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4장. 여주인공을 찾아서 (6)
‘집착이라니, 갑자기 뭔…….’
좋지 않은 단어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돌발성 이벤트네 뭐네 하면서 기존과 상당히 다른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지만, 연애 이벤트와 흐름 자체는 원래의 <바이올린과 꽃미남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에 지금까지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하지만 지금 눈에 들어온 집착 모드라는 것은 원래 게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떤 일이 있을지 대충 짐작이 가면서도 알고 싶지 않은 그런 기분이었다.
“세이딘?”
어찌나 정신이 혼미했는지 단테가 부르는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서둘러 마음을 다잡으며 현실로 돌아왔다. 고개를 드니 은발의 미남이 숨결이 닿을 거리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나는 그제야 현 상황을 인지할 수 있었다.
“뭐, 왜, 뭐, 그,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가뜩이나 심란한데 넌 또 왜 그러니!
깜짝 놀라 아무 말이나 던진 나는 단숨에 안전거리를 벌렸다. 아직도 진정되지 않은 가슴이 벌렁거렸고, 얼굴에 도는 열기는 만지지 않아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단테는 조각상처럼 변함없는 표정이었다.
“불러도 대답이 없길래.”
참 간단명료한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래도 이 게임의 공략캐들은 불렀을 때 대답을 안 하면 얼굴부터 들이밀고 보나 보다. 주의해야지.
겨우 상황을 받아들이고 정리하나 싶었다.
“항상 느끼지만 넌 참 잘 놀라는군.”
얼굴로 입은 타격에 이어진 뜬금없는 감상은 내 머릿속을 헤집어 놓은 퍼즐처럼 만들었다.
‘침착해, 세이딘. 이 사람은 공략캐, 여주바라기, 임자 있는 몸이야.’
그리고 상대가 아무리 잘생겼어도 임자 있는 몸을 건들 만큼 나는 스스로의 분수를 모르지 않았다.
지금 보이는 현상이 전부 데스티니에 의한 것이라고 속으로 되뇌자, 멋대로 날뛰던 마음은 곧바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뜬금없던 단테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본 나는 그나마 가능성 있는 물음을 던졌다.
“어, 음…. 그거 칭찬이죠?”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단테라면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마법사였고 4차원이었다.
무엇보다도 칭찬이랍시고 저런 류의 말을 몇 번 했던 적이 있으니 이번에도 그러겠거니 했다.
“게다가 화를 잘 내지.”
음?
“짜증도 잘 내고.”
방금 전 생각은 취소다.
괴상한 칭찬은 1절이면 됐지 2절, 3절까지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왈칵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싸우자는 거죠? 아니면 당신 말대로 화나게 만들려고 하거나.”
“칭찬한 거다. 풍부한 감정표현은 다양한 가능성을 갖고 있으니까.”
사실 단테는 다 알면서 일부러 말을 저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닐까?
좀처럼 의심의 시선을 떨치지 못하는 내게 단테는 불시에 한마디를 던졌다.
“그래서 마음에 들어.”
“…네?”
너무 멀리 달려가 버린 결론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정신없이 눈을 깜박였다.
그런 나를 이해한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 위로 선명한 문장이 떠올랐다.
[단테의 호감도가 증가했습니다! (170→180)]
‘얼씨구?’
고작 얼굴 한번 가까이 봤다고 호감도가 올라?
그야 나도 심박수가 올라가긴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미남에 대한 본능에 가까운 현상이라서 순간적으로 떨쳐 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단테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데스티니의 마법에 홀리지 않았고, 세상사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 단테가 내게 꾸준히 호감도를 올리는 것도 모자라 마음에 든다고까지 한다.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평범한 얼굴이 취향인 건가?’
스스로를 저평가하는 것 같지만, 아쉽게도 이건 철저하게 객관적으로 이루어진 평가에 의한 것이었다.
이곳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속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곧 여주인공 외의 돋보이는 여자는 조연 외에는 없다고 봐야 했다.
그중에서도 나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 엑스트라 중 엑스트라였다. 화려한 외모가 평균적인 세계에서 나는 아무리 잘 봐줘도 겨우 귀엽게 봐줄까 말까 하는 정도였다.
생각이 깊어지는 만큼 미간이 깊어지고 있을 때였다.
“넌 언제나 생각에 잘 잠기는군.”
“그러게요. 전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싶은데.”
“지금은 무슨 생각을 했지?”
단테의 질문은 드문 일이라 나는 서슴없이 답했다.
“당신이 날 마음에 든다는 점이 뭔지 생각했어요.”
“호오, 그래서?”
“평범한 외모에 매력을 느낀다거나?”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던져 보았다.
그러자 돌아오는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네?”
순간 잘못 들은 건가 귀를 의심했다.
“농담이다.”
그럼 그렇지.
“안 어울리게 그런 짓 하지 말아요. 당신은 가뜩이나 표정이 거의 없어서 알아채기 힘드니까.”
“…내 표정을 알아볼 수 있나?”
“조금은요? 붙어 있는 시간이 얼만데 그 정도도 모를까요.”
허세를 담아 말헀지만 실상은 알아차리는 건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단테가 레이프를 광신도처럼 좋아한다는 것이라든가, 껄끄러운 일엔 좀 더 눈동자가 가라앉는다는 것, 그리고 즐거울 때 앙다문 입이 미세하게 떨린다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이 허세도 단테에게는 굉장히 잘 먹힌 모양이었다.
[단테의 호감도가 증가했습니다! (180→185)]
“후후, 재미있어.”
입가가 떨리는 것을 넘어 보기 드물게 웃는 단테의 모습은 희귀했지만, 난 거기에 감탄할 겨를이 없었다.
“후….”
이로써 확실하다.
유일하게 데스티니에 휘둘리지 않는 단테도 결국엔 이놈의 장르와 시스템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공략캐라는 것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다시 한번 오늘 할 일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얼른 여주인공을 찾자!’
그리고 하루빨리 이 지긋지긋한 공략캐들에게서 벗어나야지.
단테와 함께 돌아온 방은 아까와 사뭇 다른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왔나.”
“오셨군요.”
동시에 찾아든 이티엘과 린든의 목소리에 순간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알림에 떴던 집착 모드였다.
정확히 뭘 뜻하는지 모르지만 대충 분위기를 봐서는 단테와 단둘이 나간 나에 대해 굉장히 서운한 감정들을 품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손님을 초대해 놓고 자리를 비운 걸 보면 사제끼리 어지간히도 대단한 이야기를 나누었나 보지?”
“앞으로 해야 할 연주에 대해 말씀드릴 게 있었을 뿐이랍니다.”
이티엘의 도발에 나는 미소 지으며 최대한 공손하게 답했다. 혹시라도 옆에 선 단테가 어떤 지뢰를 던질지 모르니 먼저 나선 것이다.
“은의 현자가 음악에 조예가 있는 줄은 몰랐군.”
“마법과 음악은 여러 가지로 비슷한 부분이 많다. 그러니 위대한 대마법사인 레이프 유클리드가 음악가 활동을 했었고.”
아니나 다를까 단테는 눈치라곤 어디다 팔아먹은 것인지 기승전 레이프의 칭송을 담은 대답을 늘어놓았다.
그러니 이티엘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욱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군요. 오랜만에 듣는 그웨니르 영애의 연주니까요.”
린든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드럽게 올라간 입꼬리와 달리,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아 등골이 서늘했다.
“즐길 수 있을 때 즐기세요. 그러지 못할 때가 올 수도 있는 법이니까요.”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다. 그 말이 의미심장했는지 린든은 이리저리 나를 살폈다.
상인 특유의 눈빛은 내게서 얻어 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아쉽게도 그렇게 쳐다본들 그가 알아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데스티니에 관한 사실들은 레이프와 단테, 그리고 나만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요, 뭐든지 때와 기한이 있는 법이죠.”
린든은 의외로 순순히 물러났다.
당황하는 나와 시선을 마주한 그가 짙게 웃었다.
“그때 영애의 곁에 있는 게 누구인지 참으로 기대됩니다.”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알아챈 이티엘이 매섭게 고개를 돌렸다.
‘집착은 모르겠지만 견제는 확실하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미묘한 신경전에 나는 할 수만 있다면 까마득하게 높은 마탑 창문을 깨고 탈출하고 싶었다.
“오, 쟤네들 질투하나 봐? 무서워라.”
현 상황이 흥미로운지 레이프는 눈을 빛냈다.
“지금껏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누구에 비하면 무서운 건 아닌데.”
레이프는 바람보다 작은 내 중얼거림을 귀신같이 듣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무서워하지 마. 난 그저 내가 한 말을 지키려고 할 뿐인걸.”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며칠 동안 꾸준히 들은 말이지만 지금껏 사사건건 참견하던 사람이 갑자기 응원한다고 한들, 조금도 와닿지 않았다.
‘답답하네.’
그렇다고 어떻게 알아낼 방법은 없으니 계속 제자리걸음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이런 불안함도 여주인공을 찾으면 전부 마지막이다. 모두에게 쏠린 이목과 관심을 받지 않게 된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금방 평정심을 찾아 갔다.
나는 허공에 손을 뻗었다. 얼마 가지 않아 손에 착 감기는 나무의 감촉이 느껴졌다.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슬플 만치 익숙해져 버린 행동이었다.
애써 생각을 떨친 나는 밝게 말했다.
“그럼 시작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