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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22)화 (22/122)

제22화. 4장. 여주인공을 찾아서 (5)

무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온 나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머릿속은 단테의 말로 가득 차 있었다.

“단테의 말이 마음에 걸려?”

더 이상 내 마음을 못 읽게 되었는데도 레이프는 여전히 귀신같이 내 마음을 잘 읽었다.

아니, 이쯤 되면 내가 너무 단순해서 얼굴에 다 드러나는 걸 수도 있겠네.

나는 불만스럽게 대꾸했다.

“바이올린을 켜야 하잖아.”

“선택받은 자를 찾고 싶은 거 아니었어?”

“그렇긴 한데….”

나는 데스티니를 연주했을 때를 떠올렸다. 무한한 찬사와 함께 나를 칭송하며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생각만으로도 숨이 턱 막혔다.

그렇다고 연주를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히든 이벤트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 하는 관문이었으니까.

연주하기 싫다는 마음과 꼭 해야 할 일이라는 사실이 끊임없이 고뇌를 만들어 냈다.

단순히 연주를 하기 싫어하는 걸로 받아들인 레이프는 내 어깨를 도닥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다른 곳이면 몰라도 마탑에서 연주하는 거잖아? 명색이 마법사라면 그 정도의 마법은 알아서 버티고 차단할 거야.”

욱하는 마음이 머리를 쳐들었다.

“모두가 다 너나 단테 같은 줄 알아? 황제를 봐. 칼에 찔려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같이 생겨선 누구보다 앞장서서 나한테 질척대고 있잖아.”

데스티니에 걸린 마법이 약하다고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마법사의 기준일 뿐, 그 외의 마법사들이나 일반인들에게도 그러라는 법은 없었다.

그중에서도 이티엘은 내가 데스티니에 걸린 마법을 약하다 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건 선택받은 자를 찾으면 될 일이야. 주인이 바뀌면 당연히 마법이 향할 대상도 달라지니까.”

나긋나긋한 레이프의 대답에 나는 결국 줄곧 마음에 품고 있던 질문을 던졌다.

“요즘 왜 그래?”

“뭐가?”

“계속 이상하게 굴잖아.”

언제는 내 운명은 너뿐이네, 뭐네, 하는 소리를 늘어놓고선 여주인공을 찾는 것에 대해 별말을 하지 않으니 수상하게 여기지 않고 배길 리가.

내 진지한 물음에도 레이프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천진하게 말했다.

“저번에도 말하지 않았었나? 난 세이딘을 응원할 거라고. 아니면 설마 내가 반대하기를 바라는 거야?”

“아니, 그건 절대 아니지. 그렇지만 안 하던 짓을 하면 수상한 법이야.”

칼같이 자르는 나를 보며 레이프는 꿀이 흐를 듯한 눈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그래서 요즘 계속 날 경계 어린 눈으로 봤던 거구나?”

정곡을 찔린 나는 침묵을 지켰다.

레이프는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렸다.

“그렇게 겁먹을 것 없어, 세이딘. 단지 생각을 좀 해 봤을 뿐이야. 네 말대로라면 원래 선택받은 자가 따로 있다는 거고, 그자가 내 소원을 이뤄 줄 거란 거 아냐?”

“그…, 렇지?”

“그렇다면 네게 그 짐을 더 지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나로 인해서 엮인 남자들 때문에 고생하고 있으니까.”

한없이 온화한 표정으로 설명하는 레이프를 보며 나는 가슴까지 답답함이 차올랐다.

‘너 안 그런 애였잖아! 조금만 수틀리면 배드엔딩으로 족족 보내 버렸잖아!’

이제는 답답함을 넘어서 억울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상냥하게 굴 거면 엔딩을 보게 해 주면 좀 좋아?!

이러한 생각 끝에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두 가지였다.

레이프는 무언가 숨기고 있다. 혹은 무슨 일을 꾸미고 있거나.

‘아니면 둘 다일지도 모르지.’

무엇이든 내게 결코 좋은 쪽으로 작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마음 같아선 한마디를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그렇게 도움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하고 싶은 말을 목구멍 뒤로 삼켰다.

대신 레이프의 말을 그대로 믿는 척을 했다. 철벽의 에메랄드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아…. 네가 그렇다니 알겠어. 하지만 과하게 신경 쓰지 말았으면 해. 네가 안 하던 짓을 하니까 괜히 불안하고 불편해.”

“흐음, 난 그저 네가 상냥한 걸 좋아하는 것 같길래 그렇게 해 본 것뿐인데 말이야. 어찌 됐건 네가 그렇다면 그러지 않을게.”

역시나 순순한 레이프의 말은 불안했지만 어쩌겠는가, 저놈을 떨어뜨리지 못하는 내겐 현재로선 이게 최선이었다.

한차례 화제를 마무리한 나는 짙은 한숨과 함께 원래 주제로 돌아왔다.

“그리고 바이올린은… 켜야겠지. 그래야 원래의 선택받은 자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

“그래, 잘 생각했어.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하잖아.”

레이프의 추임새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영 마음이 찝찝했다.

‘정말 이대로 괜찮을까?’

왠지 좋지 않은 예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별다른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나는 시원한 해결을 보지 못한 채로 단테와의 약속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  *  *

나는 몇 번이고 비벼댄 내 눈을 의심했다.

“…이게 뭐예요, 단테?”

“보면 알지 않나? 사람이다.”

“몰라서 묻는 게 아니잖아요?”

나는 노골적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머리 좋은 아웃사이더 모임의 결정체인 마탑에는 어쩐 일인지 외부인이 몇 명 섞여 있었다.

그래, 뭘 숨기리. 그들은 바로 이티엘과 린든이었다.

“오늘도 아름답군, 그웨니르 영애. 찌푸린 미간도 섬세해.”

이티엘은 얼굴을 잔뜩 구긴 나를 보면서도 미소 지으며 정신 나간 칭찬을 멈추지 않았다.

“폐하는 오늘도 과하시네요.”

“그렇게 추켜세워 주다니, 고마울 따름이야.”

꽤 오랫동안 데스티니의 연주를 듣지 않았는데도 그에게 걸린 마법 효과는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가운데, 이티엘이 단테와 시선이 맞았다.

스파크가 튀기는 듯한 묘한 분위기가 오가는가 싶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티엘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웨니르 영애의 연주에 초대해 줘서 고맙군, 은의 현자.”

“고마워할 필요 없다, 여명의 지배자. 그저 필요에 의한 초대였을 뿐이니까.”

제발 내 앞에서 오글거리는 칭호로 부르면서 눈싸움하지 말란 말이야!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눈과 귀를 막고 싶은 마음이었다.

왜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된 건지 머릿속으로 신나게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이티엘과 단테의 기싸움이 길어질 것을 예감한 린든이 내게 다가왔다.

“잘 지내셨습니까, 그웨니르 영애.”

“안녕하세요, 브누아 영식. 저는 잘 지냈어요. 영식은요?”

“바쁘긴 해도 매일이 보람차고 즐겁습니다. 지금껏 많은 후원을 해 왔지만 이렇게 곧바로 성과를 보인 적은 처음이니 말입니다.”

안 그래도 린든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흐뭇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를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아, 물론 그게 다가 아닙니다. 가장 기쁜 것은 영애와 만나는 이 순간이죠.”

공략캐의 속성은 어디로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조금의 틈만 생겨도 어필을 하는 걸 보면. 어쩌면 상인의 습성이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호호, 별게 다 기쁘시기도 하셔라.”

삽시간에 추락한 마음을 추스른 나는 메마른 웃음으로 대답했다. 철저하게 댁에게 관심 없다는 의지였다.

“화기애애해 보이는군.”

한차례 이티엘과 신경전을 마친 것인지 단테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를 보며 선한 눈으로 호감을 듬뿍 담아 반짝이던 린든은 단테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레즈 님. 그웨니르 영애의 후원자로서 마탑에 초대받는 영광을 누리게 되어 기쁩니다.”

“나야말로 이번 기회에 소소하게나마 보답하는 것 같아 기쁘다. 당신의 상단에겐 언제나 신세를 지고 있으니 말이야. 아무쪼록 편히 즐기다 갔으면 해.”

나는 가는 눈으로 단테를 올려다봤다.

마법 외의 말도 길게 할 줄 안다는 사실에 놀랐고, 연주하는 사람도 아니면서 생색을 내는 모습이 아니꼬웠다.

“왜 그러지, 세이딘?”

얼굴이 뚫릴 정도로 쳐다보는 시선에도 단테는 안색 하나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표정이 없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잠깐 저랑 이야기 좀 해요.”

거절을 해도 무시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나는 단테의 손목을 단단히 잡았다.

모여드는 시선과 함께 알림음이 연달아 이어졌다.

[이티엘이 질투합니다. 대화하시겠습니까? (수락/거절)]

[린든이 질투합니다. 대화하시겠습니까? (수락/거절)]

“뭔데 이거?”

더는 시스템에 놀아날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세이딘,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내 말이 자신에게 향한 건 줄 알았는지 단테가 의아함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혼잣말이었어요. 그것보다 이리 좀 와 봐요.”

일단 이놈과 대화를 하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나는 단테의 손을 억지로 잡아끌었다.

알림에 거절을 누른 건 덤이었다.

그러자 두 개의 알림이 눈앞에 빠르게 흘러나왔다.

[이티엘의 호감도가 떨어졌습니다! (130→100)]

[린든의 호감도가 떨어졌습니다! (90→60)]

‘내 알 바냐. 오히려 잘됐지.’

나는 뒤통수에 따라붙는 따가운 시선을 무시하고 단테를 테라스로 끌고 갔다.

“세이딘, 왜 그렇게 화가 난 거지?”

“지금 몰라서 물어요? 대체 저 인간들은 왜 부른 거예요?”

“데스티니를 연주할 때 필요하다.”

“그런 말은 처음 듣는데요?”

“그야 오늘 막 알아낸 사실이니까.”

단테의 말에 따르면 데스티니와 연결된 생명력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연주를 해야 하는데, 추적하는 힘을 좀 더 증폭시키기 위해서는 데스티니와 깊게 연관이 있는, 그러니까 선택받은 자를 열렬히 따라다니는 자들이 함께여야 한다고 했다.

“뭐 이런 거지 같은….”

더 말을 잇지 못한 나는 그저 헛웃음만 흘렸다.

하지만 이 지긋지긋한 공략캐들과의 인연도 이제 곧 끝이라고 생각하면 그다지 화가 나지는 않았다.

단지 오늘 알았다고 사람을 모으는 놈이나, 그걸 듣고 또 곧장 오는 놈들이나, 바이올린과 얽힌 공략캐들의 똘끼에 순수하게 감탄하면서도 진절머리가 날 뿐이었다.

나는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일단은 알았어요. 만약에라도 이 모든 게 수틀려서 잘못되는 일이 벌어지면 그때는 확실하게 책임져요.”

“어떤 식으로 말이지?”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게요. 지금 이 일만으로도 머리가 벅차요.”

단테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있을 지옥 같은 시간을 위해 손님들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돌릴 때였다.

“으응?”

느닷없이 떠오른 알림에 나는 눈을 깜박였다.

[집착 모드가 발동했습니다.]

그것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알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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