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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33)화 (33/122)

제33화. 5장. 이 게임, 탈주하겠습니다 (8)

“네?”

내가 잘못 들었나?

아니나 다를까 괴인은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말했다.

“데스티니를 불러내라고 했다.”

“지금 이곳에요?”

“그래.”

당당하다 못해 뻔뻔한 그의 요구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

데스티니가 마법의 바이올린이라고는 하지만 정작 그걸 갖게 된 내게는 그런 능력이 없었다.

“뭔가 잘못 알고 계신 모양인데, 저는 마법을 쓸 줄 몰라요.”

“언제 당신에게 마법을 써 보라고 했지? 난 데스티니를 불러내라 했는데.”

나는 답답함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지금 그게 그 말이잖아? 왜 몰라?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렇게….”

아니, 잠깐.

생각해 보니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데스티니가 필요할 때, 허공에 손을 뻗기만 하면 어디선가 날아왔으니까.

“어…, 할 수 있을지도요.”

단 저택 밖에서 불러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성공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는 게 문제였지만.

“…할 수 있다고?”

미묘하게 상대의 말투와 분위기가 날카로워졌다.

시킬 때는 언제고 인제 와서 왜 그러는 건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렇게 먼 곳에서 불러내 본 적은 없지만요. 그러니까 너무 기대하지 마요.”

왠지 모를 침묵과 함께 상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선 남자들은 어울리지 않게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전설의 바이올린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어지간히도 기대되는 모양이었다.

부담스러운 주목 속에서 나는 허공에 손을 뻗었다.

‘이러다 데스티니가 안 오면 장난 아니게 부끄럽겠지?’

생각만 해도 민망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제발 그런 최악의 상황은 없길 바라며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로 간절하게 데스티니를 떠올렸다.

한참 시간이 지나도 내 손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민망한 나머지 도저히 눈을 뜨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아니…!”

“저, 저건!”

어라, 왜 저러지?

느닷없는 남자들의 웅성거림에 살짝 눈꺼풀을 들었다.

좁은 시야로 보이는 것은 점차적으로 거세지는 황금빛이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데스티니를 불러내려고 했더니 이게 무슨 일이야?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라.”

아니나 다를까 괴인이 내게 재촉했다.

“저도 몰라요!”

가뜩이나 저 바이올린이랑 안전이별 하고 싶은 사람이 이런 걸 어떻게 알아!

억울한 마음이 가득해지는 가운데, 점점 사그라드는 빛 사이로 한 사람이 보였다. 바이올린을 든, 나보다 조금 작은 키의 소년이었다.

“아….”

얼굴이 절로 구겨졌다.

제일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앳된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어렸다. 아름답고 화려한 외모에 걸맞은 눈부신 미소였다.

“안녕, 세이딘. 이제 좀 화가 풀렸어?”

미성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어쩐지 나는 울고 싶어졌다.

‘그래, 데스티니에 봉인된 게 저놈이었지.’

이 더러운 1+1! 내가 필요한 건 바이올린 쪽인데!

오롯이 나만 보는 레이프는 주변을 둘러볼 생각도 하지 않고 곧장 한 걸음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가까이 오지 마, 너랑 말하고 싶은 기분 아니니까.”

“그래? 난 또 불러 주길래 마음이 풀린 줄 알았더니.”

네가 보기엔 몇 시간 떨어져 있는다고 풀릴 일로 보이냐?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던 레이프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흐음, 이런 상황이었구나.”

가벼운 어조와 달리, 레이프의 호박색 눈동자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의 시선과 마주한 남자들은 히익거리며 후드의 괴인 뒤로 숨었다. 진심으로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선택받은 자를 납치하다니, 간도 크기도 해라.”

레이프는 나직하게 웃었다. 소년의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깊고 어두운 웃음소리에 분위기는 더욱 경직되어만 갔다.

얘 봐라, 눈이 돌아가려고 하네.

“그만해, 그러려고 부른 거 아니니까.”

나는 일단 레이프를 말렸다. 그의 손에서 위협적으로 웅웅대던 황금빛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널 납치한 놈들인데 내버려 둘 셈이야?”

“용건이 있거든.”

그렇게 말한 나는 괴인을 바라봤다. 그는 줄곧 상황을 지켜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당신이 말한 대로 데스티니를 불러냈어요.”

“…그래, 진짜로 불러냈군.”

“아니, 그게 시킨 사람이 할 말이에요?”

당연하다는 듯 요구해 놓고 왜 당황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괴인은 담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확인을 하고 싶었다. 당신이 선택받은 자라는 소문이 온 제국에 파다해도 그게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으니까.”

몇 가지 거슬리는 단어가 귀에 맴돌았다.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중, 내가 선택받은 자라는 걸 의심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데스티니를 잡고 연주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증거였으니까.

그러나 저 사람은 내가 선택받은 자인지를 의심했고 확인하고 싶어 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당신, 선택받은 자에 대해서 알고 있군요?”

상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덕분에 나는 확신을 얻었다. 이 사람, 여주인공을 알고 있다.

“세이딘, 그게 무슨 소리야?”

내 물음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레이프가 물었다.

그건 네가 알아서 생각하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겐 지금 그럴 겨를이 없었다.

어쩌면 눈앞에 있는 저 사람이 이 지긋지긋한 상황을 끊어 낼 수 있는 열쇠일지도 몰랐으니까.

“당신 뭐야?”

여주인공에 대해서 안다면 나에 대해서도 아는 걸까? 한번 시작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걷잡을 수 없이 이곳저곳으로 뻗어 나갔다.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다. 나는 그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니까.”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잖아, 그거.”

그리고 더 수상하고.

여차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생각에 나는 성큼 레이프에게 다가가 데스티니를 뺏어 들었다.

당황한 시선이 따라왔지만 나는 지금 물불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야구방망이처럼 데스티니를 쥔 나는 상대를 노려보았다.

“다시 한번 물을게. 당신 뭐야? 뭘 알고 있지?”

일부러 더욱 날카롭게 쏘아붙여 봤지만 움찔거리는 건 두 남자뿐, 후드의 괴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한 가지만큼은 알려 주지.”

사람을 납치해 놓고 인심 쓰듯 굴고 앉아 있네.

나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무슨 이야기를 하나 기다렸다.

폼이란 폼은 다 잡아 놓고 별거 아니면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귓가에 스며드는 말은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

“아티야는 돌아오지 않을 거다.”

그 순간, 나는 지금껏 잊고 있던 여주인공의 이름을 떠올림과 동시에 혼란스러워졌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공략캐들의 이름과 그들의 이벤트는 기억하고 있으면서 여주인공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러나 지금 이보다 중요한 건 저 사람이 한 말이었다.

“돌아오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세상에 게임의 주인공이 자리를 비우는 경우가 어디 있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거기까지다.”

참으로 훌륭한 대답 회피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 데스티니와 함께 네가 있을 곳으로 돌아가도록 해.”

그 말을 마지막으로 괴인은 등을 돌렸다. 남자들도 그 뒤를 따랐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뒷모습에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사람을 붙들어 와서 한다는 소리가 고작 이거라고?

나는 그들을 향해 데스티니를 던졌다.

내 마음에 부응이라도 하듯 바람같이 날아간 바이올린은 왼쪽을 걷는 남자의 뺨을 스쳐 그들이 향한 문에 그대로 박혔다.

쾅!!

어찌나 그 소리가 요란하던지 방 전체가 흔들거리며 먼지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저, 저 아가씨가 미쳤나…!”

“데스티니에 흠이라도 가면 어쩌려고!”

과연 미쳐 돌아가는 세계관답게 자신들이 다칠 뻔한 것보다도 데스티니에 대한 걱정이 앞서는구나.

나는 서늘하게 대꾸했다.

“흠이 나건 말건 그건 당신들이 알 바가 아냐. 그보다도 거기서 더 움직일 생각 하지 마. 이 이상 미쳐 날뛰는 꼴 보기 싫으면.”

화가 나서 홧김에 데스티니를 던진 건 좋았지만 내 협박의 절반은 허세에 가까워서 저쪽에서 무시하고 그냥 가 버리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었다.

‘미친 시스템, 쓸 만한 능력을 주면 좀 좋아? 매번 이상한 이벤트나 주고 말이야.’

소설이나 게임 속 빙의한 사람들은 능력치부터 남다르던데 왜 내 손엔 바이올린뿐인지.

투덜거린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게 아닌 걸 알면서도 아쉬움을 가질 수밖에 없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뭘 원하지?”

속으로 불평을 늘어놓는 한편,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괴인이 몸을 이쪽으로 돌렸다.

예상치 못한 일인지라 조금 머리 회전이 둔했지만 나는 곧 추슬렀다.

“가더라도 납치한 이유는 명확하게 밝히고 가.”

“세이딘, 거창하게 일을 벌인 것치곤 너무 소소한 요구 아냐?”

“나한텐 중요한 거야.”

레이프에게 짧게 대꾸한 나는 상대를 바라보았다.

사실 이유가 무엇인지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아티야 대신 나를 여주인공으로 만들려는 거겠지.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닐 거라는 거지만.

날 선 시선으로 노려보자, 상대는 짙은 한숨을 터뜨렸다.

귀찮다기보다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방금 내가 한 말로도 충분히 이해했을 텐데?”

“이해를 했다고 해서 납득하는 건 아냐.”

“이 행동을 계획한 주체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는 건가?”

“그래.”

괴인은 팔짱을 꼈다.

지금껏 정적인 태도를 보여 줬던 것과 달리, 어딘가 고압적이었다.

“건방진 인간이구나. 고귀한 희생을 위해 지금껏 예의를 갖춰 준 것도 모르고.”

“고귀한 희생…?”

건방진 건 둘째치고 왜 그렇게 수상한 단어를 쓰는 건데?

―삐이이이!!!

내가 의문을 표하기가 무섭게 날카로운 알림음이 귀를 찔렀다.

평소와 다른 소리에 눈을 찌푸린 나는 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허공에 떠오른 빨간 글씨 때문이었다.

[경고! 한계 초과. 계속될 경우 페널티가 적용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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