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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36)화 (36/122)

제36화. 6장. 엑스트라의 휴일과 여주인공 (3)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내 방이었을 곳은 온통 낯선 건물만 가득한 거리로 변해 있었다.

“설마 이게….”

나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들고 서둘러 시스템창을 열었다. 내 정보를 열자, 여러 가지 정보들 사이에 장착한 아이템 목록이 보였다.

[엑스트라의 휴일 ― 효과 발동 중]

나는 몇 번이고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글씨가 여전히 그대로인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공략캐들의 관심을 차단한다는 게….”

만나지 못하게 장소를 옮겨 준다는 의미였어?

“푸흐흐흐….”

바르르 떨리는 입에서 푸스스 웃음이 흘러나왔다. 웃음소리는 조금씩 커져서 길 가는 사람들이 눈치를 줄 정도였다.

“으하하하!”

그럼에도 나는 개의치 않고 한참을 웃었다. 스스로가 듣기에도 어딘가 악당스러운 웃음소리였다. 지난 몇 달간 이렇게까지 속이 뻥 뚫리도록 시원해 본 적은 처음이었다.

“아가씨! 거 좀 조용히 좀 하쇼!”

“쉿, 괜히 말 걸지 말아요. 해코지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쯧쯧, 안됐구먼. 어쩌다 젊은 나이에 저렇게 실성해선….”

나는 주체할 수 없이 속을 다 비워 낼 만큼 개운하게 웃어대고 싶었지만, 하나둘 몰려드는 구경꾼들로 인해 자제했다. 계속 이러고 있다간 신고를 당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여긴 어디지?”

주위를 둘러본 나는 중얼거렸다.

오롯이 혼자가 된 건 기뻤지만, 제대로 만끽하기 위해서는 우선 현 위치를 파악해야 했다.

“일단 머무를 곳부터 찾아야겠다.”

길마다 늘어선 마법구 덕에 거리는 밝았지만 하늘은 이미 캄캄했다.

다행히도 아까 거리를 나갈 적에 들고 갔던 가방을 고스란히 들고 있었기에 노숙은 면할 수 있었다.

나는 숙소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오후에 막 납치를 당한 후였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과의 대화는 내키지 않았지만, 물어보는 사람마다 친절하고 상냥해서 조금은 그런 생각을 떨칠 수 있었다.

숙소는 추천해 준 곳들 중, 깔끔하고 소박한 여관을 잡았다. 호화로운 곳도 있었지만 공략캐들이 금방 찾아낼 가능성이 높아 빠르게 포기했다.

체크인을 하며 주인에게 이것저것 물어본 결과, 이곳은 제르아일 제국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는 디에트 왕국이었다.

배정받은 방에 들어와 곧장 지도를 확인한 나는 크게 안도했다.

말이 한참이었지 제르아일 제국과 디에트 왕국의 거리는 극과 극이라고 할 정도로 멀었다.

나는 안심하며 침대에 누웠다. 주변에 아무도 없이 조용했던 적이 언젠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진작 아이템 좀 쓸걸.”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온갖 상황과 하루라도 빨리 여주인공을 찾아 데스티니와 떨어지는 것만 생각하느라 시스템을 들여다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젠 상점을 사용하는 법도 알았고 구매한 아이템의 효과도 알았으니 닳아 없어질 때까지 싹싹 긁어서 써 줄 생각이었다.

그 전에 데스티니에서 벗어날 수 있으면 최고고.

“그나저나 이제 어떡하지?”

아마 저택에서는 갑자기 내가 없어져 난리가 났을 것이 뻔했다. 가족들은 걱정이 됐지만, 그 자리에 있던 이티엘을 비롯한 공략캐들에 대해서는 일말의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단지 이런 고민을 하는 건 앞으로 공략캐들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가늠이 되지 않아서였다.

“좀 더 세부적인 설명은 없나?”

나는 아이템 창을 샅샅이 뒤졌다. 엑스트라의 휴일에 대해 조금 더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어디에도 부가 설명은 없었다.

결국 도움말까지 뒤져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 나는 있었던 일을 토대로 엑스트라의 휴일에 대해서 정리했다.

1. 엑스트라의 휴일은 공략캐들과 거리를 떨어뜨려 놓는다.

2. 권장 사용 기간은 3일. 그 이후는 페널티가 있다.

3. 사용할 때, 약간의 울렁임과 멀미가 있다.

4. 겉보기엔 평범한 목걸이. 예쁘다.

“뭔가 더 없으려나?”

이제 막 사용한 상황에서 무언가를 더 바라는 건 욕심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모처럼 좋은 아이템을 손에 넣은 이상, 갖고 있는 기능은 전부 사용하고 싶었다.

“아, 모르겠다!”

힘껏 머리를 굴린 끝에 나는 항복했다.

많은 일이 있던 후라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것도 한몫해서 어떻게든 꾸역꾸역 해 보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다.

“일단 쉬고 생각하자, 쉬고.”

엑스트라의 휴일의 사용 기간은 아직 이틀 넘게 남았으니까.

*  *  *

내가 잠에서 깬 것은 해가 중천을 넘었을 때였다.

쏟아지는 빛을 견디지 못한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중얼거렸다.

“으아, 대체 언제 잠이 든 거지…?”

앞으로 뭘 해야 할지에 대한 생각을 했던 건 분명한데 그 뒤의 기억이 없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피곤하긴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일어나기 싫어 한참을 꼼지락댄 나는 주인에게 목욕물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놈의 데스티니를 잡게 된 후로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 때문에 10분 이상 욕조에 있어 본 적이 없으니 오랜만에 물에 푹 잠겨 볼 생각이었다.

“손님, 목욕물을 준비해 왔습니다.”

상냥한 목소리에 문을 열자, 주인과 직원이 목욕물이 든 욕조를 가지고 들어왔다.

주인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 달라는 말을 남기고 곧장 방을 나섰다. 부담스럽지 않은 선을 지킨 친절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으하아! 기분 좋다.”

아저씨같이 껄껄 웃은 나는 욕조에 얼굴까지 푹 담갔다. 몸 안 가득 차오르는 따뜻함이 무척이나 기분 좋았다.

“이제야 좀 실감이 나네.”

한참 목욕을 즐긴 뒤, 머리를 말리고 나서야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런 게 내가 원하던 욜로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서 하루를 보내는 일상.

정말 오랜만에 누리는 소소한 행복들이 절로 미소를 피어나게 만들었다.

“오랜만에 책이나 구경하러 갈까?”

안 그래도 서점에 가지 못한 지가 한참 지났다. 모처럼 생긴 시간이니 못해도 책 한 권 정도는 읽어 줘야겠지.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했던 것이 무색하게 책을 시작으로 하고 싶은 일은 하나둘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책을 산 뒤, 제르아일 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먹거리들을 먹으며 주변을 둘러본다. 그리고 구경하다 괜찮은 것들이 있으면 사 볼 거다.

아니, 사실 그 외에도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해 볼 생각이었다.

“좋아, 가자!”

나는 곧장 실행에 옮겼다.

엑스트라의 휴일의 기한은 지금 이 순간에도 차근차근히 줄어들고 있었다. 오늘만 살고 죽는다는 마음가짐으로 놀아야지.

나는 누가 보면 평생 못 놀아 본 사람처럼 신나게 놀았다.

하고 싶은 것들은 전부 해 봤고, 거기에 평소에 잘 보지 않던 연극도 보고 길거리 공연의 도우미로도 나서 봤다.

사람들 앞에 서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막상 해 보고 나니 생각보다 즐겁고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하아, 정말 훌륭한 하루였어.”

빙의하기 전 세월까지 포함해 이렇게 놀아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나 홀로 아는 사람 없는 먼 타지에 온 것 또한 처음이었다.

“이러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신나게 여행을 다니는구나.”

빙의 전에는 어렴풋이 좋겠다 할 뿐, 돈과 시간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이딘이 되고 나서는 돈과 시간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게 되었지만, 나이와 부모님의 과보호로 인해 누려 본 적 없는 경험이었고.

“성인식을 마치는 대로 2년 정도 여행이나 가 볼까?”

그동안의 시간들을 되돌아보며 나는 조금 진심이 되었다. 그때면 문제 될 것이 없으니 부모님도 뭐라고 하지 못하실 것이었다.

“그 전에 데스티니 좀 어떻게 해야겠지만.”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결론에 나는 괜히 시무룩해졌다.

원 없이 힘껏 놀아 재낀 만큼 미뤄 놓은 현실의 문제가 더욱 도드라졌다.

“아티야를 찾을 수 있을까?”

매번 버릇처럼 여주인공만 찾으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말했지만 사실 어느 정도 불안은 가지고 있었다.

‘아티야는 돌아가지 않을 거다.’

그리고 그 불안은 납치범에 의해 더욱 제 몸을 부풀렸다. 말도 말이었지만 무엇보다도 확신에 찬 태도가 줄곧 마음에 걸렸다.

생각에 사로잡혀 땅을 파다 못해 대륙 안으로 들어갈 것 같을 때였다.

“맞다, 단테가 준 거!”

얼마나 정신이 없었으면 그걸 까먹어?

우중충한 머리가 단숨에 맑아지는 것을 느끼며 가방을 뒤적였다. 마법이 걸린 가방이라고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쑤셔 넣은 탓에 찾는 데는 한참 걸렸다.

가방 가장 밑바닥에서 굴러다니던 단테가 준 크리스털은 흠 하나 없이 푸르게 반짝거렸다.

나는 크리스털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단테는 생명력을 느낀다고 했지만, 마법과 연이 개미 모가지만큼도 없는 내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참을 둘러봐도 방법을 알 수가 없자, 깊은 곳에서 올라온 빡침이 고스란히 입으로 흘러나왔다.

“이 새끼, 이거 또 장난친 거 아냐?”

말장난도 그렇게 잘하는 놈이니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화가 더욱더 밀려 올라왔다.

“아니, 사람이 뻔히 간절하게 생각하는 거 알면서 대체 왜 이런 식으로 굴어?”

이쯤 되면 호감도라는 건 말이 그럴 뿐, 실제로는 원한, 혹은 저주도 포함된 게 아닐까?

“단테, 나쁜 새끼. 레이프 빠돌이 새끼. 머리 다 빠져서 인류에 기부할 새끼.”

사람이 머리가 돌면 없던 창의력도 생기는구나.

한참을 신나게 욕을 퍼붓고 있을 때였다.

“마법사에게 약속이 중요하다고 했으면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말아야지, 우선순위는 무슨 얼어 죽을 놈의…. 어?”

무슨 일인지 크리스털에서 옅은 빛이 감도는가 싶더니 이내 사그라들었다.

잘은 몰라도 그것이 작동할 때의 빛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대체 뭐에 반응을 한 거지?”

나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마법사?”

아니다.

“약속?”

아니네.

“거짓말?”

이것도 아니다.

그럼 남은 건….

“우선순위.”

그러자 끙끙거린 게 허무할 정도로 찬란한 빛이 크리스털에서 뿜어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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