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화. 6장. 엑스트라의 휴일과 여주인공 (5)
“하? 이 여자가 지금…. 으어어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불량배는 갑자기 흘러들어온 전류에 몸을 비틀다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쿵!
남자가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에 여기저기서 새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놀란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속에는 아티야도 있었다.
무언가 말을 하길 바라는 눈치인지라 나는 되는대로 지껄이자 싶어 입을 열었다.
“아, 개운해라.”
반은 거짓이었다.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안전하게 살고 싶어 하던 내게 있어 누군가를 쓰러트려 본 적은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벌벌 떨리는 손이 그 증거였다.
하지만 뭐, 그렇다고 해서 개운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저 새끼는 여자의 적이었으니까.
“아가씨, 제법인데?!”
“방금 어떻게 한 거야?”
“안 그래도 저놈 좀 어떻게 해야 하지 않나 하던 차였는데 말이야.”
“하하, 퍽이나 그랬겠군. 그 종잇장 같은 팔로 저놈을 어떻게 이겨?”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불량배를 쓰러뜨린 것에 대한 칭찬을 쏟아 놓으며 속이 시원했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어, 감…, 사합니다.”
얼결에 감사를 표현한 나는 얼굴을 긁적였다. 주목받는 건 딱 질색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잘한 일에 대한 칭찬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감사해요. 덕분에 살았어요.”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들려온 인사는 아티야였다.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모세의 기적처럼 몰려 있던 사람들이 길을 터 주었다.
마침내 아티야는 내 앞에 섰다. 멀리서 볼 때보다 실물이 훨씬 눈부신 사람이었다.
“저기…, 괜찮으세요?”
나는 한참을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아티야가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내 정신 좀 봐, 참.
“으으음, 별거 아니에요! 잠시 생각 좀 할 게 있어서 그런 거라서요.”
우왕좌왕하며 핑계를 댄 나를 향해 아티야가 수줍게 웃었다. 햇살처럼 맑은 것이 정화되는구나.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와 합석하지 않으시겠어요? 답례를 하고 싶어요.”
아티야의 말에 머릿속이 번뜩였다.
‘혹시 이거, 그린라이트?’
…는 농담이고. 잘됐다, 안 그래도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조금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대답을 기다리는 아티야의 얼굴에 긴장이 감돌았다. 혹시라도 거절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났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누구보다도 데스티니를 떼어 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내겐 아티야가 꼭 필요했다.
“으음, 좋아요.”
나는 괜히 한 번 더 생각해 본 것처럼 대답했다. 조마조마했던 아티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정말 햇살 같은 애구나.
새삼 <바이올린과 꽃미남들>을 열심히 플레이했던 이유가 떠올랐다.
병맛 같은 설정과 공략캐를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지만, 무엇보다 여주인공이 넘사벽으로 예쁜 데다 음악을 사랑함과 동시에 온갖 악기를 다 잘 다루는 능력자여서 보기만 해도 행복했다.
나와는 평생 연 없을 일들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 줬으니까.
‘이제 어쩌지?’
얼결에 합석을 하게 된 것까지 좋았다. 앞에서 기쁜 듯 웃고 있는 아티야가 굉장히 거짓말처럼 멀게 느껴졌지만 이것은 명백한 현실이었다.
무슨 말로 대화를 이어 가야 할지 몰라 한참을 머뭇거리던 중, 친절하게도 아티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도와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저는 아티야라고 해요. 그,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숙녀님의 성함을 여쭤도 될까요?”
순간 나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네, 제가 바로 스턴건으로 한 놈을 조져 버린 숙녀입니다.
웃긴 것과 별개로 숙녀라는 호칭이 상당히 오그라들기 때문에 얼른 정정해야겠다.
“저는 세이딘이에요.”
세상 맑게 방긋 웃던 아티야의 눈동자로 놀란 빛이 스쳤다.
“혹시…, 세이딘 그웨니르?”
“저를 아세요…?”
대체 어떻게?
머릿속에 퍼져 가는 물음표가 느낌표로 변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당연히 알죠! 봉인된 데스티….”
나는 서둘러 아티야의 입을 막았다.
아니 세상에, 얘는 그걸 어떻게 아는 거야?!
놀란 눈을 깜박이는 아티야를 향해 나는 나직하게 말했다.
“쉿, 거기까지! 더 말하면 여기 못 있어요.”
아티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았어.
손을 떼자, 아티야는 힘들었는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미안해요, 저한텐 좀 중요한 일이라서.”
“아니에요. 그런데 왜 말하면 여기에 못 있는 건가요?”
“그건….”
제가 다른 곳으로 튈 거니까요.
데스티니를 연주할 수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가 다른 놈들이 눈치채고 여기까지 오면 어떡해?
“알았어요, 묻지 않을게요.”
의외로 아티야는 순순히 물러났다. 의문스럽게 바라보자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생각해 보니 너무 생각 없이 질문을 던진 것 같아서요. 저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지만 세이딘에게는 대답하기 곤란한 사정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신경 쓰게 해서 죄송해요.”
와, 진짜.
마음이 뭉클해졌다.
레이프를 비롯한 공략캐놈들이 아티야의 반만이라도 닮으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린든은 그중에서 가장 예의가 바르고 개념 있었지만 갈수록 호감을 표현하는 데 거침이 없어졌으니 이제 그놈이 그놈이었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아티야.”
“별말씀을요.”
그렇게 말한 아티야는 내게 메뉴판을 건네주었다.
“감사의 의미로 제가 낼게요! 먹고 싶은 게 있다면 맘껏 골라 주세요!”
“으음, 괜찮아요. 제 건 제가 주문할게요. 제가 좀 많이 먹어서요.”
모처럼 자리를 함께한 여주인공에게 나쁜 첫인상을 심어 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티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별거 아닌 것에도 곧잘 웃는 그녀를 보니 새삼 참 밝은 사람이구나 싶었다.
“맘껏 드셔도 괜찮아요! 제가 이래 봬도 꽤 부자랍니다.”
그건 저도 알아요, 아는데….
나는 눈을 또르르 굴렸다. 천진하게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가 부담스러웠다.
한참을 바라보는 시선을 결국 이기지 못한 나는 두 손을 들었다.
“알았어요, 대신 많이 먹는다고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예요.”
“그럼요! 고마워요, 세이딘!”
나 참, 별게 다 고마운 사람이네.
더 사양하지 않기로 했겠다, 나는 거침없이 메뉴를 골랐다. 놀랄 줄 알았던 아티야는 내가 종업원에게 메뉴를 나열할 때마다 마치 아이를 보는 엄마처럼 굉장히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메뉴를 시키고 난 뒤, 뒤늦은 어색함이 우리 둘 사이로 밀려왔다.
‘자기소개도 했고 먹을 것도 시켰어. 그럼 그다음은?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건데?’
만약 이곳이 원래 세계였고 친구들과 함께 있는 자리라면 의식의 흐름에 따라 아무 말 대잔치가 벌어졌겠지만 아티야와 나는 친구가 아니었다.
일방적으로 내적 친밀감을 드러내 봐야 되레 어색한 분위기만 조성할 뿐이었고.
또다시 찾아온 무슨 말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였다.
“세이딘은 저한테 궁금한 것 없나요?”
느닷없는 아티야의 물음에 나는 괜히 뜨끔했다.
그야 궁금한 건 많았다. 왜 이런 곳에 있었던 건지부터 시작해서, 왜 제르아일 제국에 오지 않고 있는지까지 그야말로 산더미였다. 물어봤다간 수상하게 여길까 싶어 하지 못할 뿐이지.
나는 놀란 가슴을 뒤로하고 시치미를 뗐다.
“뭐가요?”
“보통 여자 혼자서 이런 곳에 있는 게 평범하진 않잖아요.”
“뭐, 그렇긴 하죠. 하지만 평범하지 않다고 해서 전부 궁금해하거나 알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나만 해도 방금 전 아티야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는걸.
어깨를 으쓱이자, 아티야는 놀랐는지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쑥스러운 듯 살짝 볼을 붉혔다.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봐요.”
얘도 참, 뭘 이런 걸 갖고 쑥스러워해? 나까지 괜히 쑥스럽게.
나는 간질거리는 마음을 모르는 척,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아티야도 아까 저한테 더 묻지 않고 넘어갔잖아요? 저도 그렇게 한 것뿐인걸요.”
“머리론 알아도 행동으로 옮기는 건 쉽지 않은걸요. 그러니 세이딘은 대단해요.”
착하고 밝은 여주인공에게 칭찬을 들으니 기분은 좋은데 좀 찔리네.
“실은 저, 혼자가 아니에요.”
뜬금없는 아티야의 말에 나는 한 모금 들이켰던 물을 죄다 뿜을 뻔했다. 그 대신 거하게 사레가 들려 버렸지만.
“콜록! 콜록!”
“어머! 괜찮아요, 세이딘?”
당황한 아티야가 서둘러 냅킨을 건넸다. 나는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는 그녀를 향해 손을 저었다.
“괜찮아요, 콜록! 그냥 물이 좀 안 좋은 곳으로 들어간 것뿐이라서…. 그래서 방금 뭐라고 하셨죠?”
“일행이 있다고 말했어요.”
아아, 난 또.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놈의 머리는 쓸데없는 데서 상상력이 풍부해서는.
‘아니, 잠깐?’
일행이 있다는 건 아까 여관 주인이 말한 대로….
‘신혼…?!’
사실이라면 그건 그거대로 충격이었다.
나는 당장에 아티야를 붙들고 결혼한 거냐고, 어떤 놈과 결혼한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럼 그 일행은….”
“몰라요, 다투고 어디론가 가 버렸거든요.”
주인이 말한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말에 나는 울고 싶어졌다.
우리 여주인공이 유부녀라니…! 아니, 갈라설 거라고 했으니 이젠 돌싱이 되는 건가?
게임 속에 빙의를 했어도 내 머리는 한국인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아티야의 몇 마디를 가지고 K스타일의 아침드라마 한 편을 빠른 속도로 그려 냈다.
“저런, 걱정이 많겠어요.”
영혼이라곤 눈곱만큼도 담기지 않은 대답이었음에도 아티야는 굉장히 뭉클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차라리 잘됐는걸요.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겉으로는 결혼한 척 위장했지만 실제로는 친구일 뿐, 아무 일도 없었고요.”
들으면 들을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지니 깊게 생각하지 말자.
“혹시 왜 위장을 했는지 물어봐도 되나요?”
이렇게까지 구구절절 늘어놓는 걸 보면 물어봐 달라고 하는 거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티야는 기다렸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토해 내며 말했다.
“그래야 자유로울 수 있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