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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37)화 (37/122)

제37화. 6장. 엑스트라의 휴일과 여주인공 (4)

“허, 놀고 있네.”

나는 어이없는 시선으로 크리스털을 바라보았다.

당당하게 레이프가 우선순위였다고 말한 주제에 왜 구동 암호를 이따위로 설정해 뒀어?

다른 사람도 아닌 단테였다. 공략할 때도 어떤 포인트에서 좋고 싫은지 알 수 없었던 걸 생각하면 말 다 했지, 뭐.

크리스털은 구동할 때만 번쩍였지 그 후로는 은은한 푸른빛을 흩뿌렸다.

먼저 나는 이리저리 크리스털의 위치를 움직였다. 그러자 방향을 바꿀 때마다 크리스털의 색이 붉었다가 다시 푸른색으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여주인공과 떨어진 거리에 따라 빛이 달라지는 모양이었다.

“이걸론 뭐가 뭔지 모르잖아….”

진심으로 설명서가 시급한데?

스스로가 생각해도 미친 생각이 고개를 쳐들었다.

“단테한테 가서 사용법만 물어보고 올까?”

그런 다음에 곧장 엑스트라의 휴일을 쓰면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기발한 생각은 얼마 가지 못해 타오르던 의욕과 함께 단번에 고꾸라졌다.

“하, 뭐 하냐, 정말….”

도구가 있으면 뭘 하냐, 쓰지를 못하는데.

또다시 땅을 파고 들어갈 찰나였다.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지?”

도구라고 하니 한 가지 아이템이 머리를 번뜩이고 스쳐 갔다. 그 좋은 것마저 홀라당 까먹고 있던 걸 보니 아무래도 어제의 후유증이 어지간히도 큰 모양이었다.

나는 곧장 가방을 뒤져 진실의 거울을 꺼냈다. 어제 마부를 구할 때 굉장히 유용하게 썼던 아이템이었다.

“알아낼 수 있으려나?”

어찌 됐건 ‘진실’이라는 단어가 뭐든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울을 꺼낸 나는 단테의 크리스털을 비췄다. 그러자 허공에 무언가 말이 떠올랐다.

[단테의 크리스털]

여주인공의 생명력을 추적하기 위해 단테가 만든 크리스털. 다이아몬드만큼 단단하다.

“허허, 무슨 주머니 괴물 도감 설명처럼 써 있네.”

괜히 마음이 허탈해졌다.

“뭐, 그래도 모르는 것보단 낫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이아몬드만큼 단단하다는 건 뭐람?”

물론 비상시에는 매우 요긴하겠지만 말이다.

어떤 식으로든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을 전환하며 나는 아쉬운 마음에 몇 번이고 다시 크리스털을 비췄다.

그럼에도 나오는 건 한결같이 똑같은 알림이었다.

혹시 하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 나는 크리스털을 든 팔을 움직였다.

그러자 소나무처럼 한결같은 말만 뱉어 내던 거울에서 다른 안내가 흘러나왔다.

[냉정과 열정 사이]

“…엿 먹이는 건가?”

그럴 가능성도 농후했다.

이벤트 보상은 시스템 마음대로였으니까.

끊임없는 의심을 품으면서도 나는 거울에 뜬 의미가 무엇인지를 계속 생각했다.

움직인 걸로 인해 설명이 바뀌었다면 좀 더 움직여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크리스털을 쥔 채로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날도 어두워져 숙소로 돌아가기도 해야 했으니 그 거리에서 변화를 관찰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

걷는 내내 크리스털은 서서히 붉은빛으로 변해 갔다. 이 정도로 바뀌었으면 진실의 거울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싶어 꺼내 봤더니 역시나였다.

[빨강의 의미는 정열, 열정, 경고, 그리고 참 잘했어요.]

“참 잘했어요는 뭔데….”

어이가 없으면서도 확신이 섰다. 크리스털이 푸르면 여주인공과의 거리가 멀다는 의미이고 붉을수록 가깝다는 의미였다.

“수맥 찾는 사람들이 이런 기분이겠지?”

남들은 모르는데 혼자서 열심인 것이 딱 그 모습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어?”

한참 걷던 나는 자리에 멈춰 섰다.

크리스털이 선명한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내가 묵고 있는 숙소 앞에서.

“이거 설마….”

이어지지 않은 말과 함께 심장이 두근거렸다.

큰 기대 없이 벌였던 실험이 이런 우연을 가져올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점점 커지는 두근거림은 이제 귓가를 울릴 정도로 쿵쿵댔다.

그럼에도 나는 필사적으로 마음을 추슬렀다. 게임 속에 들어와서 내가 깨달은 것은 큰 기대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내 손에는 말도 안 되는 사기템들이 쥐어져 있지만, 전적으로 내 일상을 쥐고 흔드는 것은 시스템이었다.

그러니 큰 기대 없이 개미구멍만 할지라도 희망이 보이면 손을 뻗어 보는 것이 최선이었다.

힘껏 심호흡을 한 덕에 겨우 평정심을 찾은 나는 문고리를 잡고 힘껏 밀었다.

데스티니와 공략캐들이 부재한 지금, 무엇이든 그보다는 최선일 거라고 스스로에게 중얼거리며.

“어머, 어서 오세요! 시내 구경은 잘 하셨어요?”

아늑한 여관의 프런트에 있던 주인은 나를 보자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재미있었어요.”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살펴봤지만 보이는 사람은 주인과 어제도 본 적 있는 직원 한 명, 그리고 나뿐이었다.

“부인, 혹시 투숙객 중에 제 또래로 보이는 금발에 푸른 눈을 한 굉장히 예쁜 아가씨가 오지 않았나요?”

“금발에 푸른 눈을 한 예쁜 아가씨요?”

나는 의아한 시선으로 되묻는 주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떻게 봐도 어어엄청 예쁜 사람이요!”

아무래도 손님의 신상을 함부로 말하는 건 곤란할 테니 적당한 핑계를 덧붙였다.

“실은 친구거든요. 같이 여행 가기로 약속했는데 다투고 난 뒤로 따로 다니게 돼서….”

주인의 얼굴에 어린 의문과 경계가 단숨에 허물어졌다.

“아아, 여행하시는 분들 사이에서 자주 있는 일이죠! 얼마 전에 여행 온 신혼부부가 그런 식으로 갈라섰지 뭐예요? 앞날도 창창한데 벌써부터 그렇게 안 맞으면 나중에도 힘들 수 있으니 잘 헤어졌다고 말했는데…. 어, 설마…? 그 사람일 수도 있겠네요!”

“네? 누가요?”

“아가씨의 친구요! 그 사람도 엄청 예뻤거든요.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니까요? 그리고 금발에 푸른 눈!”

조금도 망설임 없이 말하는 주인의 눈동자는 이제 확신도 엿보였다.

역으로 당황스러워진 나는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돼요? 친구랑 전 그냥 다툰 것뿐인데….”

“친구랑 다퉈서 기분 나빠지면 홧김에 남자를 만날 수도 있죠. 그러다 마음이 통하면 결혼도 하는 거고요. 저도 그러다 남편을 만났거든요.”

정말 심각하게 사적이면서도 아침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어쩌다 그렇게 된 건지 궁금했지만 물어보는 순간, 한없이 쏟아질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 대신 나는 그 사람의 행방을 물었다. 반은 예의상 질문이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어디에 있는데요?”

“식당에요. 어지간히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더라고요. 계속 술을 시키는 걸 보면.”

아무리 봐도 아티야가 아닌 것 같았지만 주인아줌마가 몇 번이고 에쁘다고 강조하는 걸 보니 밑져야 본전이었다.

잠깐 본다고 해서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니고.

나는 주인에게 고맙다고 한 뒤, 곧장 이동했다. 식당은 프런트 옆에 있는 문을 통하면 곧장이었다.

조용한 여관의 분위기와 달리, 식당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아무래도 제법 맛집으로 소문난 모양이었다.

‘하긴 식사 맛있었지.’

구경하러 나가기 전에 먹었던 음식들을 떠올리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돌아오면 저녁을 먹을 수 있을 정도의 배는 남겨 둔 차였다.

“아가씨, 저기 있어요.”

어느새 따라온 주인이 구석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을 따라 시선을 움직인 나는 순간 숨을 쉴 수 없었다.

찬란한 금발에 살짝 내리깐 푸른 눈동자,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아우른 아름다운 얼굴.

세이딘이 되기 전 매일 밤낮으로 보던 익숙한 인물이 거짓말처럼 그곳에 있었다.

‘아티야….’

그동안 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며 괜히 눈가가 시큰해졌다.

맥주를 마시는 모습이 게임과는 상당한 괴리감을 느끼게 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여주인공도 사람이니 술 좀 마실 수 있지. 아무렴!

‘근데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하지?’

이게 문제였다.

마음 같아선 당장 아티야에게 가서 온갖 아는 척을 하며 얼른 데스티니를 만나러 가라고 재촉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본론을 말하기도 전에 의심만 살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말도 안 될 정도로 운 좋게 기회를 얻은 만큼 신중해야 했다. 경험상 이런 기회는 내 평생, 아니 다음 생의 운까지 걸어도 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뻣뻣해진 다리를 겨우겨우 움직였다. 근처에라도 앉아야 말을 걸 건덕지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이봐, 아가씨. 혼자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자가 혼자 있으면 불량배가 꼬이기 마련이었다. 거기다 아름다우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제 막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켠 아티야가 고개를 들었다. 입가에 묻은 거품을 닦아 내는 모습마저 한 폭의 그림 같아서 순간 할 말을 잃고 쳐다보았다.

아티야가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실례지만 누구신가요?”

“혼자면 같이 마실래? 마시는 사람이 같이 있으면 위로도 되니까 말이야.”

“말씀은 감사하지만 혼자서도 괜찮아요.”

“에이, 그러지 말고 같이 마시자고.”

왜 쟤네들은 하나같이 남의 말은 조금도 듣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하고 질척거리냐. 뭐 전 세계적으로 그러기로 약속이라도 했어?

사람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불량배를 향해 질린 표정을 지으면서도 누구 하나 먼저 나서려는 사람은 없었다.

뭐, 나도 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었다. 아이템이 없었다면.

‘아, 있다.’

수없이 많은 악조건들을 떠올리며 쟁여 둔 아이템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내 몸도 지키면서 동시에 상대를 죽지 않을 만큼 고통스럽게 할 수 있는 물건, 바로 스턴건이었다.

여기저기서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데스티니로 주목받는 데 익숙해진 탓에 아무렇지 않았다.

“이봐.”

마침내 나는 아티야와 불량배의 사이에 섰다.

느닷없는 방해가 불쾌하다는 듯 남자는 얼굴을 구겼다.

“뭐야, 넌?”

스턴건 덕분에 뵈는 게 없어진 나는 씨익 웃었다.

“너 같은 놈에게 대답해 줄 의무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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