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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25)화 (25/122)

제25화. 4장. 여주인공을 찾아서 (8)

그럼 그렇지.

너무 뻔해서 놀랍지도 않았다.

내가 레이프에게 말을 거는 순간부터 그들은 줄곧 흉흉한 기세를 내뿜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의외인 건 레이프였다.

내가 봐 온 그라면 좀 더 능글맞게 굴면 굴었지 이렇게 정색하지는 않을 터였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쳐 갔다.

‘호감도 때문인가?’

그거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조금 전 연주의 여파로 이 게임의 공략캐들은 전부 단숨에 호감도가 올랐다.

레이프 또한 이벤트 달성으로 호감도가 올랐으니 다소 행동이 바뀌어도 이상할 것 없었다.

대신 내가 죽어날 뿐이지.

아니나 다를까 레이프에게 정곡을 찔린 이티엘과 린든은 언짢은 기색을 풀풀 풍기고 있었다.

아니, 너무 부드럽게 말했다. 정정해야지.

“마치 그웨니르 영애와 깊은 관계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군.”

성군이라는 호칭에 어울리지 않게 이티엘은 맹수처럼 위협적으로 대꾸했고.

“그러게 말입니다, 폐하. 아무리 데스티니 님이라고 해도 지금 하신 말씀은 썩 유쾌하지 않군요. 전 단지 진심으로 궁금한 걸 물었을 뿐인데 말이죠.”

온화하고 배려심이 깊어 치유캐라 불리는 린든도 말 한마디마다 가시가 돋쳐 있었다.

으음, 저놈들하고 얽히는 것만큼이나 싫은 분위기인걸?

“단테, 어떻게 좀 해 봐요.”

나는 단테의 어깨를 흔들었다. 여전히 레이프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로 있던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보면 몰라요? 지금 싸우기 일보 직전이잖아!”

“레이프 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뜻이 있으시겠지.”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아무래도 단테에게는 나에 대한 호감보다도 레이프를 향한 동경이 훨씬 큰 모양이었다.

‘저놈들은 나 좋다고 서로 으르렁대느라 바쁜데 말이야….’

나는 허허롭게 웃으며 곧장 미묘한 마음을 추슬렀다. 온갖 의미 부여하며 나한테 매달리느니 차라리 다른 놈의 광신도가 되는 게 훨씬 나았다.

“그만! 거기까지.”

결국 나만이 자신을 구할 수 있다는 결론에 다다른 나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세 사람 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황제 폐하, 그리고 브누아 영식.”

내 부름에 이티엘과 린든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나는 온순해진 그들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이 마탑에 온 건 제 연주를 듣기 위해서예요. 그렇죠?”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들이 시인했으니 내가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그러면 이미 목적은 충분히 달성하셨으니 돌아가셔야겠어요.”

이티엘과 린든의 눈이 커졌다. 내가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말할 줄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무례한 발언이긴 했다. 평소라면 몸을 사리느라 절대 하지 않을 말이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 이렇게 하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이 진흙탕이 계속될 것 같아서 싫었다.

‘협상!’

마음속으로 스킬을 부르자, 여느 때와 같이 공략캐의 호감도가 떨어질 수 있다는 주의사항과 함께 선택지가 나왔다.

선택지는 한결같이 극단적이었다.

1. 이후에 설명할 테니 절 생각한다면 기다리세요.

2. 저에게 관심 끄시죠?

‘후자로 고르고 싶다…!’

하지만 섣부른 충동이 괜한 호감을 더 사게 만들 수도 있어 나는 꾹 참고 첫 번째 선택지를 골랐다.

“절 생각한다면 기다리세요. 자세한 건 이후에 설명할 테니까요.”

이티엘은 눈에 띄게 실망한 기색이었고, 린든은 얼굴에 떠오른 복잡한 감정을 어떻게든 추스르려 했다.

그럼에도 호감도는 아무 반응도 없는 걸 보니, 이대로면 협상 실패로 갈 가능성이 높았다.

‘그 꼴은 못 보지.’

호감도도 깎고 내 의견도 밀 수 있는 유일한 기술인데.

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럴 때 먹히는 건 역시 감정 호소였다.

“힘들어서 그래요. 저도 무슨 상황인지 좀처럼 정리가 안 돼서요.”

최대한 지치고 시무룩해 보이는 표정을 짓자, 그들은 그제야 내 말을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우이이잉!

마침내 칭얼대는 듯한 알림음과 함께 두 사람의 호감도가 떨어졌다는 문장이 허공에 떠올랐다.

속으로 안도를 하고 있을 때, 한풀 꺾인 이티엘이 한숨 섞인 대답을 했다.

“알겠다, 영애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오늘은 물러나도록 하지. 대신 이후에 꼭 제대로 설명해 주길 바라네.”

“물론이죠.”

대답과 함께 린든을 보자, 그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무리해서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웨니르 영애. 대신 필요하다면 언제든 이야기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무척이나 배려 깊은 어투였지만, 결국 린든의 말도 이티엘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고마워요, 브누아 영식.”

순순히 돌아가는 그들은 뒷모습에서조차 아쉬움이 뚝뚝 떨어졌다.

‘우선 마법에 미친 놈들은 보내 버렸고.’

남은 건 대마법사와 대마법사 앞에 선 대마법사였다.

괴짜들을 상대로 하는 대화는 생각만으로도 까마득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이 두 놈은 내가 버젓이 앞에 있는데도 뒤에서 몰래 일을 벌이고 있었으니까.

‘레이프야 그렇다 치지만 단테에게 속다니….’

공략해 본 상대라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내가 바보였다. 연애 이벤트가 발생하고 본 적 있는 대사가 오갔지만, 내가 알고 있는 공략캐들의 정보는 결국 여주인공과의 연애를 기반으로 했다.

그러니 그 대상이 나로 바뀐 지금, 많은 것이 그때와 달라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여주인공이 와도….’

문득 스친 불길한 마음에 나는 서둘러 머리를 저었다. 가뜩이나 눈앞에 있는 일로도 벅찬데 이 이상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왜 그랬어요?”

많은 것들을 단 한 번에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었다.

단테는 그런 나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나, 세이딘? 나는 데스티니의 봉인을 푸는 연구를 했고, 그걸 이룬 것뿐이다.”

“계약을 어겨 가면서요?”

“계약을 어겼다? 어떤 부분을 말이지?”

울컥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지만 나는 최대한 참으며 말했다.

“데스티니로부터 해방되는 걸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아, 그것 말인가. 물론 잊지 않고 있다. 단지 우선순위가 달라졌을 뿐이지.”

단테는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내게 건넸다. 아기 주먹만 한 크기의 크리스털이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네가 찾던 자의 생명력을 새겨 뒀다.”

그것만으론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 단테를 쳐다보자, 되돌아오는 것은 의문 섞인 시선이었다.

보다 못한 레이프가 설명을 거들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야지.”

그제야 문제를 알아차린 단테는 입을 열었다.

“네가 연주하는 동안 추적을 해 봤지만, 일정 거리를 쫓으면 생명력의 흔적이 사라지더군. 그래서 이후에 찾으러 갈 수 있도록 만들어 뒀다.”

모든 설명을 듣고 난 뒤, 부글부글 끓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몰려오는 안도감에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 거라면 진작 말해 줘야죠! 하마터면 배신했다고 생각할 뻔했잖아요.”

이미 그렇게 생각했지만.

단테는 그런 나를 의문스럽게 바라봤다.

“마법사의 말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러니 약속의 증표도 줬고.”

단테가 가리킨 것은 내 손에 끼워진 마탑 전용 순간이동 반지였다.

이 또한 처음 듣는 말인지라 황당했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어찌 됐건 단테에게 뒤통수를 맞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으니까.

이제 남은 문제는 단 한 가지였다.

“데스티니.”

“응, 세이딘.”

창가에 몸을 느슨하게 기대고 있던 레이프가 곧장 내게 반응했다.

소년이 되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그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쪼개느라 바빴다.

덕분에 나는 더욱 얼굴을 찌푸릴 뿐이었다.

“넌 지금 웃음이 나오니?”

“네가 날 불렀잖아.”

“시답잖은 소리 하지 말고. 내가 왜 불렀는지 알고 있잖아? 당장 설명해.”

단호한 내 시선에 레이프가 조금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곤 호박색 눈동자를 아름답게 접었다.

“그래, 좋아. 궁금하다면 뭐든 답해 줄게.”

그렇게 말하면 사양하지 않아야지.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나는 팔을 들어 올려 얇은 금팔찌를 가리켰다.

“이거 기억나?”

“당연하지, 너와 나의 첫 증표인데.”

또, 또. 사람들이 오해할 말만 골라서 한다.

아니나 다를까 단테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호감도보다 동경이 앞서는 그는 내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하, 기가 막혀서. 잘한 게 뭐 있다고 그런 눈으로 쳐다봐?’

역으로 단테의 멱살을 잡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나는 말을 이었다.

“그럼 여기에 적힌 내용이 무엇인지도 기억하겠네.”

“‘데스티니는 세이딘 그웨니르 외의 선택받은 자가 나타나면 세이딘 그웨니르에게 상관하지 않는다. 그때까지 세이딘 그웨니르는 데스티니의 봉인을 푸는 것을 돕는다.’”

태연하게 술술 계약 내용을 읊어대는 모습을 보니 더 열 받는다.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 멋대로 행동을 해?! 마법사의 약속은 생명이라며!”

“그래서 조금도 어기지 않았잖아. 잘 생각해 봐.”

레이프는 씩씩거리는 나를 달래듯이 속삭였다. 한차례 속에서 화가 화르륵 올라오려던 중, 머릿속에 계약 내용이 스쳐 갔다.

‘선택받은 자가 나타나면.’

내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던 레이프의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어렸다.

“그렇지?”

능글맞은 물음에 나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정신이 아득해졌다.

‘안일했어.’

때가 되면 여주인공이 나타날 거라 확신했다. 이곳은 각자가 역할을 가지고 있는 게임 속 세계였으니까.

그러니 나같이 이름도 등장하지 않는 엑스트라는 중요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저들에게 난 여주인공이었다.

그러니 이 자리를 대신할 사람이 있다고 해도 믿지 않은 거고.

여기까지 와서야 깨달았다는 충격과 스스로를 향한 자책이 이리저리 얽혀들었다.

“다른 선택받은 자라면 얼마든지 찾아도 돼, 세이딘. 하지만 나는 그것까지 도울 생각은 없어. 그저 지켜볼 뿐이지.”

“하….”

그래서 그렇게 응원을 한다고 한 거였구나.

그 대신 레이프는 조용히 나를 움직여 봉인을 풀 생각을 했던 거고.

머릿속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퍼즐이 이제야 완전히 제 모습을 드러낸 것 같았다.

해소된 궁금증과 달리, 내 마음은 여기저기서 위태롭게 삐거덕거렸다.

“너무 서운해하지 마, 세이딘. 넌 내 운명이야. 그러니 앞으로 남은 봉인도 같이 해결해 나갔으면 좋겠어.”

뚜둑.

레이프의 한마디에 결국 내 안에서 무언가 끊어져 버렸다.

지금까지 믿어 왔던 모든 것들이 무너진 자리에 뿌리내린 열망은 단 한 가지.

‘도망치자.’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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