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5장. 이 게임, 탈주하겠습니다 (6)
그 후로 나는 이티엘에게 붙잡혀 몇 번이고 이름을 부른 후에야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래서 폐…, 아니 바르시는 왜 여기에 나온 거예요?”
“린든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혼자서요…?”
호위도 대동하지 않고?
의문스럽게 바라보는 나를 향해 이티엘은 소년처럼 웃었다.
“그웨니르 영애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모양이군. 대륙에서 검으로 날 당해 낼 자가 없다. 그러니 호위는 필요 없어.”
“그런 의미가 아니라….”
“공식적인 방문이 아닌 이상, 쓸데없이 인력을 데리고 다닐 필요는 없지. 그들에게도 각자 일이 있으니 말이야.”
그 사람들에게 우선순위는 당신을 지키는 건데요.
호위들을 따돌리고 나왔다는 소리를 참 당당하게 하기도 하지.
지금쯤 황제의 부재에 놀란 기사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적당히 괴롭히세요. 바르시가 갑자기 사라지거나 하면 고생하는 건 아랫사람들이라고요.”
“하하, 영애는 참 가차 없군. 안 그래도 이렇게 몰래 나온 달은 그들의 노고를 치하해 성과금을 더 주고 있다.”
…과연 이티엘. 성군인 건 모르겠지만 사람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는 확실하게 아는 듯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너무 시간을 지체했어요.”
이제 이 이상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기에 내 목소리는 꽤나 단호했다.
이티엘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원하는 바를 이룬 덕인지 그의 얼굴은 활짝 펴다 못해 빛이 나고 있었다.
“그래, 영애. 어제 못다 한 이야기는 다음에 듣도록 하지.”
아, 그걸 또 기억하고 계셨군요.
“조만간 찾아뵐게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나는 고개를 숙인 뒤,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이티엘의 진득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른 척했다.
골목길을 빠져나와 대로로 나온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유를 찾은 안도와 또다시 마부를 찾아 헤매야 한다는 부담이 뒤섞여 있었다.
“그런 사람을 또 어떻게 찾나….”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지만 그런 능력이 없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시 한번 발품을 파는 수밖에.
마부를 찾기 전에 나는 우선 지도를 구하기로 했다. 마침 맞은편에 큰 잡화점이 있었으니 딱 좋았다.
“어서 오세요!”
문을 열자,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활기찬 인사로 맞이하는 점원이 눈에 들어왔다. 물건도 다양하고 정리도 잘 되어 있는 게 괜찮은 가게 같았다.
“지도를 사려고 하는데요.”
“지도 말씀이시군요. 왼쪽 가장자리 코너에 있습니다.”
점원의 말을 따라간 코너에는 크고 작은 지도들이 종류별로 진열되어 있었다.
너무 작은 건 보기 어렵고 너무 큰 건 휴대하기 불편하니 적절한 크기로 사려고 했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나는 지도를 하나 골랐다. 크기도 적당하고 길 안내도 적절히 잘 되어 있어 나 같은 사람에게 딱이었다.
지도 외에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나침반과 침낭, 그리고 간이천막까지 구매했다.
“그럼 또 오세요!”
붙임성 좋은 인사를 뒤로하고 잡화점을 나왔다. 준비를 단단히 한 것 같아 마음이 한결 편안했다.
하지만.
“문제는 마부인데….”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새로운 마부를 다시 찾아 나서야 하나 고민했지만, 다행히도 그럴 필요는 없었다. 마침 눈앞을 지나가던 남자가 그 마부였기 때문이었다.
빵을 한 아름 들고 있어서 순간 잘못 본 건가 싶었지만 틀림없이 그가 맞았다.
‘이번에는 절대로 안 놓쳐!’
의지를 다지며 나는 마부에게 다가갔다. 혹시라도 놓칠까 봐 달려가 가는 길을 막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기요, 마차 운행하시죠?”
기분 좋은 듯 흥얼거리던 마부는 깜짝 놀랐다. 마차 정류장도 아닌 곳에서 웬 여자가 길을 막고 다짜고짜 마차 이야기를 하니 놀랄 법도 했다.
하지만 그는 곧 표정을 추스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차분한 사람인가 봐.
“이틀 후 오전에 르미르 왕국으로 가려고 하는데 예약 가능한가요?”
나는 어떻게든 조급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침착하게 말하려 했다.
마부는 기억을 더듬는 듯 미간을 찌푸리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럼 예약할게요. 금액이 어떻게 되죠?”
내 물음에 마부는 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종이 쪼가리였다.
15350골드입니다.]
그제야 나는 마부가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숫자가 그랬구나….’
말도 안 되는 수치가 납득되면서도 동시에 어쩐지 마음이 불편해졌다. 확실한 비밀유지는 특정 조건이 채워져야 가능한 것같이 느껴져서.
무거워지는 마음을 뒤로하고 나는 더욱 밝게 말했다.
“자리를 옮기도록 하죠. 이런 곳에서 예약금을 드리긴 좀 그러니까요.”
50골드는 귀족에게는 별것 아니었지만, 평민들에게는 한 달을 먹고살 수 있을 정도로 큰돈이었다. 그러니 이런 길가에서 돈을 받는 모습을 보였다가는 큰일을 당할 수도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해 줄 줄은 몰랐다는 듯 마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평범한 귀족이라면 절대로 생각하지 못할 일이었으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나를 멍하니 바라보던 마부는 무언가에 생각이 미쳤는지 갑자기 앞장섰다. 따라오라는 의미였다.
“이상한 곳에 가려는 건 아니겠죠?”
수상한 놈들이 곧이곧대로 답해 주지 않을 거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물어봤다.
그러자 마부는 펄쩍 뛰며 필사적으로 손을 저었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빵과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의심한 것이 미안해질 정도였다.
“혹시나 해서 말한 거예요. 그런 게 아니라면 됐어요.”
만약에 그런 일이 벌어지면 도망칠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다며 상점에서 사 둔 괴한 퇴치용 아이템이 꽤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차하면 단테의 반지도 있으니까….’
물론 그건 최악의 상황이 아닌 이상 사용하지 않을 거지만.
마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신을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아까도 느낀 거지만 그는 굉장히 걷는 속도가 빨랐다. 내가 한 걸음을 걸을 때 마부는 서너 걸음은 앞에 있었다. 어떻게든 놓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걷는 데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한 건물 앞에 서 있었다. 그곳은 카페였다.
마부를 따라 안에 들어가니 작고 아기자기한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대로에 있었으면 잘됐을 거란 확신이 들 정도로 젊은 영애들의 취향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러운 것이 있다면 예쁜 인테리어가 무색하게도 모인 손님은 전부 후줄근하거나 우락부락한 남자들이었다.
뭐야 이거.
“으음, 굉장히 개성 강한 카페네요.”
나는 수상하다고 외치고 싶은 충동을 꾸역꾸역 누르며 최대한 좋게 말했다.
다행히 칭찬으로 받아들인 마부는 쑥스러운 듯 얼굴을 긁적였다. 아니,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마부를 따라간 나는 어쩐지 조금 울고 싶어졌다. 이 사람은 눈치라곤 조금도 없는지 가게의 한가운데 자리를 권했다.
워낙 작은 가게인 탓에 손님이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주목을 받는데, 한가운데 자리이니 이목이 쏠리는 것은 한층 더했다.
‘최대한 빨리…, 해결하고 돌아가자.’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자리에 앉자, 따라 앉은 마부가 품에서 종이와 펜을 꺼냈다. 말을 하지 못하니 적어서 대화를 나눌 모양이었다.
[우선 예약금 50골드를 먼저 받고 나머지 금액은 목적지에 도착하면 받도록 하겠습니다.]
다행히 마부는 할 말만 딱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바로 지불하도록 할게요.”
그가 쓴 말을 확인한 나는 가방에서 곧장 돈을 꺼냈다. 100골드짜리였다.
“계약금이에요. 거스름돈은 필요 없고요.”
내 말에 마부가 굉장히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중요한 일이라 그런 거예요.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면 이에 배를 드릴게요.”
그만큼 내게는 절실한 문제였으니 이 정도를 쓴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마부는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사각거리며 답을 써 내려갔다.
[이렇게 많은 돈을 받을 수 없습니다.]
“왜죠?”
[목숨이 오가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
종이에 쓰인 진솔한 답에 나는 마부가 왜 말을 할 수 없는지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일단 저 멀리 던져뒀다.
“당신의 목숨이 오가는 일은 없을 거예요. 나도 그런 건 원치 않고요.”
마부는 쉽사리 답을 내릴 수 없는지 좀처럼 펜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별개의 문제였으니까.
한참을 생각한 뒤, 마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의 의미였다. 진심으로 다행이었다.
“고마워요. 당신이 우려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게요.”
진심을 담아 고마움을 표현하자, 굳어 있던 마부의 얼굴에도 조금은 화색이 돌았다.
볼일도 다 봤겠다, 돌아갈 준비를 하려는 내게 마부가 무언가를 적은 종이를 들이밀었다.
[괜찮으시다면 무언가 드시고 가세요. 대접하겠습니다.]
“네? 말씀은 고맙지만 괜찮아요. 번 돈은 소중히 하셔야죠.”
마부는 눈을 깜박이더니 곧 부드럽게 웃었다.
[이 가게는 제 아내가 하는 곳입니다. 그러니 사양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세상에. 얼마나 열심히 살았으면 가게를 열어?
하지만 동시에 아기자기한 인테리어와 어울리지 않는 손님의 조화가 이해가 갔다. 우락부락한 남자들의 모임이 수상해서 대화하는 동안 열심히 살펴보니 하나같이 말 채찍을 갖고 있었다.
혹시 어디에 가서 소문을 퍼뜨리진 않을까 싶어 머리를 만지는 척하며 진실의 거울을 꺼내 보기도 했지만, 다행히도 그들은 내가 계약한 마부만큼이나 입이 무거운 사람들이었다.
결국 나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시원한 걸로 아무거나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