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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35)화 (35/122)

제35화. 6장. 엑스트라의 휴일과 여주인공 (2)

나는 필사적인 마음을 담아 레이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간절한 내 마음은 코 푼 휴지처럼 취급당하는 것이 일상다반사였다.

“글쎄, 그걸 잘 모르겠어.”

저기요? 모르겠다면서 왜 다 아는 사람처럼 웃는데?

한껏 부정하려는 나를 비웃듯 시스템창과 알림음이 눈과 귀를 괴롭혔다.

[데스티니 이벤트 ― 놓고 싶지 않은 이유]

대마법사의 마음을 자각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보상: 데스티니의 호감도 120 / 약속의 증표 / 2000H

‘마음을 자각하게 도와주라뇨….’

어마어마한 호감도와 어마어마한 H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지금껏 공략캐들과 어떻게든 엮으려는 이벤트는 숱하게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노골적인 경우는 처음이었다.

‘탈출, 탈출이 시급해!’

가뜩이나 힘겹게 구한 마부도 사라져서 당장 내일로 잡아 둔 탈주 계획은 무산이 되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esc, 혹은 홈버튼이 너무나도 간절했다.

물론, 불가능한 건 알지만.

한차례 머릿속으로 어버버거린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허리를 감쌌던 온기가 멀어졌기 때문이었다.

두 발자국 정도 뒤로 물러난 레이프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니 지금부터 한번 알아볼까 해.”

뭘요…?

떠오른 물음과 달리 내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레이프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지금도 충분한데 그럴 필요가 있을까?”

“세이딘, 너는 그럴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라서 말이야.”

소년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낯설 만큼 매혹적이었다.

“걱정하지 마, 세이딘.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결론을 내렸다 해서 네게 피해를 주지는 않을 거야.”

말은 이미 결정을 내린 것처럼 해서 많이 불안한데요.

그렇다고 해서 말을 할 수도 없는 것이, 내가 한 말로 인해서 레이프가 괜히 애먼 방향으로 마음을 정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어느 쪽이든 괴롭기는 마찬가지라 끙끙 앓았다.

“그럼 이만 가도록 할까?”

물음과 함께 레이프가 손을 내밀었다. 속 시원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할 거리는 많았지만, 지금은 우선 쉬고 싶었다.

*  *  *

“세이딘 그웨니르 영애!”

부르는 목소리만큼이나 다급한 노크에 나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이제 막 집에 들어와 침대에 엎드려 있던 차였다.

“이티엘?”

이놈의 시스템! 납치당했다 겨우 집에 와서 쉬는 사람한테 양심적으로 너무한 거 아냐? 그리고 저놈은 아까 시내에서 봤으면 됐지 왜 저래?

“열어 줘야 하지 않아? 걱정돼서 찾아온 사람인데.”

의문은 얼마 가지 않아 해소됐다. 창가 쪽 소파에 몸을 느긋하게 뉜 레이프가 시선이 마주치자 곱게 눈을 접었다.

“레이프, 네가 연락했어?”

대체 왜?

나는 앞으로 일어날 귀찮은 일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그려져서 좀처럼 얼굴을 펼 수 없었다.

반면, 레이프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진하게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알다시피 내가 아직 마나가 다 돌아온 게 아니라서 말이야. 만에 하나라도 나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기게 될 수도 있으니 알렸어.”

나는 이마를 짚었다.

가뜩이나 마부를 찾기 전에 만났던 이티엘이었다. 몇 번이고 도와준다는 걸 기어코 거절한 뒤에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더욱이 날뛸 것이 분명했다.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걸 애써 무시한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다른 사람한테도 연락한 건 아니지?”

“당연히 연락했지. 도움의 손길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레이프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노크 소리와 함께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그웨니르 영애. 외출 중에 험한 일을 겪으셨단 소식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얼굴을 보여 주실 수 있으십니까?”

지끈거렸던 머리에 이어 눈가가 시큰했다.

그런 나를 ‘잘했지?’라는 얼굴로 바라보는 레이프를 진심으로 한 대 쥐어패고 싶었다.

이티엘과 린든이 왔다. 그 말은 곧 단테도 합류할 거라는 뜻이기도 했다. 레이프의 성격상 몇몇에게만 연락을 돌리진 않았을 테니까.

“세이딘, 10을 셀 동안 문을 열지 않으면 안 좋은 상황으로 간주하고 문을 열도록 하겠다.”

…저거 봐라?

아무렇지도 않게 범죄 예고를 하고 있네?

하지만 이곳이 어디인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었다.

사랑에 눈이 돌아간 공략캐에게는 뭔들 허용이 된단 의미기도 했다.

‘하, 진짜 울고 싶네.’

나는 속에서 일어나는 짜증을 온몸으로 표현한 뒤, 침대에서 일어났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피할 수 없다면 한시라도 빨리 지나가도록 흘려보내야 했다.

나는 요란스럽게 덜컹거리는 문을 열었다.

“안 죽고 멀쩡히 살아 있어요. 그러니까 노크 좀 살살….”

짜증을 가득 담은 내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제일 문 앞에 서 있던 이티엘이 껴안은 탓이었다.

그는 구구절절한 감정을 듬뿍 담아 말했다.

“그웨니르 영애, 무사해서 다행이다.”

“어, 아니….”

갑자기 이렇게 안으시면 제가 많이 당황스러운데요.

솔직히 말해서 놀란 것과 별개로 잘생긴 남자에게 안기는 건 꽤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검술의 정점을 찍은 만큼, 이티엘의 몸은 탄탄했다.

‘레이프와는 또 다른 맛이 있네….’

의식의 흐름대로 자연스럽게 비교하던 나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이러면 안 되지, 안 돼.

“이러시면 안 됩니다, 폐하.”

마치 생각을 읽힌 듯한 타이밍에 깜짝 놀랐다. 이티엘과 나를 바라보는 린든은 상냥한 미소를 입가에 띠고 있었지만 눈은 서늘했다.

‘아이고, 이벤트의 조짐이 보이는구나!’

아무리 치유캐고 한없이 상냥한 인물이라고 해도 이 세계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이상, 유감스럽게도 질투는 피해 갈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리고 <바이올린과 꽃미남들>은 이런 특성을 아주 잘 이용한 게임이었다.

‘있네.’

그리고 내 예상은 적중했다.

제법 채워진 이벤트 목록에는 이티엘과 린든 사이의 양다리 이벤트가 떡하니 반짝이고 있었다.

이벤트는 이러했다.

[양다리 이벤트 ― 잘못된 만남]

‘제목부터 심란하네.’

게임을 하는 입장이라면 분명 자지러지게 웃었을 것이 분명했지만, 지금 나는 플레이어가 아닌 어장이 넷인 당사자였다.

내용을 확인할지 말지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짐이 왜 그대의 말대로 해야 하지?”

“그렇게 하시면 영애가 곤란해하지 않습니까? 폐하의 행동은 지나치십니다.”

“지나치다? 부러운 게 아니고?”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묘한 분위기를 풍기기만 했었는데 두 사람 사이를 오가는 대화가 날붙이처럼 날카로워졌다.

좀 더 하다가는 한 대 쳐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라서 나는 조심스럽게 의견을 표명했다.

“저기… 일단 절 좀 놓고 말씀하시는 게 어떨까요?”

“그웨니르 영애, 지금 짐의 품이 불편하다는 건가?”

불편하다고 안 했다. 싸울 거면 날 두고 싸우라는 거지.

“괜찮습니다, 영애. 저와 둘이 이야기하실 때처럼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그 정도로 말하지 않으면 폐하는 모르십니다.”

이보세요? 왜 만인의 치유캐라 불리는 사람이 싸움을 조장하고 있어?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아무리 말해도 이 상황은 좋아지지 않을 거다. 왜냐면 얄밉게 반짝이는 글씨가 이벤트를 고르라고 강요하고 있었으니까.

이티엘과 단테의 양다리 이벤트가 자연스럽게 떠오르자, 나는 짙은 한숨을 터뜨렸다. 이번에도 선택지는 없는 모양이었다.

[양다리 이벤트 ― 잘못된 만남]

당신을 믿은 만큼 친구도 믿을 수 있다! 이티엘과 린든이 선의의 경쟁자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하세요!

▷보상 : 이티엘, 린든의 호감도 80 증가 / 2000H

지난번 양다리 이벤트보다 거창한 것에 반해, 보상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런 것보다도 다른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선의의 경쟁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웃기는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경쟁을 하는데 선의가 어디 있어?! 한 놈이 웃으면 다른 한 놈은 우는 게 경쟁사회인데.

결국 이런 말이었다.

두 사람의 호감도를 같이 올리면서 동시에 그들이 싸우지 않도록 해라.

‘미치겠네.’

하다 하다 다 큰 놈들 친구 사이 조정까지 해 줘야 한다니! 유치원 교사도 이렇겐 안 하겠다!

나는 힐끗 눈을 돌려 레이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보석 같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했다.

‘이놈들 오기 전까지 연애 이벤트를 띄운 놈이…!’

괘씸한 마음이 솟구쳤다. 아주 잠시였지만 조금이라도 동요했던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나를 놓기 싫다 어쩐다 하면서도 이런 상황을 조장한 걸 보면 결국 레이프는 자신의 봉인을 푸는 것이 우선이었다.

생각의 결론과 함께 피로감이 몰려왔다.

‘아, 지긋지긋해.’

머리 위로 오가는 의미 없는 왁왁거림 속에서 나는 아이템 창고를 뒤적였다.

얼마 가지 않아 원하던 아이템이 눈에 들어왔다.

[엑스트라의 휴일]

원래는 무사히 도주에 성공한 뒤 사용하려 했던 물건이었지만, 도주고 나발이고 간에 지금 당장 죽을 맛이었다.

혹시 몰라 몇 번이고 읽었던 설명을 다시 읽은 나는 곧장 엑스트라의 휴일을 선택했다.

[사용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뭘 묻니? 당연히 사용하려고 골랐지.

예를 누르자 허전했던 내 목에 푸른 하트 목걸이가 생겨났다.

어쩐지 속이 울렁거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우욱!”

아무래도 착각이 아닌 모양이었다.

어지러운 속과 함께 생각이 빠르게 회전했다.

비록 동의 없이 나를 안고 있는 놈이어도 어찌 됐건 이티엘은 황제였다. 괜한 불상사를 일으켜서 좋을 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힘껏 이티엘을 밀쳤다.

아니, 밀치려고 했다.

허공을 저은 팔과 함께 몸이 크게 휘청였다.

“어…?”

나는 눈을 깜박였다.

없었다.

이티엘도, 린든도, 단테도, 레이프도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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