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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27)화 (27/122)

제27화. 5장. 이 게임, 탈주하겠습니다 (2)

“뭐긴, 네 바이올린 데스티니지.”

언제부터였는지 레이프는 내가 마차에 탈 때부터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는 엊그제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태연하게 굴었다. 싱글싱글 웃는 건 덤이었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그런다고 나도 헬렐레 웃으면서 대꾸할 줄 아나.

나는 얼굴을 굳히며 정색했다.

“농담 집어치워, 데스티니. 재미없으니까.”

“흐음, 매정하네.”

“그럼 내가 너한테 친절하게 대해야 하는 이유라도 있어?”

“그건 아니지.”

어깨를 으쓱인 레이프를 보며 나는 답답해졌다. 정말 뭘 하자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세이딘. 내가 어떻게 너와 떨어질 수 있겠어? 지금까지도 항상 함께 다녔잖아.”

잘도 이야기한다.

“어제 그런 일을 벌여 놓고도 그런 말이 나와? 단테랑 몰래 만날 수 있었다는 건 딱히 나와 함께 다니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소리 아냐!”

그렇단 것은 나를 따라올 필요가 없는데도 따라다녔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레이프는 전혀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 네 말이 맞아. 하지만 나는 너와 함께 다니고 싶은걸? 함께 있으면 재미있는 일도 많고….”

“너는 그렇겠지만 난 싫어.”

나는 딱 잘라 말했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나를 이용하려 드는 사람과 같이 다니고 싶어 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단호한 시선을 본 레이프는 어깨를 살짝 늘어뜨렸다.

“이용이라니…. 그렇게 받아들인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렇게 받아들이는 게 아니고 사실이잖아.”

“세이딘, 그렇게 싫었어?”

“좋겠니, 그럼? 머리가 있으면 조금이라도 생각을 해 봐.”

“기분은 나쁘지. 하지만 나는 화는 내지 않아.”

그래, 너 잘났다. 무시하려는 내게 레이프는 산뜻하게 웃었다.

“다시는 그런 일을 벌이지 못하게 복수를 하지.”

얼굴과 말이 조금도 매치가 되지 않는 상황에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버벅거렸다.

“그럼 뭐, 너한테 복수라도 하란 소리야?”

“세이딘, 네 기분이 그렇게 해서라도 풀린다면 그래야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레이프를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내 잘못이다. 말이 안 통하는 놈을 상대로 정상적인 걸 바랐으니.

“복수고 자시고 그냥 나는 너랑 엮이고 싶지 않아, 데스티니. 이런 대화도 하고 싶지 않고.”

그러니 여기까지 말했으면 좀 알아서 사라져 줄래?

하지만 이런 말을 들을수록 나를 바라보는 호박색 눈동자는 밝게 빛났다.

‘제정신인가?’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레이프가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해 보면 슬프게도 금방 납득이 갔다.

한참을 말없이 레이프를 바라보던 나는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싸움조차 그에게는 대꾸가 되니 안 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나랑 말하지 않기로 한 거야?”

다행히도 레이프는 내 의도를 잘 파악해 줬다.

‘알았으면 더 말을 붙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나는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하염없이 스쳐 가는 풍경을 지켜보았다.

언뜻 보기에 아무 생각 없이 밖을 바라보는 것 같았지만, 도주할 때 어느 길로 가야 좋을지 살피는 것이었다.

“알았어, 세이딘. 네가 원한다면 나는 조용히 있을 수밖에.”

내가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자, 레이프는 어깨를 으쓱이며 같이 침묵을 지켰다. 광장으로 가는 시간이 영원 같았다.

“으, 울렁거려….”

마침내 광장에 도착한 나는 새파란 얼굴로 마차에서 내렸다.

무료하고 어색한 공기를 견디기 어려워하던 차에 앤이 준 빵을 떠올리곤 먹은 것이 화근이었다.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먹은 탓인지 평소에 잘 하지도 않던 멀미를 하기 시작하더니 지금에 이르렀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제가 운전이 미숙한 탓에…. 괜찮으세요?”

마부인 브라운이 안절부절못하며 내게 물었다. 걱정하는 건 그뿐만이 아닌지, 호위로 함께 따라온 필립 경까지 안쓰러운 시선을 보냈다.

“아냐, 움직이는 데서 먹으니까 안 좋았던 것뿐이야.”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아까 앤한테 했던 말 들었겠지만 난 괜찮아. 그러니 각자 볼일들을 보도록 해. 브라운은 집에 동생이 아프다고 했잖아? 돌아갈 때는 마부를 불러 갈 테니 나온 김에 며칠 푹 쉬고 오도록 해. 아버지껜 내가 말씀드릴게.”

동생 문제를 걸고넘어지자 브라운은 크게 망설이더니 곧 고맙고 죄송하다며 고개를 푹 숙였다.

허허허, 정직한 청년의 감사에 마음이 찔리는구나.

“그럼 저는….”

“필립 경도 마찬가지야. 오늘은 날 호위하러 나온 게 아니고 휴가차 나오는 김에 에스코트하는 걸로 약속했잖아.”

그러나 그웨니르 가문에 충성심이 깊은 필립 경은 고작 이 정도로 납득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힐끗 레이프를 바라보았다. 이제 다른 사람 눈에도 보이게 된 그는 살아 있는 마법의 바이올린으로 칭송을 받고 있었다.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지.

“그리고 데스티니가 있잖아. 마법의 바이올린이 함께 있는데 무슨 일이 생기겠어?”

그러자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걱정을 내비치던 필립 경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 세계 사람들은 어떻게 된 게 마법의 바이올린이란 말만 들으면 뭐든 납득해?

“그렇다면 데스티니 님, 세이딘 아가씨를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마. 나와 함께 있는 한, 세이딘은 안전할 테니까.”

그걸로 안심했는지 필립 경은 깊게 고개를 숙인 뒤, 며칠 뒤에 보자는 말과 함께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또다시 둘만 남은 상황이 되었지만 나는 레이프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보다 중요한 건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속을 달래는 것이었다.

“흐아…. 살 것 같다.”

광장 분수 근처의 카페에 자리를 잡은 나는 한숨을 터뜨렸다.

물이 조금 튀는 탓에 잘 앉지 않는 위치였지만 속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그쯤이야 아무렇지 않았다.

“오늘은 무슨 일로 밖에 나온 거야?”

속을 달랠 차를 주문한 뒤, 한참 분수를 보며 한숨을 돌리고 있던 중, 레이프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아직도 유효하기 때문에 대꾸할 생각은 없었다. 

쪼로록!

그러나 어쩐지 거슬리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틈에 시킨 건지 레이프는 어느새 오렌지 주스를 받아 마시고 있었다.

‘빨대도 있구나…?’

여기가 게임 속이라는 걸 다시금 느끼는 한편, 입에서 튀어 나간 말은 결코 곱지 않았다.

“뭐야 그거?”

“오렌지 주스지. 너도 마실래, 세이딘?”

“아니, 내 말은 오렌지 주스를 어떻게 마시고 있냐는 거야.”

돈이 어디서 나서? 그리고 마실 수 있는 거야?

“돈이라면 그웨니르 백작이 줬고, 이 몸이 되고 나서부터는 원하면 먹고 마실 수 있게 됐어. 물론 자는 것도 가능해.”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제 더 이상 내 속을 읽지 못할 텐데 어떻게 안 거지?

“세이딘, 잊었어? 넌 얼굴에 다 드러나. 그래서 알기 쉽고.”

“하하하….”

메마른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이런 더러운 세상. 조금은 감추고 살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면 좀 좋아?

나는 애써 모른 척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아버지가 왜 너한테 돈을 줘?”

“널 잘 부탁한다며 필요한 일이 생기면 사용하라던데?”

부탁할 사람한테 부탁해야죠, 아버지!!

저택에 돌아가면 곧장 아버지께 한마디 해야겠다. 이건 뭐,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는 거랑 뭐가 달라?

“그래서 뭐 때문에 나온 건지는 안 알려 줄 거야?”

처음으로 돌아간 질문에 나는 그제야 저놈과 말을 섞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 또 말려들었어.

밀려오는 허탈한 마음을 꾸역꾸역 집어넣으며 나는 짧게 대꾸했다.

“네가 알 바 아냐.”

“흐음.”

짧은 탄식을 흘린 레이프는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 쪼로록 하는 소리가 이 상황과 굉장히 어울리지 않았다.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한 가지만 충고할게.”

“그래, 한번 해 봐.”

어차피 하지 말라고 해도 할 거잖아?

눈에 불을 켜고 쳐다보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겠다는 듯 레이프가 푸스스 웃었다.

그러나 웃음은 얼마 가지 않아 진지하게 바뀌었다.

“허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허튼 생각이라니?”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을 하려는지 아는가의 여부를 떠나 레이프의 단어 선택이 불쾌했다.

“기분 나빴다면 정정할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충동적인 행동은 하지 말라는 거야.”

아까보다 훨씬 풀어진 내용이었지만 기분이 나쁜 건 마찬가지였다.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는데?”

“내키지 않는다면 듣지 않아도 상관없어. 하지만 내가 널 걱정한다는 건 알았으면 해.”

“걱정한다고?”

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걱정을 한다는 놈이 그런 일을 벌여?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제 네 말은 못 믿겠어, 데스티니.”

그렇게 말하면 내팽개친 신뢰가 돌아온다고 생각하는 건가?

괘씸한 마음에 나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한참 전에 나온 홍차는 이제 김조차 나지 않았다.

레이프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라면 그렇게 말할 거라 생각했어. 하지만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이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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