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4장. 여주인공을 찾아서 (7)
내 말에 공략캐들이 눈을 빛냈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제각각이었다.
이티엘은 나를, 단테는 데스티니를 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린든만큼은 나와 데스티니를 번갈아 가며 보고 있었다.
‘응?’
그 모습이 조금 의아했지만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마법에 매료된 이상 데스티니와 나, 어느 쪽에 관심을 둬도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부담스러운 시선들 속에서 심호흡한 나는 레이프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호박색 눈동자가 달을 그렸다. 내가 연주할 때마다 힘을 되찾고 있으니 레이프에게는 이 상황이 좋아 죽겠지.
‘에라이, 나쁜 자식아.’
나는 활을 드는 시늉을 하며 레이프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들었다. 매번 끊임없이 경계를 해서 사고가 마비된 탓인지 개구리가 될 거라는 두려움은 더 이상 들지 않았다.
심호흡과 함께 바이올린에 얹어진 활이 움직였다.
자의가 아닌 움직임에 익숙해진 나는 흐름에 몸을 맡겼다.
데스티니에서 흘러나오는 음색은 자연스러운 손놀림이 무색하리만치 끔찍했다. 이제는 이마저도 일상이 되어 버렸다.
반면, 이티엘과 린든은 경건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연주에 심취해 있었다. 문득 마법의 필터링으로 듣는 연주가 얼마나 대단한지 궁금해졌다.
필터를 조금도 거치지 않은 단테는 끔찍한 소리를 듣는 와중에도 흔들림 없이 데스티니에 마법을 구현하고 있었다. 그토록 말하던 생명력을 추적하는 것이 분명했다.
―또로롱!
[이티엘의 호감도가….]
[린든의 호감도가….]
데스티니의 연주가 이어지는 내내 이티엘과 린든의 호감도는 끊임없이 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이날만을 기다린 것 같은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단숨에 200을 넘기는 걸 보면서도 나는 단테의 사인이 있을 때까지 연주를 멈출 수 없었다.
“거기까지.”
단테가 나를 불러 세운 것은 가만히 있어도 양팔이 덜덜 떨릴 때가 돼서였다.
“어떻게 됐어요?”
온몸을 덮쳐 오는 근육통과 함께 나는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교향곡만큼이나 긴 연주를 끝낸 나는 이제 데스티니를 켜지 않고 있는 것이 더 무서웠다.
호감도 때문이었다.
[이티엘: 310]
[린든: 260]
‘와…. 이게 되네?’
이제 놀라움을 넘어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게임을 할 적엔 저 정도 호감도를 올리려면 데스티니를 켜는 것 외에도 죽어라 친목질을 해야 했으니까.
허탈감과 함께 나는 시스템창을 닫았다. 저걸 보고 나니 여주인공의 행방이 더욱더 간절했다.
“단테?”
대답이 없기에 한 번 더 부르자, 단테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드디어….”
하늘을 연상시키는 푸른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어 한 번 더 불러야 하나 고민을 할 때였다.
“성공이야.”
“은의 현자,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둘만 알아듣는 대화가 불쾌하다는 듯 이티엘이 끼어들었지만 지금 내게는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만큼 단테의 한마디가 가져온 의미는 굉장히 컸다.
―또로롱!
[시크릿 이벤트 ― 고대 대마법사의 봉인(2) 클리어]
봉인을 푸는 실마리를 다시 한번 찾아낸 당신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보상 : 단테의 호감도 100 증가 / 데스티니의 호감도 150 증가 / 진실의 거울
이벤트 달성의 알림과 함께 단테와 레이프의 호감도가 쑥쑥 올랐다.
이로써 그들도 이티엘과 린든에 견주어도 지지 않는 호감도를 자랑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지 자세히 좀 말해 봐요.”
내 재촉에 단테는 웃었다. 종종 그가 웃는 모습을 보긴 했지만, 지금만큼 시원하고 해맑게 웃는 건 처음이었다.
“저길 봐라, 세이딘.”
단테의 시선이 향한 곳을 따라가던 나는 멈칫했다.
그가 가리킨 창가는 정확히 레이프가 있는 자리였다.
‘설마… 단테도 레이프를 볼 수 있게 된 건가?’
대체 어떻게?
하지만 창가에 시선이 닿는 순간, 더욱 놀라운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데…스티니?”
놀란 나머지 흘러나온 목소리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떨렸다.
“응, 세이딘.”
그러자 돌아오는 대답은 무척이나 신속했다.
그 모습에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게 대답을 한 장본인은 어쩐 일인지 어려져 있었다. 그것도 많이 봐줘야 열다섯 정도의 나이로.
“너 회춘했니?”
“뭐?”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게임 속에 빙의도 하는 마당에 바이올린에 봉인된 마법사가 어려지는 것 정도가 뭐가 대수라고.
내가 어떻게든 납득하려고 하는 반면, 레이프는 그런 나를 굉장히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세상에 별 희한한 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한 시선은 곧 부들부들 떨리더니 곧이어 호를 그렸다.
“아하하하!”
기습적인 박장대소에 나는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뭐가 그렇게 웃긴진 모르겠지만 내 질문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데스티니, 너 혹시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이게 된 거야?”
유감스럽게도 레이프는 웃느라 정신이 없어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대신 그 앞에 무릎을 꿇는 단테가 답을 말해 주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마법의 바이올린 데스티니 님.”
굴러다닐 것처럼 웃던 레이프가 웃음을 멈추고 단테를 바라보았다. 소년처럼 해맑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얼음처럼 차갑기만 했다.
그 가운데서도 단테는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한마디를 더했을 뿐이었다.
“아니면 레이프 유클리드 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을까요?”
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세상에, 맙소사, 실화냐?’
대신 온갖 감탄사가 머릿속에 갓 뽑아 올린 땅콩처럼 줄줄이 따라올 뿐이었다.
단테가 저렇게 버젓이 보고 있다, 그 뜻은….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군. 대답하라, 그웨니르 영애. 지금 이게 다 무슨 일이지? 그리고 저 소년은 누구고?”
‘역시.’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이티엘의 냉랭한 눈동자는 정확히 레이프에게 꽂혀 있었다.
“저 또한 묻지 않을 수 없군요, 그웨니르 영애. 이게 어떻게 된 건지 꼭 해명을 듣고 싶습니다.”
줄곧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린든마저도 강경하게 나왔다.
그들의 요구는 타당한 것과 별개로 억울했다. 지금 누구보다 이 상황이 뭔지 알고 싶은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
“후우….”
밀물과 썰물처럼 답답한 마음을 심호흡으로 달랜 나는 단테의 어깨를 잡았다.
“인사는 그만하면 됐고.”
올려다보는 푸른 시선과 마주한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미소 지었다.
“지금 상황 좀 설명해 보실래요?”
* * *
망했다.
아니, 망하다 못해 뭣 됐다.
단테의 설명을 듣는 내내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은 오로지 그뿐이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건 추적마법의 대상이 사실은 데스티니였다고요?”
“그렇다.”
와, 정말 미치고 환장하겠네. 거짓말을 해 놓고 뭘 저렇게 당당해?
나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꾹꾹 누르며 레이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넌 그걸 알고 있었고?”
“응.”
미친 자 같으니, 왜 이렇게 대답이 빨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온한 두 사람을 보며 나는 명치가 답답해졌다.
그러나 이야기를 전부 들은 지금, 이제야 확실해졌다.
그동안 레이프가 잠잠했던 것은 단테와 세운 계획에 차질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한 가지 네가 오해하는 게 있다, 세이딘.”
말을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라 듣고만 있자, 단테가 말을 이었다.
“내가 먼저 레이프 님의 존재를 눈치챘다. 레이프 님께서 먼저 접근한 게 아니라.”
거 참, 누가 보면 둘이 사귀는 줄 알겠어.
“단테의 말이 맞아?”
내 물음에 레이프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나도 놀랐어. 힘을 되찾을수록 날 볼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건 몰랐거든.”
“…정말로?”
“정말이야. 내가 거짓말을 해서 뭐 하겠어, 나의 세이딘.”
또 저러고 앉아 있네.
숨기던 일이 전부 드러나게 된 레이프는 아까부터 거침없이 낯간지러운 호칭만 골라 부르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매초마다 왈칵 미간을 찌푸렸다. 가뜩이나 변한 모습에 적응하기 힘든데 저런 식으로 가볍게 구니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데스티니.”
“응.”
“내가 지금 기분이 많이 안 좋거든. 그러니 선은 확실히 지켜 줬으면 해.”
안 그러면 어떻게 할지 모르겠으니까.
나는 경고 뒤로 이어지는 뒷말을 삼켰다. 이건 정말 정 안 되겠을 때나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지금은 그 정도의 최악은 아니니 아껴야 했다.
고맙게도 레이프는 내 낌새가 영 시원찮은 것을 깨달았는지 순한 양처럼 얌전해졌다.
“이제 그대들의 사정은 충분히 들었으니 질문을 해도 되겠나?”
정중한 물음과 달리, 나를 포함한 세 사람을 보는 이티엘은 사냥감을 기다리는 포식자처럼 고요하고 날카로웠다.
단테는 무표정으로 허락을 구하듯 레이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레이프는 대수로울 것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뭐,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 한번 들어는 볼게.”
“그대는 정말 데스티니인가?”
“맞아, 난 데스티니야. 네가 나라의 안정을 위해 그토록 원하던 마법의 바이올린.”
이티엘의 잘생긴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자신의 목적을 명확히 알고 있는 레이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이번에는 생각에 잠긴 이티엘 대신 린든이 물었다.
“에레즈 님께서 당신을 대마법사 레이프 유클리드라고 부르는 이유는 뭡니까?”
레이프는 빙그레 웃었다.
‘아. 화났다, 화났어.’
단테는 모르는 모양이지만, 레이프는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때문에 린든에게 저런 질문을 듣는 것 자체도 꽤나 불쾌하게 여기는 듯했다.
“린든 브누아였지, 아마?”
“제 이름은 어떻게….”
“네가 묻고 싶은 건 이런 의미 없고 형식적인 게 아닐 텐데?”
가벼운 어조였지만 그 안에 숨겨진 날카로움을 감출 수 없었다.
서늘한 레이프의 시선과 마주친 린든의 눈동자가 미약하게나마 흔들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레이프가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알고 싶은 건 내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세이딘 그웨니르와 무슨 관계인가잖아, 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