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5장. 이 게임, 탈주하겠습니다 (1)
집에 돌아온 나는 곧장 소파에 몸을 뉘었다. 하루에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던 탓에 머리가 욱신거렸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레이프의 얼굴이 불쑥 시야에 들어왔다.
음, 아직도 어려진 모습은 적응이 좀 안 되네.
아니나 다를까 평소보다 앳된 목소리가 내게 물었다.
“세이딘, 괜찮아?”
“응, 괜찮아.”
너만 조용히 있어 주면.
레이프에게 휘둘리는 건 늘 있는 일이었지만 오늘같이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적은 처음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동안 쌓여 있던 온갖 감정이 엉킨 실타래처럼 뒤죽박죽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레이프와 시선을 맞추기 싫어서 일부러 초점 없이 멍하니 있는 것도.
그럼에도 레이프는 내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내 알 바냐!
아니, 기왕 그러고 있는 김에 저놈도 좀 답답해 봤으면 좋겠다. 지금껏 자기 맘대로 하고 싶은 걸 맘껏 했으니 그 정도는 바랄 수 있잖아?
한참을 멍한 채로 버텼을 때였다. 결국 레이프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일이 많았으니 좀 쉬어. 방해하지 않을게.”
나는 무성의하게 고개를 한 번 까딱였다.
레이프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고 문소리가 들렸다.
“쟤 지금 나간 거야…?”
사람들한테 보인다며? 뭐라고 설명하려고?
생각지도 못한 일에 당황했지만 곧 신경을 거뒀다. 그건 레이프의 몫이지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그 대신 나는 머리를 부지런히 돌리기 시작했다.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보자면 단테와 레이프는 자신들의 목적을 내게 숨기는 것도 모자라 나를 이용했다. 물론, 계약사항에 위반되는 일은 아니었지만, 신뢰는 완전히 박살 나 버렸다.
다시 생각해도 굉장히 기분 나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기적인 놈들. 못 믿으면 차라리 그렇다 말을 하란 말이야!’
나는 생각이 뻗어 나가려는 것을 막았다. 이 이상 생각해도 이미 지난 일이었다. 더는 실망한 일을 곱씹을 필요는 없었다.
내가 지금 생각해야 할 것은 앞으로에 대한 것이었다.
“도망간다고 생각한 건 좋은데, 구체적으로 어떡해야 하지?”
데스티니의 마법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나를 향해 맹목적인 호의를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아무도 모르게 도주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티엘이 알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단연 이티엘이었다. 그는 제르아일의 황제니 인력을 총동원해서 전국을 샅샅이 뒤져 날 찾을 것은 불 보듯이 뻔했다.
그뿐인가. 린든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그라면 각지에 퍼져 있는 상단 지부를 이용해서 날 찾을 수 있겠지.
‘단테는….’
글쎄, 자진해서 나를 찾아 나설지는 의문이지만 레이프의 말이라면 두 팔 걷고 찾아 나설 거였다. 혹시 모르지, 그런 일을 사전에 방지하려고 이미 내게 추적마법을 걸었을 수도 있는 거고.
“아이고, 머리야….”
어려울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하나하나 따져 보니 쉽지 않은 상황이구나.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었다.
욜로를 하고 싶다고 백날 외친들, 저놈들과 같이 갈 수 없다는 건 확실했으니까.
그러니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쳐서 여주인공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아니면 여주인공을 직접 찾아 나서는 방법도 있고.”
마침 단테가 준 크리스털도 있겠다, 시도해 볼 가치는 충분했다.
어두워지려는 생각을 떨친 나는 다시 탈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우선 필요 경비는 모아 둔 용돈을 사용하고, 혹시 모를 상황이 생길 수도 있으니 장신구는 전부 팔아 둬야지. 그리고 마법의 가방이 있어도 혹시 모르니 일단 짐은 간소하게.”
차근차근 해야 할 일을 생각하다 보니 점차 머릿속이 맑아지며 생각에도 좀 더 속도가 붙었다.
“그러면 우선 내일 당장 나가서 마부를 수배해야겠어. 출발은 오전에 하는 걸로 하고.”
보통 도주라고 하면 모두가 잠든 틈을 타서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건 너무 뻔했고 추적도 따라붙기 좋았다. 그러니 외출하는 척 자연스럽게 도망을 치는 편을 택했다.
얼추 도주 계획의 틀은 다 짰지만 여전히 문제는 레이프를 비롯한 공략캐들이었다.
‘시스템창!’
나는 눈앞에 떠오르는 시스템창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혹시나 저놈들을 따돌리는 데 좋은 방법이 있을까 해서였다. 지금껏 시스템에 휘둘려 달성한 이벤트가 여럿이었다. 그동안 받은 보상 중, 써먹을 만한 것이 있을지도 몰랐다.
‘어디 보자….’
나는 아이템 목록을 꼼꼼히 살폈다.
무엇이든 자를 수 있는 단검, 마법의 가방, 가발, 얼마 전에 처음으로 사용하게 된 철벽 에메랄드와 진실의 거울까지.
제법 다양하게 모아 뒀지만 아쉽게도 이름만 봤을 때 쓸 만한 건 보이지 않았다.
‘아, 어떡하지?’
도망칠 생각으로 타오르던 의욕이 맥없이 추락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생각으로만 그치고 말지도 몰랐다.
그러던 중 한 곳에 눈길이 갔다. 내 이름 밑에 있는 숫자였다.
[20000H]
‘그러고 보니 이런 게 있었지?’
종종 보상으로 나오는 걸 발견했지만 쓰임새를 몰라 크게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무심코 그 숫자를 눌렀다. 용도를 모르니 건드려라도 보자는 심산이었다.
“어라?”
숫자 위로 뜨는 알림창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축하합니다! 일정 이벤트를 진행한 보상으로 상점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상점? 그런 게 있었어?’
오늘 참 여러 가지로 놀라네.
생각해 보면 그리 놀라울 건 없었다. 여기저기서 나타나는 공략캐들을 정신없이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이런 것 하나하나 확인할 겨를이 있었을 리가 없었으니까.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지울 수 없었다.
‘뭐, 지금부터라도 부지런히 쓰면 되지!’
알림창을 끄자 시스템창의 메인에는 지금껏 없던 상점 아이콘이 생겨났다.
별생각 없이 상점에 들어간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껏 왜 이런 게 없었나 싶을 정도로 허공을 가득 메운 아이템은 종류가 각양각색이었다. 오죽하면 하루에 다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행히도 분류별로 정렬할 수 있는 메뉴가 있어서 나는 분류별로 하나하나 들여다보았다.
‘정말 온갖 것이 다 있네.’
호감도를 올리는 데 도움을 주는 아이템부터 시작해서 스트레스를 완화시켜 주는 간식까지 정말 없는 것이 없는 상점이었다.
아이템의 이미지와 설명을 꼼꼼하게 읽어 가던 나는 문득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하트 모양에 푸른 보석이 박힌 목걸이였다.
[엑스트라의 휴일]
모든 것에 지친 당신, 어디든 떠나라!
▷가격: 2000H
▷사용법: 몸에 착용.
▷효과: 데스티니를 비롯한 모든 공략 대상의 관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굉장히 직설적인 이름이지만 이 망할 놈의 게임과 공략캐들에게서 도망치기 딱 좋은 아이템이 아닐 수 없었다.
가격 또한 내가 가진 돈으로 얼마든지 구매 가능한 수준이었기에 절로 혹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괜찮을까?’
지금까지 시스템은 결코 내게 이로운 상황을 만들어 준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오롯이 나를 노린 듯한 아이템은 오히려 무슨 꿍꿍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럼 그렇지.’
다시 한번 아이템의 설명을 읽어 본 나는 피식 웃었다.
설명 가장 밑줄에는 작은 글씨로 주의점이 적혀 있었다.
[3일 이상 사용 시, 부작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부작용이라는 단어에 불안이 스쳤다.
‘어떤 부작용이지?’
기왕 주의를 줄 거면 그런 것까지 적어 줬으면 좋았을 텐데.
혹시 몰라 이곳저곳을 뒤져 봤지만 부작용에 대한 어떤 정보도 알 수 없었다.
‘고민되네.’
아무리 필요한 거라도 부작용이 있으면 아무래도 고민되기 마련이었다.
한참 그렇게 끙끙대던 나는 결심을 굳혔다.
‘그래, 인생은 실전이지!’
나는 곧장 구매를 눌렀다. 한번 결정했으면 신속하게 행동하자는 것이 신조였다.
“후후후후….”
얼마나 좋은지 입에서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부작용이 껄끄러웠지만 그럼에도 3일이나 공략캐들과 엮이지 않는다는 건 행복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 시간이면 제르아일 제국을 벗어나기에 충분했고.
나는 혹시나 싶어 그 외에도 쓸모 있는 아이템이 있는지 상점을 뒤졌다.
아니나 다를까, 도망갈 때 필요해 보이는 것들이 제법 있었고, 그중에서는 엑스트라의 휴일의 효과를 좀 더 오래 지속되도록 도와주는 보조 아이템도 있었다.
“정말 보람찬 쇼핑이었어!”
아까보다 훨씬 가득 찬 아이템 창고를 바라보며 나는 웃었다.
“이 정도면 도망가서도 문제없겠지?”
문제가 있으면 곤란했다. 그래선 안 될 정도로 다량의 아이템을 사 뒀으니까.
이제 남은 것은 도망 자금을 준비하고 마부를 구하는 것뿐이었다.
“아, 기대된다!”
두근거리는 마음과 함께 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조금만 있으면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기뻤다.
* * *
“아가씨, 괜찮으시겠어요?”
걱정스러운 질문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대도, 앤. 몇 번이나 물어?”
“하지만… 아가씨는 식사를 안 하시면 못 움직이시잖아요. 가다가 쓰러지시면 어떡하려고요?”
어쩐지 마음이 뜨끔했다.
모름지기 귀족가의 영애라면 새 모이만큼의 식사를 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과거에 잘 먹지 못한 반동인지 이 세계에 오면서 나는 삼시 세끼 고기를 곁들이는 걸로 모자라 매 식간마다 디저트까지 챙겨 먹지 않으면 안 되는 몸이 되고 말았다.
그걸 잘 아는 앤은 아침도 거르고 외출을 하겠다는 나를 걱정하는 거고.
“걱정하지 마, 앤. 광장에 도착하는 대로 밥부터 먹고 볼일을 볼 거야.”
“그런 거면 드시고 출발해도 되잖아요.”
“그러면 늦어!”
고기가 구워져 나오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집에서 먹는 식사는 상당한 대기 시간을 자랑했다. 하지만 광장에서라면 길거리 음식도 있고 하니 금방 요기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미 좀 먹었는걸.’
지난번, 상점을 둘러볼 때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스트레스에 도움이 되는 요리도 몇 가지 사 두었더랬다. 그중에서도 떡볶이는 원래 세계 이후로 단 한 번도 먹지 못한 것이어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뚝딱 해치웠다.
결국 내 의지를 꺾지 못한 앤은 한숨을 내쉬며 바구니를 건넸다.
“후우, 알았어요. 오늘 식사로 나올 예정이었던 빵인데 혹시 몰라서 챙겨 둔 거예요.”
“역시 앤! 꼼꼼해!”
나는 앤을 한번 꼭 껴안고는 서둘러 마차에 올랐다.
“얼른 볼일 보고 올게!”
“오시면 무슨 일인지 알려 주시기예요!”
나는 그저 웃으며 창밖으로 멀어지는 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줬다.
‘미안, 앤.’
하지만 도주 준비를 한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어?
찔림과 함께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뒤로하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