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6장. 엑스트라의 휴일과 여주인공 (6)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게임 속에서 아티야는 더없이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예술품을 모으는 집안인 만큼, 그녀의 부모님은 어떤 악기든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아티야의 재능을 자랑스러워했고 원한다면 언제든지 여행을 하도록 허락했다.
견문을 넓히는 것은 예술을 보는 눈을 키운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 환경 속에서 자란 아티야가 데스티니에 대한 소문을 듣고 호기심에 제르아일에 오게 되는 것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애초에 내가 아티야를 좋아하고 응원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그녀의 자유로움이었다.
그런데 위장 결혼까지 해 가면서 아티야가 자유롭고자 했다는 상황은, 좀처럼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내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눈치챈 아티야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많이 놀랐죠?”
“뭐, 빈말로라도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네요.”
“하하하, 그건 그래요. 사랑의 도피도 아니면서 자유를 위해 위장 결혼까지 하는 게 일반적인 건 아니니까요.”
평민이 아닌 이상,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어떤 감정도 없이 결혼하는 건 이 세계에서는 굉장히 흔하게 자주 벌어지는 일이었다.
애초에 연애결혼 자체가 희귀한 곳에서 자신의 행동이 일반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는 건 아티야가 살아온 환경이 다른 집안과 달랐기 때문이었지만.
“아티야, 제가 놀란 건 그렇게 해야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거였지 아티야가 위장 결혼을 해서 놀란 게 아니에요. 목적을 위해서 결혼하는 건 귀족들이나 돈 많은 사람들 사이에선 흔한 일이고요.”
“그…런 건가요? 몰랐어요….”
안 그래도 그런 거 같아서 말해 준 거란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사람은 제각각이잖아요. 남들이 사는 대로 살 수도 없는 법이고. 너무 크게 신경 쓰지 말아요.”
아티야는 푸른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한참 말없이 쳐다보던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이딘의 말이 맞아요.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데 필요 이상으로 깊이 생각한 것 같아요.”
그리고 아티야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맥주를 호기롭게 들이켰다.
한두 번 마신 걸로 보이지 않는 자연스러움에 나는 반사적으로 움찔거리면서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여주인공이라도 술 좀 마실 수도 있지, 뭘….
뒤늦게 괜한 이야기를 물었나 싶은 생각과 함께, 아까 아티야도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괜한 걸 물은 건 아니죠?”
조심스러운 물음에 아티야는 펄쩍 뛰며 적극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사실 너무 답답하던 차였어요. 그렇다고 아무나 붙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이렇게 궁상을 떨고 있었던걸요.”
아, 그래서 한잔하고 계셨구나.
나는 곧바로 납득했다. 답답할 땐 술도 하나의 방법이지. 지금은 미성년이라 마음대로 마실 수 없지만.
대화를 하는 사이, 어느새 음식이 다 되었는지 종업원이 큰 카트를 끌고 우리 자리에 멈췄다.
테이블 위로 하나둘 늘어나는 음식을 보며 나는 조금씩 기분이 즐거워졌다. 역시 사람은 좋은 일을 하고 봐야 해.
“잘 먹을게요.”
“네, 마음껏 드세요!”
아티야의 허락과 함께 나는 호기롭게 닭 다리를 뜯었다.
“그런데 아티야는 안 먹어요?”
“네? 저요? 먹어도 되는 거예요?”
“당연하죠, 아티야가 사는 음식인데 저 혼자 먹을 수 없잖아요.”
“저는 많이 드신다고 하시기에 당연히 세이딘 혼자 드신다고 생각했어요.”
테이블에 늘어선 갖가지 음식들은 4인이 먹어도 충분한 양이었지만, 나 혼자서도 다 먹을 수 있었다.
맘껏 시키라고 해서 얼결에 먹던 양만큼 시키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혼자 먹는 건 좀… 많이 염치가 없지.
나는 쿡쿡 찔리는 마음을 접어 두고 방긋 웃으며 얼버무렸다.
“에이, 같이 먹어요. 모처럼 맛있는 음식인데 혼자 먹기 아까워요.”
“하지만….”
“그리고 그렇게 술 마시는 거 아니에요. 안주 없이 먹으면 내일 상당히 고생할걸요?”
아티야가 놀라며 물었다.
“세이딘도 술 마시나요?”
“지금은 못 마시지만요.”
모호한 내 대답에 아티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쩔 수 없었다. ‘원래 이 세계 사람이 아니었을 땐 성인이었습니다.’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결국 아티야는 내 권유를 거절하지 못하고 닭 다리 하나를 받아 들었다.
우물쭈물하던 그녀는 큰 결심이라도 하듯 비장한 얼굴로 닭을 먹었다. 그리고 곧바로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맛있어요!”
“그쵸? 어제 먹어 보니까 여기 음식 괜찮더라고요.”
온몸으로 맛있음을 표현하는 아티야를 보니 괜히 내가 다 뿌듯하네.
그녀는 다른 음식들도 하나씩 맛을 보더니 전부 맛있다며 부지런히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한동안 먹는 데 집중하느라 아무 대화도 오가지 않고 있을 때였다.
“아티야.”
낯선 사람의 부름에 맛있게 먹던 아티야가 고개를 들었다.
‘우와…!’
나는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는 감탄을 억지로 구겨 넣었다.
아티야를 부른 남자는 레이프를 비롯해 어느 공략캐와 견주어도 결코 꿀리지 않는 외모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온갖 머리 색이 난무하는 세계 속에서도 솜사탕 같은 분홍색 머리카락에 황금빛 눈동자는 흔치 않아서 멀리서 봐도 금방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강렬했다.
그 증거로, 여기저기서 이쪽을 향해 힐끗거리는 사람들이 상당수였다.
“왜 왔어?”
눈에 띄는 잘생긴 남자의 등장도 잠시, 서릿발 어린 목소리에 나는 귀를 의심했다.
아니나 다를까, 밝고 구김살 없던 아티야가 한없이 냉랭한 시선을 남자에게 던지고 있었다.
‘저 남자구나.’
아티야의 반응을 보니 단번에 알겠다.
자유로울 수 있도록 위장 결혼을 제안했다던 사람.
하지만 어쩐 일인지 남자는 그런 무모하고 리스크가 큰 계획을 세운 것치고는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를 노려보던 아티야는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돌렸다. 보고 싶지 않다는 명백한 의미였다.
“아티야, 다시 생각할 수 없겠어?”
안절부절못하면서도 남자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물음을 던졌다.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자, 그는 깊게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안 좋게 생각하는 거 잘 알아. 하지만 이번이 아니면 언제 다시 기회가 올지 몰라. 그러니….”
한참 아티야를 설득하던 남자가 말을 멈췄다.
그의 시선은 정확히 나를 향해 있었다.
황금빛 눈동자에 서서히 경악이 차올랐다.
“아티야, 어떻게 된 거야?”
“뭐가?”
“왜 이 여자가 여기에 있어?”
나를 아는 투로 말하는 남자에게 놀라면서 동시에 서슴없는 손가락질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무슨 물건도 아니고 기분 나쁘게 어디서 삿대질이야?
잘생긴 놈들에게 둘러싸여 산 지도 어언 몇 달이다.
사람은 적응의 생물인지라 새삼 잘생긴 놈을 본다고 해서 수줍어지거나 할 말을 못 하게 되거나 하지 않았다.
“그건 네가 신경 쓸 문제가….”
불쾌지수가 높아진 나는 본의 아니게 아티야의 말을 잘라 버렸다.
“이봐요, 손 치워요.”
“…뭐?”
“그 손 치우라고요. 저 알아요? 모르죠? 그런데 왜 아는 척하는 것도 모자라서 손가락질을 하고 있어요? 무례가 무슨 의미인진 알죠?”
쉴 틈 없이 쏘아대는 내 말에 남자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새빨개졌다.
하지만 그런 반응과 달리, 돌아오는 대답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것이었다.
“하, 정말…. 전에도 그러더니 말 한 번 지지 않는 건 여전하군.”
“우리 어디서 본 적이 있던가요?”
“뭐, 뭐?! 하, 우습군! 뭘 믿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남자는 펄쩍 뛰며 온몸으로 부정했다.
믿어 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유감스럽게도 마음에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말이야.
“아니라면 죄송해요. 그런데 처음 볼 때부터 절 굉장히 잘 아는 것처럼 말씀하셔서요.”
“그럴 리가! 난 오늘 당신을 처음 봐.”
웃기고 있네, 그럼 아까 아티야에게 ‘왜 이 여자가 여기에 있어?’라고 한 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내 기억 속에는 남자에 대한 파편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애초에 저렇게 튀는 머리 색을 잊기도 쉽지 않고.’
눈을 찌푸린 채로 시선을 들자, 남자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시선을 피했다.
꼭 죄를 짓고 놀란 사람 같아서 더욱이 의심스러웠다.
“저기, 세이딘!”
갑자기 부르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남자를 향해 서늘한 기운을 풍겼던 아티야는 나에게는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를 봤다.
“저 사람은 신경 쓰지 마세요. 이제 저도 모르는 사람이니까. 그러니 우리 먹던 거 마저 먹어요.”
“아티야…!”
“말 걸지 마.”
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명백한 온도 차에 나는 허허 웃었다.
그만큼 날 좋게 여겨 주는 건 고맙지만 조금 마음이 불편했다.
저 남자가 나에게 아는 척을 했다는 것은 곧 아티야도 나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물어볼 때가 아니었으니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요, 좋아요.”
아티야에게 동의한 나는 다시 포크를 움직여 음식을 덜었다. 그녀 또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먹던 음식을 마저 먹기 시작했다.
철저하게 무시를 당하는 남자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거 참, 부끄러운 것도 많은 사람이네.
그는 가만히 서서 우리를 뚫어지라 보다가 종업원에게 방해가 된다는 말을 듣고 테이블을 하나 잡아 앉았다.
자리가 없는 탓에 남자가 고를 수 있는 자리는 구석밖에 없었다.
나는 고소함을 감추고 아티야에게 물었다.
“아티야, 괜찮을까요? 아직도 이쪽을 쳐다보는 거 같은데.”
“신경 쓰지 마세요. 사람이 좋게 말해도 못 알아들으면 몸이 고생하는 거죠.”
와, 의외네. 게임 속에서는 솜사탕처럼 포근한 사람이라 모든 사람에게 다 그럴 줄 알았는데.
‘하긴 마냥 그런 건 아니니까 속상하다고 술을 먹고 있었겠지만.’
나는 납득하며 마지막 남은 빵 한 조각을 마저 먹었다.
남자의 등장 이후로 눈에 띄게 말수가 줄어든 아티야는 아까부터 술만 계속 비웠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쏟아붓는 것이 영 불안해서 나는 술을 찾는 아티야의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