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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29)화 (29/122)

제29화. 5장. 이 게임, 탈주하겠습니다 (4)

매혹적인 저음이 귓가를 울렸다. 뭇 여성들이라면 누구나 설레고도 남을 정도로 깊은 울림이었지만.

‘아, 망했다.’

내 머릿속은 새하얗게 물들어 갈 뿐이었다.

“화, 황제 폐하…?”

어떻게든 정신을 추스르고 입을 연 나는 고개를 들었다. 역광에 드리운 붉은 눈동자가 내 부름에 달을 그리고 있었다.

황제가 왜 이런 곳에 있어?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우연이군.”

좋아하지 마. 난 울고 싶은 마음이란 말이야!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급히 가던 거지?”

“폐하, 방금 여기로 지나가던 중년 남자 못 보셨어요? 갈색 모자에 푸른 외투를 입었는데.”

“갈색 모자에 푸른 외투를 입은 남자?”

내 말을 따라 중얼거린 이티엘은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짚이는 데라도 있는 건가 싶어 뚫어지라 쳐다봤더니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그웨니르 영애, 그 남자는 그대에게 뭐지?”

“네…?”

“설마 결혼을 하지 않을 거라는 이유가 그 남자 때문인가?”

아니, 세상에, 이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폐하!”

나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데스티니의 마법에 정신이 혼미해지다 못해 혼자 머릿속으로 사랑과 전쟁을 그려 내고 있는 이 남자를 어떡하면 좋을까.

“아니라고? 그대가 이 정도로 간절히 찾고 있는데도 말인가?”

“아니에요, 폐하가 무슨 생각을 하시건 그건 무조건 아니에요!”

몇 번의 실랑이를 벌이는 와중에도 나는 울고 싶었다. 이티엘만 아니면 따라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욱이 마음이 심란해졌다.

그 남자가 누구냐며 씩씩대던 이티엘은 눈에 띄게 울적해진 나를 보며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웨니르 영애…? 혹시 지금 우는 건가?”

“안 울어요! 그럴 시간이 있으면 차선책을 생각해야죠.”

이티엘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큰소리를 치는 나를 보며 흡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야 짐이 반한 여자답지.”

“폐하, 너무 가까운데 이만 놔주시겠어요?”

나는 못 들은 척을 하는 것도 모자라 화제를 돌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티엘은 그마저도 익숙한 듯 가볍게 넘겼다.

“아, 그렇군. 너무 반가운 나머지 계속 붙잡고 있었어.”

어째 얘도 좀 능글맞게 변한 것 같은 건 내 착각인가?

거리가 떨어진 나는 옷을 툭툭 털어 냈다. 얼마나 치맛자락을 꽉 쥐었는지 여기저기에 주름이 잡혀 있었다. 앤이 보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난리 나겠네. 

“그래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무슨 이유로 그 남자를 그렇게 간절히 찾았던 거지? 그…, 드레스까지 그렇게 하고 말이야.”

역시나 이티엘은 집요했다. 그는 여전히 마부와 나 사이의 연결고리가 무엇인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 어쩔 수 없지.

엉뚱한 오해를 사느니 여기서는 사실대로 말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이상한 오해 마시고요. 제가 찾는 남자는 마부예요.”

“마부? 그웨니르 영애, 이젠 중년도 모자라 마부와….”

“아니라고 했죠! 어디 급히 가야 할 일이 생겨서 마부를 구한 것뿐이에요.”

“마부라면 그대의 가문에서 일하는 자도 있지 않나?”

“안 돼요, 집에는 비밀이거든요.”

이티엘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일반 영애라면 가문에 비밀로 해야 할 일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예전이었다면 나 또한 그랬겠지만, 데스티니를 손에 넣게 된 시점에서 나는 평범함과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내 상황과 잘 맞아떨어지는 핑계를 생각해 보면 한 가지, 적절한 내용이 나왔다.

“실은 르미르 지방에 사는 사촌에게서 데스티니의 연주를 듣고 싶다는 초대장이 왔어요. 그런데 저희 부모님은 절 끔찍이 아끼셔서 타 지역에 가지 못하게 하시거든요. 그래서 몰래 슬쩍 다녀오려고요.”

“아아, 그래서….”

충분히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이티엘을 보며 어쩐지 답답해졌다. 왜 이런 데서 납득을 하냐고요! 황제고 성군이면 좀 더 의심을 하라고!

…는 마음의 외침일 뿐이고, 사실 내 입장에선 허술하게 굴면 고마울 뿐이다.

“그럼 짐이 줄까?”

나는 순간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어 눈을 깜박였다.

이티엘은 그런 나를 이해한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대가 필요하다면 마차 정도는 얼마든지 내어줄 수 있어.”

황가의 인장이 그려진 새하얀 마차를 떠올린 나는 빛의 속도로 거절했다.

“안 돼요!”

“왜지? 황실의 마차라면 더욱 그대를 극진히 대접할 텐데.”

그게 문제지! 무슨 동네방네 ‘나 도망가요~.’ 하고 소문내는 것도 아니고.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어서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티엘이 강력하게 밀고 나갈 것이 분명했다.

‘아, 진짜 뭐라고 해야 해?’

둘러대는 것도 하루 이틀인 데다 어제도 생각을 많이 한 탓에 그럴듯한 변명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빤히 쳐다보는 붉은 눈동자와 어우러져 머릿속이 뒤엉켜 버린 탓일까, 한계치에 다다른 내 입이 아무 말이나 던지고 말았다.

“혼자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싶어요.”

“혼자 생각하는 시간?”

“네, 요즘 벌어진 일 때문에 심란하거든요.”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 때문에 도망을 가겠다고 결심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더 생각하지 않아도 입은 알아서 술술 이유를 늘어놓았다.

“게다가 선택받은 자로 불리면서 한 번도 제대로 쉰 적이 없어요. 그래서 이번 기회에 생각도 정리하고 쉴 겸 혼자서 다녀오려고 하는 거예요.”

이렇게까지 말하자 제아무리 이티엘이라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급격히 말이 없어진 것을 보면 그 또한 뭔가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래, 알았다.”

생각을 정리한 이티엘이 순순히 답했다. 솔직히 안도했다. 혹시라도 안 된다고 계속 고집부리거나 자기도 따라가겠다고 하는 게 아닌지 걱정했는데.

“대신 한 가지 약속해 줄 수 있겠나?”

“뭔데요?”

이제 다시 보지 않을 사인데 약속쯤이야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지.

“이틀에 한 번은 짐에게 연락을 했으면 한다.”

연락이라면 편지를 쓰라는 건가?

이전이었다면 벌칙게임처럼 느껴질 부탁이었지만 떠나는 마당이니 별것 아니게 느껴졌다.

“써 보도록 노력할게요.”

선심 쓰듯 대답을 했지만 어쩐 일인지 이티엘은 의문스러운 표정이었다.

“뭘 쓴다는 거지?”

“이틀에 한 번씩 편지 쓰라면서요.”

“편지? 짐이 그런 번거로운 짓을 그대에게 시킬 거라 생각하나?”

그럼 뭔데?

“짐이 말한 건 이거다.”

손을 내밀어 보라는 손짓을 따르자, 이티엘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 손바닥에 올렸다. 그것은 아기 주먹만 한 자수정 목걸이였다.

“통신구다. 주로 황실에 급한 일이 있거나 할 때 쓰는 물건이지만 그대에게 주도록 하지.”

나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국가 긴급상황에만 쓰는 연락수단을 사적인 일에 쓰겠다고요? 그것도 아무 사이도 아닌 저한테?”

“짐이 그렇게 하겠다는데 뭐가 문제지?”

이런 미친….

이젠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익숙해지기는커녕 웃음만 나온다.

콩깍지가 단단히 씐 건 알았지만 그래도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할 것 아냐?

“그리고 그대가 어떻게 아무 사이지?”

말문이 막힌 채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이티엘이 훅 치고 들어왔다.

“짐과 그대는 머지않은 미래에 하나가 될 텐데.”

“어….”

이 사람이 한번 사랑과 전쟁을 상상하더니 거침이 없네?

놀라고만 있어서는 곤란했다. 이놈의 공략캐들은 만들어진 목적 자체가 여자를 홀리는 것이기 때문에 잠시라도 긴장을 풀면 콱 잡고 놔주지 않을 것이 뻔했다.

“폐하,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저는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그건 미래의 일이다. 누구도 장담할 수 없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아니에요.”

내가 언제 적부터 한결같이 욜로를 외치고 살았는데!

양보할 수 없다는 의지를 담은 시선과 시선이 부딪혔다.

마음은 당장에라도 100점짜리 마부를 찾아 나서고 싶었지만, 나는 여전히 제르아일이었고 도주 계획을 들켜선 안 되는 상황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알았다.”

한참을 바라보던 이티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뭘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말을 알아들었다는 소리가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그럼 이렇게 하지. 내가 그대를 도와주겠다. 그러니 그 기간 동안 나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떤가?”

“폐하,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데스티니와 그대 말이다.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놀랐다가 어제 그 자리에 이티엘도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평정심을 다졌다. 이로써 데스티니와 내가 사이가 안 좋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 되었다.

“말씀은 고맙지만 폐하께서 관여하실 문제가 아니에요. 그리고 나라의 안녕을 위해서는 데스티니가 필요하셨던 것 아닌가요?”

“영애의 말이 맞아. 하지만 지금 짐에게 더 중요한 건 그대야.”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티엘의 말은 언젠가 이벤트에서 본 적이 있는 대사였다. 여주인공이 사람들의 관심에 지쳐서 떠나려고 했을 때 이티엘이 반대하며 했던 말이었지.

상당히 좋아했던 장면이었지만 멀리서 구경하는 입장이라면 모를까, 당사자가 된 지금은 썩 유쾌하지 못했다. 여주인공과 같은 이유는 아니어도 도망치려는 상황에서는 더욱이 그랬다.

나는 결국 한숨을 터뜨렸다.

“잘 들으세요, 폐하. 그 감정은 거짓이에요. 데스티니의 마법 때문에 저에게 반했다고 착각하시는 거라고요.”

“이전엔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야.”

확신에 찬 말에 나는 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미 몇 번이나 설득을 시도할 때마다 같은 대답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말하는 건 조금이라도 제정신이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지만, 이 시간부터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을 도울 수 있는데요?”

좋아한다는 건 그렇다 쳐도 이건 조금 흥미가 있었다. 큰 도움이 안 되더라도 레이프에게 조금이라도 엿을 먹이는 건 가능할지 모르니까.

궁금증이 커지는 가운데, 이티엘이 짙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데스티니와 떨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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