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4장. 여주인공을 찾아서 (1)
이야기도 무사히 끝내고, 맛있는 차도 얻어 마신 나는 헤브론 상단을 나섰다. 린든은 좀 더 있기를 바랐지만, 이벤트도 달성했고 페널티도 사라졌으니 굳이 있을 필요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더 있고 싶지 않아서였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도 있고.
“아까부터 왜 그렇게 말이 없어?”
나는 겨우 구한 마차를 타자마자 질문을 던졌다. 평소라면 주절주절 말이 많았던 레이프가 내내 조용했기 때문이었다.
맞은편에 앉아 턱을 괸 채 창밖을 보던 대마법사가 천천히 입을 달싹였다.
“저런 남자가 취향이었어, 세이딘?”
“뭐야, 갑자기?”
“취향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저 남자는 추천하고 싶지 않아. 황제가 낫지. 아니면 차라리 날 좋아하는 건 어때?”
‘얘가 정말 왜 이러지?’
나는 너무 당황스러운 나머지 눈을 깜박이기 바빴다.
아까만 해도 린든과 잘해 봤으면 하는 식으로 굴 땐 언제고,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농담은 그 정도만 해. 그래서 왜 그러는 건데?”
“너무하네, 어느 정도는 진심이었는데.”
“어느 정도를 제외하면 농담이란 말이잖아.”
레이프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어느 정도 짐작했던 반응이라 놀랄 일은 없었다.
담백한 태도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노라니 레이프의 얼굴에 가득했던 장난기가 사라졌다.
“세이딘, 넌 그 남자를 보면서 느낀 게 없어?”
“린든? 완벽하고 예의 바른 호구인데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은 사람.”
“정말 매정한 대답이구나.”
“기왕이면 솔직하다고 해 줘.”
망설임 없는 대답에 레이프의 입가가 씰룩였다. 그러면서도 눈이 처져 있는 걸 보면 웃고 싶은데 웃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레이프는 조금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입을 달싹였다.
“너무 린든 브누아를 믿지 마.”
나는 헛웃음을 머금었다. 조금이나마 멀쩡한 대답을 기대한 내가 바보지.
“그거 단테에게도 했던 말인 거 알아?”
비꼬는 투가 가득한 물음이었음에도 레이프는 그저 진지하기만 했다.
“오, 세이딘. 단테는 마법사여서 그런 거고, 린든은 그냥 인간이야.”
“뭐가 다른데?”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과 뒤틀린 시선을 가진 것. 아주 큰 차이야.”
애초에 이 게임의 공략캐 중에 뒤틀리지 않은 놈이 어딨어? 다들 이놈의 바이올린에 홀려서 여주한테 집착하는 놈들인데.
“데스티니, 좀 더 제대로 설명해 줬으면 해.”
하지만 레이프는 내 요구를 가볍게 넘겨 버렸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직접 깨닫는 수밖에는.”
“그렇게 말할 거면 아예 말을 하지 말든가!”
“어떻게 이 이상 쉽게 표현해? 굉장히 간결하고 직관적이잖아?”
대체… 어디가?
“괜찮아, 세이딘. 화법이야 얼마든지 앞으로 배워 나갈 수 있는 거니까.”
나를 물음표의 바다 속에 몰아넣은 장본인은 어깨를 으쓱이는 것도 모자라 언제 그랬냐는 듯 여유로운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속이 박박 긁혀 나가는 게, 기분이 매우 더러웠다.
눈치가 빛처럼 빠른 레이프는 갈수록 내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보고는 냉큼 화제를 전환해 버렸다.
“그보다 세이딘, 뭐 잊은 거 없어?”
“잊은 거? 잊은 게 뭐가 있다……, 아!”
페널티라는 말에 휘둘리느라 단테를 잊고 있었다.
‘기껏 손에 넣은 좋은 패를 이렇게 소홀히 대하다니, 미쳤어!!’
나는 신명 나게 스스로를 까며 부랴부랴 손을 들었다. 안 그래도 존재감 넘치는 반지의 사파이어가 오늘따라 유독 반짝였다.
이제 막 마탑으로 떠나려고 할 참이었다.
“진정해.”
원래는 반짝이는 반지가 있어야 할 곳에 하얗고 긴 손이 드리웠다.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처럼 매끄럽고 완벽한 모습에 절로 시선이 쏠렸다.
‘가늘고 예쁜 손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대 보니까 크구나.’
“물론이지, 이래 봬도 남자인걸.”
무심코 떠올린 감상에 이어진 대꾸로 생각이 퍼뜩 현실로 돌아오면서 발끝부터 올라온 열이 화르륵 얼굴을 태웠다.
나는 괜한 무안함에 신경질적으로 레이프의 손을 치우며 말을 돌렸다.
“기껏 언질해 놓고 왜 막는 거야?”
“잊은 일을 떠올린 건 좋지만 지금 마탑에 가 봐야 시간 낭비야.”
항상 그랬듯 미로처럼 아리송한 말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단테가 우리 집에 와 있어?”
“우리 아가씨는 이런 건 참 잘 맞힌단 말이야. 맞아, 꽤 한참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어.”
“넌 그걸 어떻게 알았는데?”
“네가 연주할 때마다 마나가 돌아오잖아. 잊었어?”
나는 머리에 손을 얹었다. 익숙해져서 더 이상 머리가 아프진 않았지만 언제 어디서 날아들지 모르는 상황은 여전히 극심한 피로로 차곡차곡 적립되었다.
“아직 이틀이 안 됐을 텐데.”
“만난 시간을 기준으로 생각했을걸? 그러면 정확히 이틀이 훌쩍 넘거든.”
“빌어먹을 마법사.”
“무척 동감하는 바야. 하여간 마법사들은 변태라니까.”
말을 하는 본인 자신도 거기에 포함된다는 건 알고 있는 걸까?
지적을 할수록 힘들어지는 건 내 자신인지라 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지금 그보다 중요한 건 단테였다.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갑작스러운 공략캐의 등장은 언제나 이벤트가 함께였다.
‘조금이라도 대비를 해 둬야겠어.’
매번 시스템창에 휘둘렸으니 이번 기회에 나도 좀 휘둘러 보자.
“데스티니, 나 좀 잘게. 도착하면 깨워 줘.”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프를 확인하고 눈을 감은 나는 망설임 없이 한 가지를 떠올렸다.
‘시스템창!’
게임에서 보던 메뉴들이 기다렸다는 듯 주르륵 허공에 나열됐다.
‘이미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잘 보이네.’
감탄하는 것도 잠시, 나는 우선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내 정보를 열었다.
방금 전 돌발 이벤트에 대한 보상이 눈에 띄게 번쩍였다.
[스킬]
협상 lv.2
(플레이어에게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스킬. 레벨이 높을수록 성공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왜 연애 시뮬레이션에서 저런 걸 써먹어야 하냐고요…….’
내 기억이 맞는다면 <바이올린과 꽃미남들>은 평판 수치는커녕, 저런 스킬도 없었다. 그리고 피 말리는 돌발 이벤트도.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의문을 갖기엔 내 현실과 정보는 너무 미미하기만 했다.
‘우선은 한번 써 봐야지.’
몸으로 구르는 건 지긋지긋했지만,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 후로도 나는 각 공략캐들의 호감도와 이벤트 목록을 확인했다. 짧은 시간이나마 여러 정보들을 머릿속에 쑤셔 넣고 나니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공략캐와 이벤트가 조금은 덜 막연하고 두렵지 않게 느껴졌다.
‘정말 여주인공도 못 해먹을 일이구나.’
마음이 조금 여유로워지니 문득 든 생각이었다. 아무리 잘생겼다고 해도 쉴 틈 없이 남자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는 건 생각만으로도 숨이 턱 막혔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건 이제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하루라도 빨리 여주인공을 찾아서 안온한 일상을 되찾고 싶을 따름이지.
“다 왔어, 세이딘! 일어나.”
레이프가 나를 깨운 것은 생각을 정리하고 다짐까지 마친 뒤였다.
참 적절한 타이밍이라는 생각과 함께 눈을 뜬 나는 심호흡을 했다.
이곳을 나가면 또다시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전쟁터였다.
‘보자마자 스킬부터 사용해 버려?’
이것저것 대비책을 고민하며 마차에서 내리자, 먼저 보이는 것은 앤이었다. 그녀는 눈에 띄게 상기된 얼굴로 허둥대며 내게 다가왔다.
“왜 이제 오셨어요, 아가씨! 아까부터 손님이 기다리고 계세요!”
“알아, 단테지?”
앤은 환호성에 가까운 감탄을 내질렀다.
“어머, 어떻게 아셨어요?! 역시 은의 현자가 지목할 만큼 남다른 재능이…!”
“안내해 주겠어, 앤?”
소나기처럼 이어질 칭찬이 무서운 나머지, 나는 단번에 화제를 돌렸다.
앤은 굉장히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 말을 따랐다.
“아가씨, 부탁이 하나 있어요.”
1층 오른쪽 복도에 있는 응접실에 도착하자마자 입을 뗀 앤은 꽤 다급한 말투였다.
“뭔데?”
“은의 현자의 사인 한 장만 받아 주시면 안 돼요?”
“단테의 사인을?”
“네! 실은……, 그분 팬이거든요.”
“어쩐지 평소랑 다르다 싶더라니.”
황제가 와도 얼굴 하나 안 붉히던 애가 어쩐 일인가 했네.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새치름하게 바라보는데도 앤은 능청스레 웃었다.
“이런 때 아니면 제가 언제 은의 현자의 사인을 받아 보겠어요? 덤으로 이번 대미사에서 아가씨 자랑도 잔뜩 하고 올게요!”
“대미사가 뭔데?”
“모임 이름이에요. ‘대륙 미남 사랑한다’.”
뭔데, 그거.
‘애초에 그런 모임이 있었어?’
이 세계에 팬클럽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가볍게 충격을 받으면서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굴러다니는 돌멩이만큼이나 자주 보는 단테였지만, 여주인공이 나타나면 다시는 만날 일이 없으니 지금이 기회였다.
‘받는 김에 다른 공략캐들한테도 받아 둬?’
모임까지 있는 걸 보면 수요는 충분할 것 같고, 꽤 짭짤한 수입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시답잖은 생각을 더 하며 나는 문을 열었다.
오후 햇살이 가득한 응접실에는 그만큼이나 반짝이는 은발의 남자가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단테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오랜만이군, 세이딘 그웨니르.”
“이틀 전에 봤는데 어떻게 오랜만이에요?”
“시간으로는 48시간, 분으로는 2880분, 초로는 172800초다. 오랜만이라고 말하기에 충분하지.”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망설일 틈도 없이 레이프가 공감했다.
“그의 말이 맞아, 마법사의 시간은 때에 따라 다르거든.”
‘하여간 미친놈들이야….’
속으로 제정신이 아닌 두 놈을 씹어댄 나는 단테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렇게 오지 않으셔도 되는데.”
―또로롱!
‘대체 어떻게 돼먹은 정신머리면 이런 말에 호감도가 올라?’
호감도 알림음은 언제나 뜬금없었지만 이번만큼은 더욱 생뚱맞기 그지없었다.
내 혼란과 별개로 단테는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신경 쓸 것 없다. 볼일이 있어 겸사겸사 온 것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