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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30)화 (30/122)

제30화. 5장. 이 게임, 탈주하겠습니다 (5)

생각도 못 한 말이었지만 내 마음은 도리어 침착해졌다.

마법의 바이올린에 제대로 직격탄을 맞은 사람이 무슨 멀쩡한 말을 하겠어.

나는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물었다.

“폐하가 무슨 수로요?”

“어떻게든.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대가 바라는 바를 이루게 해 주겠다.”

그러니까 결국 의욕만 넘칠 뿐,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거잖아.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폐하, 말씀은 감사하지만 못 들은 걸로 할게요.”

나름대로 배려 차원에서 한 말이었지만 이티엘은 그렇게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대리석 같은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짐이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네.”

딱 잘라 말하니 놀라는 것 봐라.

다른 건 어떻게든 아니라고 할 수 있었지만 이건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니 초장부터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제일 좋았다.

물론 상대가 상대인 만큼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말해야 하지만.

“폐하의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에요. 데스티니는 오랫동안 광장에 있었을 정도로 강력한 힘에 의해서 봉인되었잖아요? 그런 건 방법을 생각하고 노력을 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에 말씀드린 거예요.”

나만 해도 그랬다. 그냥 호기심에 한번 만져 본 바이올린이 이렇게 될 거라곤 생각해 보지도 못했으니까.

“짐은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티엘은 단호했다. 이래서 뭐든 알아서 척척 해 온 사람은 참 힘들다. 지금까지 성공했으니 당연히 다음에도 성공하겠지, 생각하는 거잖아.

그런 마인드는 나쁘지 않았다.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과함이 문제지.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배드엔딩이고 나발이고, 이런 사람일수록 더욱 단호하게 아니라고 해야 했다.

“아뇨, 폐하는 할 수 없으세요. 어제 보셨다시피 단테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걸요.”

“단테?”

고개를 갸웃하는 이티엘을 보며 나는 눈을 데로록 굴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은의 현자요.”

아, 말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내가 살다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이야.

실시간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마당에 이티엘은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눈을 번뜩였다.

“그와 이름까지 부르는 사이인가?”

아까는 마부와의 사이를 의심하더니 이젠 정말 가지가지 문제구나. 

나는 노골적으로 황당한 마음을 감추지 않으며 대꾸했다.

“사제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짐은 스승의 이름을 부른 적은 없다.”

사실 나도 그래.

근데 어쩌니. 단테가 그놈의 이름으로 부르라고 난리인걸.

이티엘도 무리수라고 생각한 것인지 불만 어린 표정으로 더 말을 하지 않았다.

억지를 써서라도 물러서기 싫어한다는 것쯤은 잘 알겠다.

“마음은 감사해요, 폐하. 하지만 저는 어떤 도움도 원치 않아요. 지금은 누구이건 절 그냥 내버려 뒀으면 좋겠어요.”

나는 거의 사정하다시피 말했다. 제발 부탁이니 한 번 말하면 그냥 좀 알아들어라!

이티엘은 그런 나를 아련하게 바라보았다. 매번 자신만만한 모습이나 질투하는 모습만 봐서 그런지 개미허리만큼은 신선했다.

그는 고민에 고민 끝에 한마디를 던졌다.

“그럼 마부를 찾는 것만 돕게 해 다오.”

“싫어요.”

내가 사라졌을 때 마부를 수배할 수도 있는 거잖아.

이런 속사정을 모르는 이티엘은 그저 답답하기만 한 모양이었다.

―또로롱!

그 와중에도 호감도는 열심히 올라갔지만 말이다.

이 이상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문득 좋은 수를 떠올렸다. 이거라면 이티엘도 충분히 납득하고 물러나겠지.

“음, 대신 다른 걸 도와주시면 어떨까요?”

“뭐지?”

“마탑 견제요.”

“단테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서인가?”

과연 이티엘. 마법 때문에 눈이 회까닥했다고 해도 머리까지 둔해진 건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대수로울 것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어제 보셨다시피 단테랑 데스티니가 제게는 비밀로 하고 손을 잡았잖아요. 그거 때문에 당분간은 보고 싶지 않거든요.”

“알았다. 그웨니르 저택에 황궁기사단을 보내도록 하지. 그리고 마탑에도 사람을 보내 견제하도록 하겠다.”

과연 황제. 바이올린으로 얽힐 때는 말이 안 통해서 답답했는데 이런 일에서는 설명을 추가할 필요가 없어 무척이나 편했다.

“그럼 부탁할게요.”

나는 씨익 웃었다. 나중에 단테가 보고 당황할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속이 고소했다.

“정말 괜찮겠나, 그웨니르 영애?”

골목길에서 빠져나오자, 이티엘이 재차 물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은 거겠지만 내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럼요, 이래 봬도 제가 똑 부러지거든요. 알아서 잘할 테니 폐하는 신경 쓰지 마세요.”

이티엘의 표정은 눈에 띄게 시무룩해 보였다. 다른 귀족들이 봤다면 또 한차례 수군거렸겠네.

‘그러고 보니까 이티엘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생각해 보니 의문이었다. 언젠가 온 편지에는 언제나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서 자주 보러 올 수 없으니 대신 선물을 보낸다고 했을 정도로 바빴는데.

“폐하, 왜 여기에….”

마부를 찾으러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지려던 나는 무언가에 입이 막혀 버렸다. 하얗지만 크고 단단한 손은 이티엘의 것이었다.

“이런 대로에서 그렇게 불려선 곤란해, 영애.”

음, 슬금슬금 불안한 게 촉이 온다.

놀란 나를 담은 붉은 눈동자가 곱게 접혔다.

“그러니 이티엘이라고 불러.”

…역시나.

한두 번 당한 일이 아니니 못 부를 것도 없었지만 상대는 황제였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름을 불리는 모습을 보이면 온갖 소문이 따라다닐 것은 자명했다.

‘그리고 황제라고 부르는 게 안 되면 이름도 안 되지! 제국민 중에 황제 이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성군이라 불리는 만큼 이티엘의 이름은 온 제국에 널리 퍼져 있는 상태였다. 아마 정치적인 입김이 들어간 효과 때문이겠지만, 어찌 되었건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폐하라고 부르는 것만큼이나 좋지 않았다.

나는 눈에 힘을 준 채로 시선을 들었다. 생각을 좀 하라는 의미였지만, 콩깍지가 단단히 씐 이티엘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입을 막는 건 본의가 아니었지만 그대의 뜨거운 시선은 무척이나 기쁘군. 심장이 떨리다 못해 떨어질 것 같아.”

―또로롱!

이쯤 되면 이놈의 호감도는 내가 뭘 해도 올라가지 않을까?

쓸데없는 생각과 함께 나는 양손으로 이티엘의 팔을 잡았다. 힘을 주지 않고 있던 탓에 쉽게 팔을 끌어 내릴 수 있었다.

“오해하지 마시고요.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런 곳에서 이름을 부르는 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거예요.”

“아, 그랬지. 잊고 있었다.”

잊을 걸 잊어야죠, 이 사람아.

눈을 가늘게 뜬 나를 보며 푸스스 웃은 이티엘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미소 지었다.

“그럼 바르시, 이건 어떤가?”

이티엘의 이름 중 저런 단어는 없었던 거 같은데.

“그게 뭔데요?”

이티엘이 미소 지었다.

그 모습과 함께 문득 역사 수업 때 지나가듯 들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릴 적 어머니께서 지어 주신 내 애칭이다.”

“큽!”

너무 놀란 나머지 이상한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이름을 불러 달라고 할 때부터 혹시나 했지만….

‘이거 이벤트잖아!’

눈치를 채자마자 눈앞에는 알림이 떠올랐다.

[이티엘 이벤트 ― 소중한 이름]

‘정말 시도 때도 없이 벌어지는구나.’

그것도 도주 준비를 하려고 하는데.

이벤트를 대충 살펴보니 이티엘의 애칭을 듣고 나서 거기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교감하는 내용인 듯싶었다.

‘페널티가 있는 게 아니면 그냥 넘어가야지.’

어차피 도망가려는 몸인데 이벤트가 무슨 소용이람. 여주인공만 찾으면 이런 건 별 의미 없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던 중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보상이었다.

[보상: 2000H / 페널티 무효권 / 이티엘의 호감도 30 증가]

‘페널티 무효권?’

이제 하다 하다 줄 게 없으니 별걸 다 준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조금 고민이 됐다. 도망을 가면 그만이지만, 그 과정에서 어떤 변수가 생길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마부를 구하러 가는 길에 이티엘을 만난 것처럼.

‘으음, 근데 이건 페널티를 받지 않을 상황을 만들면 그만이잖아.’

이벤트를 포기하려는 내게 또 다른 내가 의문을 던졌다. 과연 그런 상황이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나?

‘장담 못 하지.’

자문자답을 한 나는 결국 이벤트에 머리를 숙였다. 앞으로 할 행동이 시스템을 크게 거스를 테니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한다 해서 나쁠 건 없을 터였다.

“애칭에 담긴 뜻이 있나 봐요?”

내 물음과 동시에 수락 글씨가 붉어졌다.

좀처럼 없던 적극적인 내 모습에 이티엘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 지금까지 본 미소 중 가장 아름답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평화라는 의미지. 신앙심이 깊던 어머니께서 내 앞길에 축복이 가득하길 바라며 지으셨다고 한다.”

선황후의 기억을 떠올리는 이티엘의 표정은 무척이나 온화했다. 그는 어릴 적 어머니와의 추억 몇 가지를 즐겁게 늘어놓았다. 게임에서는 본 적 없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어릴 때는 언젠가 짐의 곁에 마음을 줄 수 있는 이가 나타난다면 애칭을 허락하겠다고 생각했었지. 어리숙하게도 말이야.”

계속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나는 반박을 하고 싶은 충동을 꾸역꾸역 누르며 어떻게든 이벤트를 성공시키려는 마음 하나로 버텼다.

이에 대해 일절 모르는 이티엘은 내게 웃었다.

“하지만 이렇게 지난 일을 되돌아보니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걸 새삼 깨닫는군. 짐이 이렇게 열렬히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어.”

그건 누누이 사랑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뭐, 맘대로 생각하라지.

그래서 이 이벤트는 언제 끝나는 걸까?

길고 긴 사연과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스러운 대사가 한차례 흘러간 뒤, 마침내 이티엘이 말했다.

“그러니 바르시라고 불러 줘, 그웨니르 영애.”

“…알겠어요, 바르시.”

마지못한 대답과 함께 알림음이 귓가를 울렸다. 이티엘의 호감도가 올라감과 동시에 무사히 이벤트를 성공했다는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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