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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32)화 (32/122)

제32화. 5장. 이 게임, 탈주하겠습니다 (7)

이렇게까지 권하는데 계속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결국 마부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마침 여기저기 돌아다닌 탓에 목도 마르던 차였다.

마부는 곧장 카운터로 가 주인에게 무언가를 말했다. 부인으로 추정되는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음료를 준비했다.

‘과연 어떤 걸 주려나.’

평민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카페인 만큼 고급진 음료가 없는 건 당연할 거고.

적어도 호불호가 갈리지 않는 무난한 거였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마부가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상큼한 향이 나는 붉은빛의 아이스티였다.

딱 봐도 고급져 보이는 메뉴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희 가게에서 가장 잘 나가는 메뉴입니다.]

마부는 퍽이나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꽃장식과 투명한 얼음을 동동 띄운 연분홍빛의 차는 누가 봐도 굉장히 예뻐서 시그니처 메뉴로 손색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가게에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전부 같은 메뉴를 마시고 있었다.

남자들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핑크색 음료를 마시는 모습은 어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귀엽게 느껴졌다.

“음….?”

그들을 따라 한 모금을 마신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어디선가 마셔 본 적이 있는 거 같은데.’

그와 동시에 생각났다. 헤브론 상단에 갔던 날, 이제 막 들어온 신상품이라며 린든이 우려 준 차였다.

아이스티로도 마실 수 있는 줄은 몰랐지만.

린든이 따뜻하게 우려 줬던 것과는 또 다른 풍미가 있어 기분 좋게 마시던 때였다.

“어….”

갑자기 머리가 핑 돌았다.

그와 함께 눈앞에 있는 모든 상이 일그러졌다. 아이스티도, 조금 고개를 들면 보이는 마부도.

머릿속에 스친 번뜩임과 동시에 나는 얼굴을 왈칵 구겼다.

“이런 망할….”

뜬금없이 차를 대접한다고 했을 때부터 의심했어야 하는데…!

뒤늦은 후회와 함께 필사적으로 버텼지만 한계는 명백했다.

결국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 못한 나는 눈을 감았다.

*  *  *

아, 엿 같은 세상.

모든 것이 내 맘대로 되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딱 하나, 말년까지 즐겁게 조용히 살다 가고 싶다는 것뿐인데 왜 이놈의 게임 속은 그것마저도 바라지 못하게 하는 거지?

욜로 할 수 있는 조건을 다 갖췄는데 대체 왜?

의식이 없는 와중에서도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서 신나게 욕한 나는 천천히 의식을 차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데다 눈이 답답한 걸 보면 무언가를 씌워 놓은 듯했다.

코끝으로 스치는 냄새가 퀴퀴한 것이 여기저기에 곰팡이가 낀 모양이었다.

‘오랜만이네.’

굉장히 친숙했던 냄새는 이쪽 세계에서 살게 된 후로 한 번도 맡아 본 적이 없었다.

새삼 그만큼 쾌적한 환경 속에서 지내 왔구나 싶었다.

물론 그런 환경이어도 열심히 구르고 또 구르는 중이었지만.

멍한 머리가 조금씩 맑아져서 상황을 파악하려던 중,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떡하죠, 대장? 이, 일단 시키는 대로 하긴 했는데….”

“어떡하긴 뭘 어떡해! 이미 이렇게 된 거, 더 물러설 수….”

나를 이곳에 끌고 온 사람들인가? 그런 것치고는 저 사람들도 누군가 시킨 뉘앙스로 말을 하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잠자코 듣고 있었더니 그들이 하는 소리는 한결같이 ‘어떡하지?’였다.

이대로 가다간 ‘어떡하지?’ 노이로제가 걸릴 것 같아 나는 더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저기요.”

“히익!”

“으악!”

상대들은 얼마나 놀랐는지 여기저기서 뭐가 부러지고 굴러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사람을 납치해 놓고 왜 저렇게 놀라?

어쩐지 잔뜩 긴장했던 온몸이 서서히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요란한 소리들이 잦아들자, 남자들은 목을 큼큼 가다듬었다.

민망할 만도 하다. 상황을 직접 본 게 아닌데도 내 얼굴이 화끈할 정도면 말 다 했지.

“여긴 어디죠?”

대답해 줄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한번 예의상 던져 본 말이었는데 상대는 꽤나 진지했다.

“…어디라고 해야 하냐?”

“글쎄요. 그 전에 말을 해도 되는 겁니까?”

당황해야 할 사람은 난데 어째 당신들이 우왕좌왕하고 있는 건데요.

한없이 어설픈 두 남자의 대화에 나는 오히려 냉정해지고 있었다.

“어딘진 안 알려 주셔도 되는데 혹시 저를 왜 납치했는지는 알려 주실 수 있으세요?”

다른 납치범들이라면 모르겠는데 왠지 저 사람들은 대답해 줄 것 같단 말이지.

“그건 말할 수 없다.”

어라, 의외네. 어리숙해서 넙죽 알려 줄 줄 알았는데.

“이따가 오는 사람에게 물어봐.”

“네?”

그 사람이 날 납치하라고 지시한 사람이라는 건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자들은 침묵을 지켰다.

더 얻어 낼 것이 없다면 내가 알아서 해야겠지.

‘시스템창!’

혹시나 해서 불러낸 시스템창은 눈이 가려진 채로도 잘만 보였다.

나는 서둘러서 상점에 들어갔다. 무언가 쓸 만한 아이템이 없나 싶어서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어제 신나게 질러댄 탓에 살 만한 아이템이 있어도 돈이 부족해서 살 수가 없었다.

‘으…. 이럴 줄 알았으면 아낄걸.’

후회가 막심했다.

만에 하나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전부 준비했다고 생각했건만, 납치는 생각도 못 했다. 진심으로.

먹지도 못할 감에 목을 메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나는 상점을 뒤로하고 아이템창을 열었다. 혹시라도 사 놓은 아이템 중 내가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들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씩 꼼꼼하게 아이템들을 살피던 중, 문득 눈에 들어오는 물건이 있었다. 이름부터 용도가 명확한 아이템이었다.

[무엇이든 자를 수 있는 단검]

‘이런 걸 어디다 쓰냐고 그럤었는데 이럴 때 쓰는 거구나….’

나는 허허 웃었다.

이놈의 시스템은 대체 어디까지 밑밥을 깔고 있는 걸까?

눈앞에 있다면 당장 멱살을 잡고 대체 무슨 원한이 있어서 이렇게까지 나를 엿 먹이는 건지 물어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거라면 포박 정도는 풀 수 있을 것 같고….’

하지만 나는 그런 마음을 모두 뒤로하고 머리를 굴렸다. 포박을 푼다고 해서 이곳을 나갈 수 있는지 여부는 명확하지 않았다.

어리숙할지라도 이곳을 지키는 사람이 둘이나 있으니까.

이후로도 아이템을 뒤적거려 봤지만 마땅한 건 없었다.

‘반지를 사용할까?’

단테와 만나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납치를 당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호불호를 따지는 것은 사치였다.

조금씩 단테가 준 반지를 사용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다가 문득 누가 대체 나를 납치한 것인지 의문스러워졌다.

‘그럼 저 사람들이 말한 사람이 올 때까지는 기다려 볼까?’

이 게임의 장르를 생각하면 내가 공략캐와 엮이는 걸 질투한 누군가가 벌인 일일 가능성이 크지만, 그것만으로 지레짐작하기에는 가슴 한구석이 찜찜했다.

한참을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나열하고 있을 때였다.

“오, 오셨습니까!”

“여자는?”

허둥거리는 남자에게 물음을 던진 목소리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 마치 원래 세계에서 음성변조를 시킨 것처럼 이질적이었다.

철저하게 자신을 숨길 생각인 것 같았다.

“여기 있습니다.”

남자의 말과 함께 이쪽을 향한 시선이 느껴졌다. 보이지 않는데도 이렇게 느끼는 걸 보면 어지간히 뜨겁게 바라보는 모양이었다.

“눈은 왜 가린 거지?”

“그건…, 보통 납치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남자의 말에 상대가 짙은 한숨을 터뜨렸다. 어쩐지 불쌍하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그럴 필요 없다. 그러니 풀어 줘.”

“네, 넵!”

남자들의 바쁜 발걸음이 이쪽으로 오는 것이 느껴졌다. 서두르다가 자기들끼리 부딪히는 것부터 시작해서 버벅거리는 것이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눈을 가린 천이 사라진 자리에는 해방감이 찾아들었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시야가 또렷해지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눈을 깜박이면서 점차 보이는 것은 곰팡이가 핀 어두운 방이었다. 그리고 내 앞에는 우락부락한 남자 둘과 후드를 뒤집어쓴 사람이 있었다. 성인 남자라고 하기에는 작고 성인 여자라고 하기에는 큰 키를 가진 그는 내게 한 발짝 다가왔다.

“세이딘 그웨니르, 맞나?”

“맞으니까 이렇게 붙들려 있는 거 아닌가요?”

도망칠 구석이 있다는 것은 놀라웠다. 원래라면 아무 말도 못 하고 무서워하고 있었을 텐데 이렇게 뻔뻔하게 굴 수 있으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상대는 놀랐는지 멈칫거렸다. 그리고 곧 픽 웃었다.

“하긴, 그것도 그렇지. 괜한 걸 물었어.”

“그럼 저도 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뭐지?”

“누구의 사주를 받고 절 납치한 거죠?”

나는 가장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상황을 짚었다. 하지만 후드의 괴인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주? 그런 귀찮은 걸 왜 하지?”

“그럼 대체 왜 납치를 한 거예요?”

이름 모를 영애의 질투가 아니라면 납치가 일어날 일이 뭐가 있는데?

머릿속에 물음표가 하나둘 떠오르고 있을 때였다.

“잠시 네게 확인할 게 있다.”

“확인?”

“그래.”

“그게 끝나면 전 어떻게 되는 거죠?”

“아무 일도 없다. 그냥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는 거지.”

나는 얼굴을 왈칵 구겼다. 확인할 게 있어서 납치하고 확인하면 돌려보내 준다는 게 말이 돼?

“제가 그걸 어떻게 믿죠?”

“믿지 않으면 계속 여기에 있게 될 거다.”

너무도 당연한 투여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침착하자, 침착해.’

의심은 상대가 뭘 확인하는지 알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았다. 여차하면 냉큼 반지를 사용해서 마탑으로 가면 그만이니까.

스스로를 도닥인 나는 천천히 눈을 들었다. 후드 너머로 느껴지는 시선이 뜨거웠다.

“그래서 뭘 확인하려 하는데요?”

“팔도 풀어 줘라.”

괴인이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허당인 남자들은 내게로 와서 묶인 매듭을 풀어 줬다.

아이템을 쓸 일은 없어졌지만 긴장감은 아까보다 배로 올라갔다.

무슨 말을 할까 조마조마하고 있을 때였다.

“데스티니를 불러내라.”

상상도 못 한 말이 귓가에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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