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6장. 엑스트라의 휴일과 여주인공 (1)
황망한 심정이 소리가 되어 흘러나왔다.
“뭐야, 이거.”
한계 초과라니, 대체 뭔데 저런 경고가 떠?
한 번도 본 적 없는 알림에 머리가 어질거렸다.
무슨 날도 아니고 왜 이런 일이 연달아서 일어나는데!
빨간 글씨가 점점 패닉으로 다가와 정신이 아득해지려고 했다.
“세이딘?”
부르는 소리와 함께 어깨에 온기가 스며들었다. 어느새 다가온 레이프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까마득해지던 머리가 조금씩 제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괜찮아? 안색이 안 좋아.”
“뻔히 알면서 뭘 괜찮냐고 물어봐?”
빈말로라도 괜찮다고 대답할 수 없었던 나는 괜히 틱틱댔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괜히 마음이 불안해져서.
느껴지는 시선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괴인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정색하며 뭐라고 할 땐 언제고, 지금은 멀뚱히 가만히 있었다.
“몸에 이상이라도 생긴 건가?”
뭐야,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봐? 언제는 건방진 인간이라고 했으면서.
“당신이 신경 쓸 문제가 아냐.”
갑자기 전환한 상대의 태도에 절로 눈이 가늘어졌다.
나는 대답 대신 비아냥거리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안 갔네?”
보통은 이런 틈이 생기면 나 몰라라 하고 가 버려도 이상하지 않은데 말이야.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까만 해도 그렇게 가려고 했으면서 가만히 있는 게 희한하기만 했다.
‘게임 속이라 그런가?’
그럴 수도 있었다. 만화나 게임 속의 악역들은 언제나 주인공이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 주곤 했으니까.
비록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그 비슷한 포지션에 놓여 있으니 저 사람도 거기에 맞춰 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불쌍해라.’
수상한 것과 별개로 안쓰러운 건 안쓰러운 거였다.
하필이면 이런 거지 같은 게임 속 인물이어선 돌아가고 싶을 때 맘대로 돌아갈 수도 없냐.
“세이딘 그웨니르.”
남녀를 구분 지을 수 없는 목소리에 나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후드 아래로 언뜻 황금빛이 비친 것 같았다.
이름을 부르고도 한참 말이 없던 그는 결심이라도 한 듯 입을 열었다.
“네가 추구하는 바는 뭐지?”
나는 눈을 깜박였다.
솔직히 조금 놀랐다.
귀족 영애라면 하루라도 빨리 약혼하고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는 것이 최고의 삶으로 여겨지는 이 세계에서 먼저 저렇게 묻는 사람은 처음이었으니까.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조용히 길게 즐기면서 사는 거요.”
그 한마디에 나를 향한 시선들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놀라울 건 없었다. 욜로를 하고 싶다는 내게 언제나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았으니까.
“푸흡…!”
옆에 있는 놈은 제외하고.
“왜 웃어?”
뻔히 알고 있으면서 말이야.
세모난 눈으로 흘겨보자, 레이프는 감출 노력조차 하지 않고 실실 웃으며 답했다.
“새삼 그 대답은 언제 들어도 최고인 것 같아서.”
“최고지. 귀찮은 일 없이 자유롭게 사는 거잖아. 지금과 다르게 말이야.”
한없이 진지한 대답에 레이프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래, 눈치라도 있으니 다행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한 기분이었다. 레이프의 눈치를 보던 건 언제나 나였기 때문이었다.
‘이걸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씁쓸해야 할지….’
더 생각할 새도 없었다. 느닷없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괴인 때문이었다.
그는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내 앞에 선 레이프에게 제지당했다.
“거기까지, 이 이상 세이딘에게 접근하면 가만있지 않겠어.”
“네가 뭘 할 수 있지?”
레이프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글쎄, 적어도 네 생각보단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고작 그 마나로 말인가?”
도발이 분명한 물음은 아쉽게도 레이프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다. 호박색 눈동자를 곱게 접은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래서 멍청한 것들은 안 된다니까. 마나를 곧 힘으로만 여기는 놈들 말이야. 잘 들어, 마법은 마나로만 되는 게 아니야. 효율이지.”
말이 끝난 순간이었다. 레이프는 내 허리를 단단하게 붙잡고는 남자와 다섯 걸음 이상 멀어졌다.
마법을 쓴 것이 아닌데도 이렇게나 빠른 걸 보면 아무래도 대마법사는 체력과 운동신경도 좋아야 되는 모양이다.
아니면 게임 속 히든 캐릭터기 때문에 능력치를 몰아 받았든가.
어느 쪽이건 참 더러운 세상이 아닐 수 없었다.
“이만 가 봐야겠어. 대화는 이미 충분히 한 것 같으니.”
레이프의 말은 상대가 아닌 내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아직 저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속 시원하게 해결된 것은 없었지만 그런 경고를 본 이상, 이 이상 파고들 수도 없었다.
여차하면 도망갈 선택지 외엔 없기도 했고.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프의 몸에서 빛이 났다.
“어, 어어?!”
“저거 도망가려는 거 아냐?!”
당황하는 두 남자와 달리, 후드의 괴인은 어떤 제지도 하지 않았다.
세 사람의 모습과 주변은 점차적으로 흐릿해지더니 단번에 다른 세상으로 뒤바뀌었다.
* * *
“여긴….”
저택 혹은 내 방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바뀐 풍경은 광장 근처의 공원이었다.
잘 정돈된 길과 그 옆으로 우거진 나무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중심으로 큰 호수는 서서히 노을빛에 물들어 갔다.
“세상에, 벌써 시간이…!”
납치된 장소가 너무 어두웠던 탓에 이렇게까지 시간이 지난 줄은 꿈에도 몰랐다.
“대체 얼마나 잡혀 있던 거야?”
“기절해 있었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
내 대꾸에 레이프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얼마나 살벌한지 마음만 먹으면 눈으로 사람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씩 돌아오는 현실감각과 함께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내렸다.
“저기, 이제 좀 내려 줬으면 좋겠는데.”
레이프는 여전히 한 팔로 내 허리를 안은 채였다.
그 때문인지 공원을 거닐던 사람들은 우리를 힐끔거리며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 공공시설에서 이런 스킨십은 문제지. 아무 사이도 아니면 더욱이.
“레이프.”
재촉을 담아 부르자, 레이프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소년이어도 아름다운 얼굴은 어쩐 일인지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했다.
허리를 안은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단숨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정신없는 상황에서 벗어난 만큼 느껴지는 온기는 더욱이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말없이 흐르는 시간을 견디지 못한 나는 재차 입을 열었다.
“왜, 왜 이래?”
얼마나 당황했는지 목소리가 뒤집혀도 신경을 쓸 겨를이 없을 정도였다.
소년이 되었어도 레이프의 얼굴만큼은 여전히 치명적인 데다가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으니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오죽하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콩벌레가 되어 온몸을 동그랗게 말고 싶은 기분이었다.
“세이딘.”
바람처럼 작은 목소리였지만 붙어 있었기에 확실하게 들을 수 있었다. 오롯이 나를 담은 호박색 눈동자가 어쩐지 초조해 보였다.
“내가 생각이 짧았어.”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안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화끈거리는 얼굴과 미쳐 날뛰던 울렁거림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더 이상 거리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저 레이프가 무슨 말을 할지가 궁금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네 말을 믿지 않았어. 예전에도 말했지만 지난 500년 동안 나를 깨운 건 너 하나뿐이었거든. 그런데 너 외에도 내 봉인을 풀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어떻게 믿겠어?”
레이프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나야 이 세계가 게임이고 선택받은 자가 여주인공이라는 걸 알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충분히 믿지 않을 수 있었다.
“세이딘, 넌 모르겠지만 500년이란 시간은 많은 것을 흐릿하게 만들어. 내가 아무리 또렷하게 모든 것을 기억한들, 흘러간 시간은 다시 새길 수 없어.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봉인을 풀고 싶었어.”
“그래, 이해해. 하지만 문젠 그게 아니야.”
내 말을 믿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레이프와 내 관계는 이해관계로 시작이 됐다. 이에 대한 계약서를 쓴 것도 여주인공이 나타났을 경우를 대비한 것이었다.
하지만 레이프가 이번에 보여 준 행동은 그 모든 것을 의미 없게 만들었다.
“…알아.”
한참 뒤에 이어진 레이프의 대답은 간결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전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안다니 다행이네.”
아는 것만으로 될 문제가 아니지만.
“내 초조함으로 인해 네게 상처를 준 건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리고 곧바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레이프의 호박색 눈동자에 많은 생각들이 스쳐 갔다. 많은 고민 끝에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오해하는 게 있어.”
“오해?”
“단테와 협력한 건 봉인을 풀기 위해서 뿐만이 아니야.”
대체 무슨 폭탄을 던지려고 서두가 이렇게 길어?
절로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레이프와 만나고 난 후로 이 이상 놀랄 일은 없으리라는 확신은 날마다 새롭게 갱신되었다.
오늘만 해도 난생처음으로 납치를 당해 놀라다 못해 여기저기가 쑤실 정도였다.
‘제발 별일 아니기를….’
그럴 가능성은 0에 가까웠지만 그럼에도 바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레이프와 마주했다.
언제나 똑바로 응시하던 호박빛 눈동자가 미미하게나마 떨렸다. 평상시와 다른 반응에 나는 더욱 긴장하며 마음의 준비를 다졌다.
어색한 침묵 끝에서 레이프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널 놓고 싶지 않았어.”
“…예?”
어느 정도 호감을 표현하지 않을까 생각을 하긴 했지만 저런 내용일 줄은 생각조차 못 했다.
“세이딘, 눈이 안 깜박이는데.”
그래, 얼마나 놀랐는지 눈 깜박이는 것도 잊을 정도다.
나는 다물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움직였다.
“그, 의미 말인데. 선택받은 자로서 네 곁에 있는 뭐, 그런 걸 말하는 거지?”
제발 그렇다고 말해 줘,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