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4장. 여주인공을 찾아서 (3)
이 정신 나간 시스템은 내가 여주인공에게 원래 자리를 돌려주는 것조차도 이벤트로 바꿔 버리는구나.
이 속도라면 모처럼 얻은 협상이 그다지 소용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이러다가 여주인공을 찾아도 이 더러운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갖가지 생각이 하나둘 머리를 스치다 가장 최악의 가능성이 가슴에 박혔다.
‘아냐, 지레짐작하지 말자.’
나는 불안을 떨치려 심호흡을 했다. 애초에 게임 시스템에 휘둘리기 시작한 것은 데스티니를 잡게 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여주인공이 돌아오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올 거야.’
그러니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기보다 눈앞에 있는 단서를 살펴보는 것이 우선이었다.
‘수락.’
수락에 응하자 눈앞에 뜬 글자가 빨갛게 바뀌었다. 지금까지 떠밀려서 이벤트를 진행했던 것과는 달리, 내 의지로 선택한 것은 처음이었기에 조금 묘한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감상에 젖을 틈은 없었다. 날벼락 같은 단테의 제안이 이어졌다.
“그럼 하루빨리 그 힘의 정체를 밝힐 수 있게 앞으로는 매일 보도록 하지.”
‘하, 참!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는데 더 엮이고 있냐.’
그렇다고 해서 불만을 토로할 수는 없었다. 공략캐 후보 중에서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을 법한 인물은 현재로선 단테가 유일했으니까.
“알았어요.”
체념 섞인 대답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대신 제대로 해 줘요. 당신도 나도 원하는 걸 얻으려고 하는 거니까.”
강한 의지와 단호함이 담긴 내 말에 단테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다. 나 또한 다시없을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으니 말이야.”
* * *
앞으로의 일정을 상의하고 단테가 돌아간 뒤, 제일 먼저 내가 한 일은 침대로 달려간 것이었다.
지난 며칠간 벌어진 많은 일들로 머리에 과부하가 온 탓인지 베개에 얼굴을 박은 나는 곧장 잠에 빠져들었다.
“방치가 학대라는 거 알고 있어, 세이딘?”
그 사실을 안 것은 정신이 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코앞에 얼굴을 들이민 레이프 때문이었다.
그는 내가 3일 내내 쥐 죽은 듯이 잔 것을 비롯해 저택 사람들과 몇 없는 친구들이 왔다 간 것 등을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물론 그중에는 관심을 주지 않았으면 하는 인물들도 섞여 있었다. 황제라든가, 린든이라든가, 단테라든가.
갈수록 심해지는 토로를 더 견딜 수 없었던 나는 서둘러 말을 잘랐다.
“알았어, 레이프. 내가 잘못했으니까 일단 얼굴 좀 치워. 안 그러면 또다시 기절해 버린다?”
진심을 담은 부탁이었음에도 레이프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순간이었다.
쪽!
이마에 닿는 낯선 감각과 이해할 수 없는 소리는 단숨에 머릿속을 하얗게 물들였다.
물음표가 하나둘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뭐야?”
끊임없이 차오르는 의문이 견디지 못하고 소리가 되었다.
“글쎄, 뭘까?”
의문에 의문을 던진 레이프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태연하기만 했다.
“어, 그러니까….”
‘저놈이 지금 내 이마에….’
입 맞췄어!
덕분에 뒤늦게 깨어난 이성이 온몸의 열기를 끌어모아 머리끝까지 달려왔다.
‘아니, 대체 왜?’
중세 서양을 배경으로 한 이 세계에서 입이 아닌 곳의 입맞춤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고, 나 또한 지난 3년간 그 문화에 제법 적응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준비가 된 상태였을 때였지 이렇게 불시에 닥치지 않았다.
끊임없는 물음을 담은 시선으로 바라보자 레이프는 눈가를 접었다. 부드럽다 못해 녹아내릴 것만 같은 미소였다.
혼란의 소용돌이를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 내게 레이프가 말했다.
“이제야 좀 만족스럽네.”
만족? 만조옥?
그 만족, 혼자만 알지 말고 나한테도 알려 줬으면 하는 바람인데요.
혼란 속에서 떠오른 생각은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었다.
배부른 포식자처럼 웃는 레이프를 보고만 있을 수 없던 나는 반사적으로 허공에 손을 뻗었다.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였다.
“세이딘?”
내 이름을 부르는 레이프와 동시에 내 방구석에 처박혀 있던 데스티니가 기다렸다는 듯 손에 착 감겼다.
“갑자기 날 왜 불러낸 거야?”
평소에 내가 데스티니를 절대 먼저 쥐는 일이 없다는 걸 아는 레이프가 의문을 표했다.
왜긴, 이러려고 하지.
나는 마주친 호박빛 눈동자를 향해 활짝 웃으며 팔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의자를 향해 내리쳤다.
“지금 뭐 하는…. 으앗?!”
레이프의 짧은 비명에 맞추어 데스티니가 의자에 부딪혔다. 유감스럽게도 박살이 난 것은 훨씬 단단해 보이는 의자 쪽이었다.
그제야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레이프는 여유를 되찾고 나를 말리기 시작했다.
“소용없어, 세이딘. 아무리 그렇게 해도 나는 부서지지 않아.”
“그런 거 같네.”
“그래, 그러니 괜한 일에 힘 빼지 마.”
레이프의 말은 타당했다. 그럼에도 하는 것은 화풀이에 가까웠다.
직접적으로 저놈의 멱살을 잡을 수 없으니 이렇게라도 해야지 별수 있어?
레이프의 말을 무시한 나는 몇 번이고 최선을 다해서 데스티니를 휘둘렀다. 우지끈 부러졌던 의자는 점점 원래 모습을 잃고 가루가 되었다.
마법의 압승이었다.
“이제 속 좀 시원해?”
폐허가 되어 버린 의자와 상큼한 레이프의 목소리는 무척 대조적이었다.
“왜 그런 거야?”
한차례 화를 가라앉히고 나니 자연스러운 물음이 흘러나왔다.
제대로 된 답을 기대할 수 있을지의 여부는 모르지만.
다행히도 레이프의 대답은 아까보다는 한결 나아졌다.
“그냥 하고 싶어서?”
“하고 싶은 대로 하면 그게 사람이야? 짐승이지.”
“맞는 말이야. 하지만 이건 세이딘이 나빠. 다른 남자들에게 그렇게 금방 마음을 주고 말이야.”
“뭐? 내가 언….”
“금방 두근거리고 설레잖아. 아니야?”
어쩜 저렇게 콕 집어서 말을 한담?
딱 잘라 부정하기에는 틀린 것도 아닌지라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이조차도 레이프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는 이유는 아니었다.
“데스티니, 애초에 넌 내가 누구랑 이어졌으면 하는 거 아니었어?”
“물론이지. 그치만 네가 나보다 별로인 남자에게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보는 건 유쾌하지 않아.”
“그게 무슨 거지 같은 논리야!”
몸을 사리던 과거의 내가 무색하리만치 솔직한 반응이 흘러나왔다.
그렇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레이프가 아니었다.
흘러내린 보랏빛 머리카락 사이로 빛나는 호박색 눈동자가 익살스럽게 빛났다.
“적어도 그들보단 내가 최고라는 걸 인정받았으면 하는 마음? 그러니 세이딘, 나 외의 다른 남자의 외모에 홀리진 마.”
이렇게 완벽한 개소리가 또 있을까?
애초에 레이프는 데스티니에 걸려 있는 마법이 통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저러는 걸 보면….
‘아, 모르겠다.’
애초에 공략 실패한 놈의 심리를 어떻게 알아?
대꾸를 해 봐야 피곤할 뿐이었기에 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으니까 해로운 짓 좀 그만해. 자꾸 그러면 사랑이고 나발이고 다 던지고 떠날 거니까.”
“까다롭게 굴긴. 알았어, 알았어.”
백 프로 모르는 것이 분명한 태도에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래서 말인데 세이딘, 한 가지 물어봐도 돼?”
“뭔데?”
“또 다른 선택받은 자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물처럼 부드럽게 이어지는 질문에 등부터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뭘 그리 놀라? 지금껏 그렇게 실컷 말하고 다녔으면서.”
“…….”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여주인공을 찾는 데 급급했으니까.
다행인 점은 이런 상황을 대비한 말이 있다는 것이었다.
‘좀 진부한 게 문제긴 하지만.’
나는 떠올린 변명의 아쉬움을 뒤로 밀어 놓으며 입을 열었다.
“난 미래를 볼 수 있어.”
대답을 기다리던 호박색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피식 웃는 소리와 함께 레이프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럼 세이딘은 예언자인 거야?”
“그렇게 거창한 건 아냐. 실제로 보는 건 단편적이거든.”
“어찌 됐건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거잖아? 그럼 예언자지.”
레이프는 어떻게든 거창하게 정의를 내리려고 작정한 모양이었다.
뭐, 그래. 어떻게 부르건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레이프는 아직 내 말을 온전히 믿지 않았는데, 흥미 가득한 시선이 그 증거였다.
쏟아지는 시선을 견딜 수 없었던 나는 애써 모른 척하며 스킬창을 열었다.
모처럼 사용법을 알게 된 스킬을 써 볼 생각이었다.
‘협상!’
스킬명을 선택하자마자 두 가지 선택창이 허공에 나열되었다.
[‘어허, 못 믿는 눈치인 걸 보니 네놈의 비밀을 파헤쳐 볼까?!’]
[‘예언자로 대해 줘서 고마워.’]
‘이번에도 어김없이 구리네.’
한결같은 선택지에 절로 흘러나오려는 헛웃음을 꾸역꾸역 참았다.
나는 선택지를 골랐다. 사실 선택지라고 할 것도 없었다. 둘 중 하나는 심각한 지뢰였으니까.
‘아마 저걸 고르면 약속된 배드엔딩이지 않을까?’
협상 스킬이 발동되는 효과음과 함께, 나는 입을 달싹였다.
“아직 부족하지만 예언자로 대해 줘서 고마워.”
[데스티니의 호감도가 80 떨어졌습니다.]
실로 대단한 효과가 아닐 수 없었다.
스킬의 결과에 만족하기도 잠시, 레이프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세이딘, 어디 아파?”
그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반응이지.
하지만 평소 네놈의 행실을 생각해 보세요. 이 정도는 별거 아닐 텐데?
역전된 반응이 제법 즐거운 나머지 절로 얼굴에 여유로운 미소가 떠올랐다.
“아니, 푹 자고 일어나서 매우 가볍고 상쾌한 기분이야. 그러니 솔직하게 말한 거고.”
레이프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내 속마음을 읽을 수 없으니 답답한 모양이었다.
‘오, 정말 먹히네.’
나는 신기한 마음에 레이프를 대상으로 한 여러 가지 감상들을 속으로 늘어놓았다. 평소라면 귀신같이 알아채던 레이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보상으로 받은 랜덤 마도구의 효과였다.
처음 협상을 사용하면서 겸사겸사 알게 된 ‘철벽의 에메랄드’는 레이프가 내 마음을 읽을 수 없도록 차단해 주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결국 내 의중을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레이프는 의아해하면서도 곧 아무렇지도 않게 화제를 돌렸다.
“그래, 그래서 어떻게 예언을 하는 거야?”
문제는 질문이 참 매운맛이라는 것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