 어렵거든요. 체격도 마찬가지고요.”
그럴듯한 이유들을 대며 설명했지만 실은 거짓말이다.
체격과 말투를 가지고 사람을 구별할 만큼 나는 눈썰미가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남자가 납치범과 동일인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던 것은 단 하나, 시스템창이었다.
[경고! 당신의 행동에 따라 페널티를 받을 수 있습니다.]
눈앞을 어른거리는 주의 문구는 남자가 나타난 것과 동시에 보였고, 아까부터 귀가 아플 정도로 앵앵대는 경고음은 좀처럼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사실 확신이 있던 건 아니었다. 그래서 벌벌 떨었던 거고.
하지만 지금껏 시스템이 경고를 드러낸 것은 납치범을 만났을 때뿐이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허세를 부려 봤는데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이야.
스스로도 얼떨떨해하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남자의 얼굴에 감탄이 어렸다.
“놀랍네, 데스티니 외에 믿을 건 집안 재력뿐인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말하는 꼬라지 봐라.
“칭찬 고마워요.”
나는 웃으며 대꾸했다.
한 마디라도 쏘아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남자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애초에 내가 욜로를 하고 싶은 것도 실현 가능한 배경이기 때문이었고.
‘지금은 공략캐들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더 크지만.’
한편 남자는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린 채였다.
아무래도 도발하려는 의도였던 것 같은데 통하지 않으니 어지간히 분한 모양이었다.
“제가 지금 시간이 없거든요. 그러니 본론만 빨리 말하도록 할게요.”
경고음이 갈수록 빨라지는 것과 동시에 나는 말했다.
빨간 글씨로 깜박이는 경고창이 불안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상황을 알아야 했다.
“왜 날 납치했죠? 확인을 하고 싶었다는 둥,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그 이야기는 저번에도 충분히 들었으니 진짜 이유를 알고 싶거든요.”
속사포로 쏟아지는 말에 놀란 남자는 몇 번이고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무언가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한숨을 토해 냈다.
“알아서 좋을 게 없는 일이야. 그런데도 알고 싶어?”
“인제 와서 납치범이 걱정하는 척해 봐야 씨알도 안 먹혀요.”
그러니까 말해.
나는 강한 의지를 담아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잠든 아티야를 바라보다가 곧 입을 열었다.
“아티야가 데스티니와 만나는 걸 막고 싶었어. 그 길은 이 아이에게 가혹하니까.”
위장 결혼을 해야 자유로울 수 있는 아티야.
데스티니를 불러낼 수 있는지 확인하려 한 남자.
두 사람의 이야기와 행동들을 봤을 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것뿐이었다.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막상 들으니 그것과 별개로 몰려오는 충격은 상당했다.
“당신처럼 아티야도 미래를 알고 있어요?”
“아니, 아티야는 아무것도 모른다. 나 혼자 독단으로 벌인 일이야.”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사람이 한번 의심을 갖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법이었다.
“사실이야. 아티야가 알았다면 굳이 위장 결혼을 권하지 않았어.”
남자는 필사적으로 설명했지만 나는 믿지 않았다.
미래를 모르는 아티야가 이 남자와의 위장 결혼을 결심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내게서 시선을 피하는 것은 남자였다.
“그래, 믿든 안 믿든 그건 네 자유니 더는 말하지 않겠어. 하지만 납치는 내가 독단적으로 벌인 거야. 아티야는 아무 잘못 없어.”
“지금 그게 할 말이에요?”
“뭐?”
“납치는 내가 저지른 짓이다. 아티야는 아무 잘못 없다. 그것 외에도 할 말이 있을 텐데요?”
날카로운 내 눈빛에 남자는 당황한 듯 눈을 깜박였다.
무슨 말을 더 해야 하는 건지 고민하는 걸로 봐선 정말 모르는 모양이었다.
나는 짙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사과요. 어떤 이유가 있건 날 납치하는 건 정당한 게 아니었잖아요.”
솔직히 사과를 받아도 기분이 썩 좋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말을 하는 건 최소한 잘못을 인지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하지만 나는 간과하고 있었다.
이곳은 게임 속 세계였고, 내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상식들이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얼굴이 잘날수록 더욱이 답이 없다는 것을.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당신을 다치게 한 것도 아닌데.”
비록 공략캐는 아니었지만 남자는 정확히 그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이었다.
화는 나지 않았다. 단지 깨닫는 순간과 동시에 분별하지 못한 내가 안타까웠을 뿐.
‘하, 아티야도 불쌍하지. 어떻게 된 게 들러붙는 것들마다 하나같이 훌륭하게 생긴 또라이들이어선.’
나는 아티야를 향해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며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근데 아티야가 데스티니와 만나는 게 왜 가혹한 거예요?”
이건 순수하게 궁금했다.
게임 속의 아티야는 데스티니를 만나 좋아하는 음악을 더욱 다양하게 접할 수 있었던 데다가 공략캐들과 사랑을 하고 해피엔딩을 맞았다.
무엇이 불행한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겉으로 보기엔 그렇지.”
의문을 표하는 나를 보며 남자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는 세상의 온갖 일을 다 겪은 사람처럼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 사랑이 진실하다고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