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화. 5장. 이 게임, 탈주하겠습니다 (3)
그 말을 마지막으로 레이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점원에게 줄 팁을 남기고는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뭐야, 정말.”
다 아는 것처럼 말하고 말이야.
기분이 나빠진 나는 식은 차를 들이켰다. 코끝을 스치는 꽃향기가 달콤했지만, 입안은 쓰디쓸 뿐이었다.
차를 다 마신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원래는 조금 더 느긋하게 있어 볼까 했지만 레이프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다.
“이제 두 번 다시 저놈의 바이올린을 보지 않고 살 거야.”
나는 재차 다짐을 다지며 거리를 걸었다.
매번 정해진 목적지에 마차를 타고 돌아다니다가 걸어 다니려니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아, 찾았다!”
나는 한참을 헤매고 나서야 마차 정류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늘은 한가한 날인지 손님을 태우려는 마부들이 길게 줄 서 있었다.
나는 이때를 대비한 아이템을 꺼냈다. 써 봐야지 해 놓고 꺼낼 엄두를 내지 못했던 진실의 거울이었다.
이름만 봐도 도움이 될 것 같은 아이템을 쓰지 않았던 이유는 단 한 가지.
“으….”
손바닥보다 작아 휴대하기 좋은 장점을 다 씹어 먹을 정도로 쓸데없이 과하게 화려한 외관 때문이었다.
“하아….”
핑크색을 바탕으로 이곳저곳에 붙어 있는 큐빅인지 보석인지 모를 것들이 부담스럽게 빛났다.
보기만 해도 한숨이 나는 물건이었지만 어쩌겠는가. 지금 내게 이만큼 적절한 물건은 또 없었다.
“이리 오쇼, 아가씨! 싸게 해 드릴게!”
“나는 시내에서는 추가 요금을 붙이지 않소!”
“내 말은 귀족가에도 들어가는 명마요. 어디든 빠르고 신속하게 데려다드릴 수 있지.”
“내 마차는 흔들리지 않는 마법이 걸려 있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아. 황제 폐하가 오셔도 만족하실 만큼 승차감도 좋고 말이야!”
거울을 꺼낸 것이 화근인지 나를 발견한 마부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어필하기 시작했다.
‘아, 이런 걸로 눈에 띄기 싫었는데.’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을 도로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약속을 잘 지키는 마부.”
나는 거울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다소 민망했지만 아이템 사용법이 이렇다고 하니 별수 없었다.
그 단 한마디와 함께 마부들의 머리에 숫자와 함께 O, X가 나열되었다. 아마 저것도 내 눈에만 보이는 현상이겠지.
나는 느릿하게 걸으며 마부들을 살펴보았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같다고, 목에 핏대를 세우는 사람일수록 머리 위의 수치가 굉장히 낮았다.
‘너무한 거 아냐?’
마차 정류장을 한 바퀴 다 돈 나는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많은 마부들 중에서 입이 무거운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숫자의 수치도 100점 만점에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이 60이었으니 말 다 했다.
“어째 처음부터 난관이냐….”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데스티니를 잡은 후부터 상당히 인생이 꼬였다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운이 없을 줄은 몰랐다.
마차 정류장을 뒤로한 나는 목적지를 바꿨다. 이렇게 된 거 우선 장신구라도 팔아 놓을 생각이었다.
광장을 지나 사람들에게 물어 겨우겨우 부티크 애비뉴에 도착했다. 고가의 옷이나 보석 등을 취급하는 이 거리는 주로 귀족이나 부유한 평민이 찾는 곳이었다.
나는 자주 가던 공방을 피해 다른 공방을 찾았다. 단골집에서 팔았다가 괜히 집까지 소문이 흘러가면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이것도 쉽지 않네….”
단골은 아무래도 전부 인지도가 있는 곳이다 보니 그런 곳을 제하고 남는 곳은 새로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곳이거나 과거의 영광에 묻혀 가는 곳이거나 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새로운 곳은 한창 입소문과 유행을 타기 시작한 곳이라 아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으니, 결국 고른 것은 유행과 거리가 먼 오래된 공방이었다.
가게에 들어서자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고풍스러운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귀족들은 유행이 지났다고 싫어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오히려 유행을 따르지 않았기에 우아하게 느껴졌다.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외관과 달리, 나를 맞이한 사람은 젊은 여자였다.
조금 의외였다. 이런 분위기라면 접객부터 제작까지 전부 주인이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놀란 기색을 감춘 채 본론을 꺼냈다.
“이것들을 팔려고 하는데요.”
나는 마법의 가방에 넣어 둔 보석과 장신구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평소 꾸미는 데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또래 영애들에 비하면 가지고 있는 장신구의 개수는 얼마 없었지만, 그 대신 그 하나하나의 가치는 어마어마했다.
이게 다 돈 많고 딸 사랑 깊은 부모를 만난 덕이지, 암.
직원은 쇼케이스 위에 벨벳을 깔고는 내가 가져온 것들을 하나씩 늘어놓았다.
“전부 최상품이네요.”
“어떻게 아셨어요?”
깜짝 놀라 묻는 내게 점원은 자신감 넘치는 미소로 답했다.
“이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자세히 감정하지 않고도 알 수밖에 없어요.”
신기함과 동시에 미안해졌다. 내가 한 말이 이 분야의 전문가인 저 사람에게는 무례한 말일 수 있을 테니까.
나는 황급히 사과했다.
“실례되는 말을 해서 죄송해요. 어떤 의도도 없었어요.”
“알아요, 오시는 분마다 신기해하시거든요.”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다행이다.
“모두 다 해서 15개인데, 맞나요?”
“네.”
내 대답과 함께 직원은 다시 한번 꼼꼼히 감정을 하고는 장부에 매입가를 쭉 적은 뒤, 내게 보여 주었다.
“총 5000골드 되겠습니다. 이대로 매입해 드릴까요?”
예상도 못 한 금액에 깜짝 놀랐다. 평민의 한 달 생활비가 50골드에, 내 한 달 용돈이 500골드인 걸 감안했을 때, 장신구들의 매입가는 상당했다.
‘아버지…. 이런 데 돈 쓰지 마시고 차라리 절 주시지 그랬어요.’
나는 이 자리에 없는 아버지께 다시 한번 아쉬움을 토로할 수밖에 없었다. 진작에 돈을 줬으면 내가 알아서 욜로 하는 데 잘 썼을 텐데.
말이 그럴 뿐이지, 실제로는 주신 장신구들은 다 아끼고 아꼈다.
길어지는 생각과 함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직원은 상냥한 미소로 계약서를 작성했다.
“매입은 현금과 수표 중 어떤 걸로 진행해 드릴까요?”
“현금으로 해 주세요.”
수표는 가볍지만 이후에 찾기가 불편하니까.
“현금으로 하실 경우, 자택으로 보내드리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데 어떻게 해 드릴까요?”
“괜찮아요, 들고 갈 수 있어요.”
나는 마법 가방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겉보기에는 손가방 크기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마법이 걸려 있는 탓인지 무엇이든 제한 없이 쑥쑥 들어갔다. 게다가 무게도 느껴지지 않아서 덕분에 짐을 간소하게 싸려고 했던 생각을 전부 바꿨을 정도였다.
“마법 가방이군요.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준비하도록 할게요.”
가방이 무엇인지 안 직원은 별다른 의문을 품지 않고 현금을 가져오는 데 시간이 다소 소요될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말과 함께 가게의 안으로 들어갔다.
‘이다음엔 뭘 해야 하나….’
나는 또 할 일이 없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일단 시내에서 볼일은 마부 찾기와 장신구를 현금으로 바꾸는 게 다였지만, 나온 김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준비할 생각이었다.
‘아, 맞다. 지도 좀 사야지.’
마차 정류소를 찾을 때도 그렇고 부티크 애비뉴를 올 때도 그렇고, 길을 꽤 많이 잃고 헤매서 몇 번이고 사람들에게 물어보곤 했으니까 지도는 필수였다.
그렇다고 해서 길을 잘 찾을지의 여부는 알 수 없었지만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터였다.
“많이 기다리셨죠?”
더 시간이 걸릴 거라 예상한 것과 달리, 점원은 내 예상보다도 빨리 돌아왔다. 아까와 다른 점이라면 들어갈 때는 없던 수레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돈주머니가 잔뜩 쌓인 수레를 멈춘 직원은 내 가방에 현금을 하나하나 세어 가며 넣어 주었고, 마침내 금액이 맞는 것을 확인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나는 싹싹한 점원에게 그러겠노라고 했다.
그럴 일이 과연 있을까 모르겠지만, 기분 좋은 응대를 받았으니 기회가 된다면 다시 찾고 싶었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거리를 걸었다. 현금이라도 바꿔 놓으니 없던 여유가 생겨나다 못해 기분이 좋았다.
일단 마부는 뒤로하고 지도를 사러 갈까 싶어 잡화점을 찾을 때였다.
“어…?”
눈앞에 지나간 마차를 보며 나는 눈을 의심했다. 100이라는 숫자와 함께 동그라미가 마부 머리 위에 있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언제 잡화점을 찾았냐는 듯 나는 마차를 향해 뛰었다.
당연하게도 마차를 따라잡을 만한 달리기 실력이 아니었던지라, 나는 빠른 포기와 함께 마침 손님을 내리던 다른 마차를 잡았다.
“저 앞에 푸른색 마차를 쫓아가 주세요, 어서요!”
듣기에도 꽤나 다급해 보였는지 마부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서둘러 말을 몰았다.
저렴한 마차였는지 엉덩이가 들썩일 정도로 극심하게 흔들렸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눈앞에 내 도망을 도와줄 천사가 나타났는데 잡지 않고 어떻게 배겨?
얼마간의 추격전 끝에 마침내 마차는 어느 건물에 멈췄다. 그리고 마차를 세운 마부는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악, 진짜!
“여기요, 남은 돈은 전부 가져도 돼요.”
나는 서둘러 잔금을 치른 뒤, 마부를 향해 달렸다.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외출용이라고는 해도 길고 치렁거리는 치맛자락이 상당히 거슬렸다.
“어머, 세상에!”
“젊은 처자가 남사스럽게 뭘 하는 거람?”
내가 치마를 걷어붙이고 달리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데스티니랑 영원히 안녕 좀 해 보려니까 온갖 주목을 다 받는구나, 허허.
하지만 그런 시선들을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여기서 더 속도를 내지 않으면 100점짜리 마부는 금세 어디론가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저기요! 잠깐만 기다려요!!”
무슨 놈의 걸음이 저렇게 빨라?!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해 봐도 따라잡을 수 없자, 결국 나는 마부를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마부는 자신을 부르는 줄 모르는 듯 유유히 골목을 돌아갈 뿐이었다.
“헉헉, 진짜, 미치겠네! 허억!”
숨이 턱까지 차오르다 못해 구토기가 올라오던 때, 누군가 나를 잡아당겼다. 덕분에 있는 힘껏 뛰던 나는 마치 나는 것처럼 내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
“으아아!”
넘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기어코 반사적으로 꾹 눈을 감아 버렸다.
하지만 차가운 돌바닥의 감촉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서 뭘 하는 거지, 그웨니르 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