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4장. 여주인공을 찾아서 (4)
나는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너희가 나오는 게임을 해 봤어. 그리고 네놈을 공략하려 하던 때에 이 세계에 오게 됐고.’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당사자인 내가 들어도 우습다 못해 황당한 일이었다.
그 외에도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았기에 사실은 무조건 묻어 두고 그럴듯한 대꾸를 골랐다.
오랜 세월간 각광받던 것이었다.
“나는 꿈에서 미래를 봐.”
“흐음, 예지몽이라…….”
레이프는 턱을 쓰다듬으며 무언가 생각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시간은 10년처럼 길었다.
“그렇구나, 예지몽이면 그럴 만하지.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말이야.”
긍정적인 대답이었지만 안심할 순 없었다. 저놈의 마법사는 언제나 알 수 없는 방향에서 훅 치고 들어오는 재주를 가졌으니까.
“그럼 네가 계속 다른 선택받은 자가 나타날 수도 있다 했던 것도 예지몽을 봤기 때문이겠네?”
이거 봐라, 아무렇지도 않게 카운터 먹이는 거.
다행히도 이번 물음은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여서 그렇게 긴장할 건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원래라면 그 사람이 네 운명이었을 거야.”
“운명?”
피식 웃는 레이프가 영 시원찮게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마음의 한구석에서 불안이 기웃거릴 때, 레이프는 비웃음을 지우고 황홀하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이런, 세이딘! 어쩜 넌 이렇게 귀엽고 엉뚱한 소리만 골라서 할까? 유감스럽게도 난 그렇게 쉬운 사람이 아냐.”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것과 동시에 처음부터 지금까지 레이프가 한 행동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네가요?
“못 믿겠다는 표정이네.”
“그야…. 뭐, 그동안 본 바가 있으니까?”
지지 않고 받아치는 나를 향해 레이프는 한층 더 눈부신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 이렇게 감동적인 일은 처음이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긴, 네가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해. 그동안 내가 워낙 잘했어야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하세요, 이 사람아.
“아직도 모르겠어, 세이딘?”
쏟아지는 헛소리 속에서 허우적대느라 정신없는 내게 레이프가 재촉하듯 물었다.
“내 운명은 너뿐이야.”
운명이라는 둥, 나의 아가씨라는 둥, 닭살이 오소소 돋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레이프였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입가에 달고 사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없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대체 무슨 꿍꿍이지?’
그것도 아니라면 애초에 내 말을 믿지 않는 것일지도 몰랐다. 레이프는 의심이 많았으니까.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아이템을 쓰기 전까지 레이프가 쉽게 내 생각을 엿봤던 것을 떠올리며 아쉬움이 들었다.
마음 같아선 ‘너 왜 그래?’라고 곧바로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어본들 솔직하게 대답해 줄 것도 아니니 뭐라고 하는지 한번 들어나 봐야겠다.
레이프는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보더니, 미소를 거두고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설령 네 말대로 다른 선택받은 자가 나타난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운명을 느끼지는 않을 거야.”
“그걸 어떻게 확신해?”
“내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
그럼 그렇지. 난 또 뭔가 더 특별한 게 있을 줄 알았다.
김이 팍 샌 나는 알았다고 대충 흘려 넘겼다.
“그래서 질문은 여기까지야?”
“아니, 더 있어.”
“뭔데? 나 이제 슬슬 뭘 먹으러 가고 싶은데.”
꼬르르르륵.
기다렸다는 듯이 흘러나온 소리에 나는 얼굴을 붉혔다.
오랫동안 자고 일어난 탓인지 아까부터 배가 처절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그래, 그럼 이거 하나만 물어볼게.”
호박색 눈동자가 곧장 나를 향했다.
“네가 꿈에서 본 대로 선택받은 자가 되었어야 할 사람이 나타난다면 세이딘, 넌 어떻게 할 셈이야?”
뭘 이걸 질문이라고.
“저번에도 말했잖아? 난 누구의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길게 놀면서 살 거야.”
그간 내 행동에서 느낀 바가 있었는지 레이프는 딱히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대신 그는 이렇게 물을 뿐이었다.
“그래도 넌 후회가 없겠어?”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기심에 데스티니를 손에 쥔 순간부터 내 인생은 평생 받아도 넘쳤을 관심과 주목으로 가득했다.
나는 더 이상 그런 가시밭길을 걷고 싶지 않았다.
“그래, 알았어.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어쩐 일인지 레이프는 순순히 납득했다. 영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지금 내겐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다.
“그럼 나 밥 먹으러 갔다 온다?”
요란한 배 소리로 더 이상 부끄럽고 싶지 않은 나는 레이프를 뒤로하고 곧장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이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나는 나대로 행동하는 수밖에.”
이후로 레이프가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에 대해서.
* * *
이후로도 내 일상은 혼미함의 연속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프러포즈를 해 오는 황제와 후원을 핑계로 빈번하게 저택에 찾아오는 린든, 그리고 자신의 실험에 미쳐 매일 껌딱지처럼 붙어 있는 단테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스트레스로 가득한 나날이었다.
“아, 죽겠다.”
머리가 핑 도는 감각을 견디지 못한 내가 그대로 책상에 얼굴을 박자, 단테가 진지하게 한마디를 했다.
“이제 고작 7시간밖에 안 지났다, 세이딘.”
“고작? 고자악?! 꼭두새벽부터 불려 와서 아침도, 점심도 못 먹고 있는 사람한테 할 소리예요?”
그랬다.
저 미친 마법사는 데스티니를 조사하는 데 정신이 나가 식사 시간을 전부 건너뛰고 있었다.
단테는 씩씩대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나 두 끼 정도는 안 먹고 버틸 수 있지 않나?”
“아뇨, 절대 아니에요.”
칼같이 단호한 부정에 단테는 그저 눈을 깜박였다. 그는 정말로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도저히 안 되겠어요. 나 갈래요.”
더는 참을 수 없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벤트고 나발이고 지금 그게 대수냐? 당장 굶어 죽겠는데!
집에 돌아가려 반지에 시동을 거는 나를 보며, 단테는 서둘러 내 손목을 잡았다.
“세이딘, 네가 가면 지금 알아낸 것들이 전부 허사가 된다.”
“그러면 안 된다고만 할 게 아니라 성의를 보여요, 성의를! 뱃가죽이 등에 붙겠어요!”
배고픔에 눈이 뒤집힌 내 외침에 단테는 작은 한숨을 내쉬더니 손가락을 까딱했다.
그러자 내 책상에는 갓 구운 빵과 잼, 그리고 많은 종류의 과일이 거짓말처럼 쌓였다.
그 푸짐하고 행복한 광경에 배고픔과 짜증으로 가득 찼던 내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것만 같았다.
“진작 이렇게 해 주면 얼마나 좋아요?”
짜증 섞인 대꾸와 함께 나는 아무 말 없이 먹기 시작했다.
목구멍으로 음식물이 넘어가자, 온몸의 장기가 여기저기서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대체 왜 그렇게 음식에 집착하는지 알 수 없군.”
“그러게 말이야.”
단테가 중얼거리자 추임새처럼 따라온 레이프의 동의에 나는 입안에 한가득 쑤셔 넣은 빵을 빠르게 삼키며 미간을 찌푸렸다.
할 말은 해야지.
“당신들이 이상한 거예요. 사람이 일을 하면 먹기도 하고 쉬기도 해야지, 일 하나만 붙들고 있으면 어떡해요?”
“당신들?”
의아한 단테의 목소리에 나는 다급히 정정했다.
“너무 배고팠던 나머지 말이 헛나갔어요. ‘당신’이요.”
그런 나를 보며 레이프는 즐겁다는 듯 웃었다.
며칠 전 대화를 나눈 후로 레이프는 평소와 같이 나를 따라다니면서도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기만 할 뿐, 어떤 토도 달지 않았다. 장난스러운 행동도 줄었다.
의문이 생겨 무슨 심경의 변화냐고 물어본 내게 레이프는 그저 말갛게 웃었다.
‘난 그저 세이딘을 응원하는 것뿐이야.’
별것 아닌 듯 말했지만 내게는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덕분에 가슴에 콕 박혀서 지금까지도 계속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무슨 일을 꾸미는 건 아니겠지?’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 덕에 이전보다도 훨씬 곧잘 배고프고 곧잘 신경질을 내고 있는 건 스스로도 어느 정도 자각하는 바였다.
‘앞으로는 간식거리를 준비해서 다녀야겠어.’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남은 빵을 입에 집어넣었다.
“오늘은 좀 알아낸 거 있어요?”
“그래. 그것도 상당히 큰 발견이지.”
“아, 그렇구…. 네?”
또 허탕을 친 게 아니고?
게다가 상당히 큰 발견이라고 하니 떨떠름하기만 했다.
믿기 어려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노라니 단테가 말을 이었다.
“데스티니와 연결된 것이 무엇인지 알아냈다.”
“뭔데요?”
“생명력이다. 이 기척을 따라 탐색하다 보면 세이딘, 네가 말한 자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가슴이 뛰었다.
여주인공을 발견한다.
그 말은 곧 이 지긋지긋한 시스템과 공략캐들로부터 자유를 되찾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어? 그런데 왜 이벤트 달성이 안 되는 거지?’
나는 시스템창을 열어 보았다. 달성률이 80%인 것을 보면 아무래도 데스티니를 연주해야 비로소 끝나는 모양이었다.
어찌 되었건 기분이 좋은 일이었기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당연히 좋죠! 몇 달 만에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는 건데. 전 조용한 삶을 살고 싶어요.”
나는 진심으로 활짝 웃었다. 이렇게 웃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또로롱.
[단테의 호감도가 증가했습니다! (160→170)]
하지만 이어지는 알림음과 알람에 기분은 곧장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한편 무슨 말에 꽂힌 건지 단테는 무언가를 회상하듯 아련한 눈동자로 말했다.
“그래, 조용한 삶은 언제나 평온을 주지. 주목받는 삶은 처음만 좋을 뿐, 갈수록 허무해질 뿐이야.”
“아, 그렇구나.”
나는 빛처럼 빠르게 건성으로 대답했다.
안 그래도 여기저기서 출몰하는 이벤트가 상당한데, 제 발로 궁금하지도 않은 과거사를 듣는 연애 이벤트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하긴, 넌 계속 겪고 있는 일이니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군.”
이벤트가 깨졌는데도 단테는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여주인공을 찾기 위해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몇 가지를 더 설명했다.
“한 가지 말하는 걸 잊었어, 세이딘.”
오늘의 연구를 마치고 돌아갈 채비를 하려는데 단테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나를 잡았다.
“생명력을 추적할 때,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뭔데요?”
여주인공만 찾을 수 있다면 뭔들 못 할까!
나는 의욕 넘치는 눈동자로 단테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의욕은 금방 꺾이고 말았다.
“데스티니를 연주해라.”
그것은 여주인공을 찾고 싶은 열망만큼이나 하고 싶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