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3장. 빌어먹을 이벤트 (6)
“데스티니, 지금 굉장히 어색하게 말 돌린 거 알고 있어?”
“세이딘, 케케묵은 일은 묻어 두도록 하자.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산더미잖아?”
정말 아무 말 대잔치네. 저놈은 스스로가 하는 말이 모순덩어리라는 것을 모르는 걸까?
그럼에도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레이프의 말대로 단테를 찾아가는 것 외엔 없어서 슬플 따름이었다.
속으로 쌓여 가는 한숨을 뒤로하고 나는 천천히 양손을 내렸다. 시야를 가득 채운 레이프가 심장에 해로웠다.
“데스티니, 우리 안전거리만큼은 제발 유지하자.”
“아, 그랬었지? 깜박했어, 미안.”
명백히 일부러 그런 것이 분명한 주제에 잘도 말한다.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내색했다가는 레이프에게 즐거움만 더해 줄 뿐이니 내색하지 말아야지.
하지만 눈을 깜박이는 순간, 다짐은 순식간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버리고 말았다.
빌어먹을 놈의 시스템창이었다.
“데스티니.”
“네, 나의 레이디?”
“단테는 다음에 찾아가야겠어.”
“흐음, 그러면?”
“린든을 만나야 해.”
“분명 관심 없다고 하지 않았어?”
했죠. 그것도 상당히 단호하게.
나는 대답 대신 침묵했다.
[돌발 이벤트 ― 매력적인 제안의 만기 시간이 다가옵니다. 서두르세요!]
공략캐들의 이벤트에 휘둘리길 며칠, 게임 속 시스템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주의: 이벤트 미수락 시,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페널티? 페널티이이이?’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헛웃음이 픽픽 흘러나왔다.
원하지도 않는 미션을 떠안겨 놓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협박까지 하다니.
‘하다못해 어떤 페널티인지 정도는 알려 줘야 할 거 아냐!’
아무래도 이놈의 시스템창은 제대로 날 엿 먹이려 작정한 모양이었다.
“세이딘?”
내 상태가 어지간히 이상하긴 했나 보다. 미미하지만 레이프의 표정에 걱정 비슷한 감정이 묻어났다.
가뜩이나 페널티 때문에 머리가 어질거리는데 레이프까지 저러니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별거 아냐. 그냥 어쩌다 인생이 이렇게 꼬이게 됐는지 생각하느라 그랬어.”
“그 정도야?”
“뭐든 네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지 않을까?”
집요하게 따라붙는 복잡한 시선을 모른 척하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랫동안 누워 있던 탓에 여기저기 잔디가 붙어 있고 치맛자락에는 풀물이 들었지만, 린든을 만나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을 하다 보니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세이딘,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거지만 린든 브누아에게 그 차림으로 갈 생각은 아니겠지?”
“그럴 생각인데. 왜?”
지금 내 코가 석 잔데 옷이 중요하겠니?
뭐가 문제냐는 투로 대꾸하자 레이프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웃었다.
“정말이지 넌 조금도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구나. 아주 좋아, 훌륭해.”
장난기 다분한 대답에 나는 왈칵 얼굴을 구기며 다짐했다.
하루빨리 여기저기 휘둘리는 일상에서 벗어나 욜로할 거라고.
* * *
저택을 나선 나는 헤브론 상단으로 향했다.
린든은 상단에서 나타나는 빈도가 높았으니 거기에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리고 예상대로였다.
한창 상품이 들어오는 중이었는지 상단 앞은 물건을 나르는 사람들로 분주했고, 그 중심에는 린든이 있었다.
그 북새통 속에서도 그는 나를 발견하고는 청록빛 눈동자를 부드럽게 접었다.
“그웨니르 영애!”
갑작스러운 방문인 데다 상당한 몰골이었음에도 린든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반가워하는 기색이 역력해서 오히려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어, 그…. 안녕하세요, 브누아 영식.”
“잘 오셨습니다. 마침 새로 들어온 차가 있는데 바쁘지 않으시다면 함께 시음하시겠습니까?”
과연 치유캐는 남달랐다. 내가 민망하지 않도록 던지는 물음에는 배려가 자연스럽게 배어 있었으니까.
원래라면 얽히고 싶지 않아 거절했을 일이었지만 시스템에 휘둘리는 입장인 이상, 그럴 수 없었다.
“갑자기 찾아왔는데도 호의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해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그럼 가실까요?”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완벽한 대답과 함께 린든은 나를 에스코트했다.
“아이고…….”
“상단주님 또 시작이시다.”
“이번엔 뭐야?”
“몰라, 확실한 건 또 호구…, 아니 손해 보실 수도 있다는 거지.”
파도처럼 술렁이는 주변의 수군거림은 린든의 인망이 상당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우려가 앞으로 내가 할 일이기도 해서 괜히 입이 썼다.
이를 모르는 린든은 상단 안을 소개하며 응접실로 안내했다. 그는 자리까지 정중하고 완벽한 에스코트를 한 뒤, 차를 내릴 준비를 했다.
“영애께서 이렇게 찾아오신 걸 보면 좋은 소식인가 보군요.”
린든의 물음은 티팟에 물을 따르는 손길을 구경하고 있을 때 날아들었다.
잠시 느긋한 오후 햇살과 향긋한 차향에 취했던 나는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그건 모르는 일이죠. 방향에 따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아뇨. 좋은 소식이 분명합니다, 영애. 나쁜 소식이었다면 이렇게 직접 찾아오지 않으셨을 테니까요.”
린든의 말이 맞았다. 그가 아무리 인간적으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한들, 시스템이 강제로 움직이게 하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올 일은 없었으니까.
저렇게 말하니 나도 내숭은 내려놓으련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본론만 말하겠어요. 저번에 제안해 주신 후원, 받아들일게요.”
“정말입니까?”
“네, 그 말을 하려고 왔는걸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웨니르 영애! 영애가 빛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후원하겠습니다.”
환한 미소와 함께 진심으로 기뻐하는 린든의 머리 위로 허공에 떠오른 시스템창이 반짝였다.
페널티라는 단어에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이벤트 속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 전에 짚고 넘어갈 게 있어요.”
“무엇입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후원을 해 주실 건가요?”
“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차를 우리던 린든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후원이라는 건 이점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브누아 영식이 얻는 것과 제가 얻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요.”
놀람의 연속이었는지 린든은 이제 눈을 깜박였다. 대륙을 대표하는 상단을 이끄는 사람이라고 하기엔 너무 순진한 반응이었다.
이러한 생각이 무색하게도 린든은 곧 옅은 미소를 띠었다. 다정함은 여전했지만, 눈동자에 어린 이채는 저울질하는 상인이었다.
‘누가 매력 없는 공략캐라고 했더라?’
나는 린든을 공략하던 시절의 나를 향해 비아냥거렸다. 자극적인 이티엘과 단테를 공략한 뒤였으니 린든이 밋밋하고 재미없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눈앞에 마주해 보니 공략캐 중 제일 호감 가고 매력적인 건 린든이었다.
‘그냥 이대로 린든으로 밀고 쭉 가 버려?’
반짝 떠오른 충동에 솔깃한 것도 잠시, 나는 그 생각을 저 멀리 던져 버렸다. 현실에 순응하기엔 나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내 질문을 곰곰이 생각하던 린든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예술을 무척 사랑합니다. 그래서 예술가들에게 기회를 주는 대신, 그들의 작품을 보며 만족하고 기쁨을 얻습니다.”
“상단의 명성이나 이득 때문이 아니고요?”
“그 또한 이유 중 하나죠. 하지만 그건 부수적인 것일 뿐, 주가 아닙니다. 사업은 이해타산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서요.”
모든 것을 부드럽게 넘긴 린든은 이번엔 내게 질문을 던졌다.
“보아하니 영애께서는 원하는 것이 있는 모양이군요.”
“맞아요.”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 힘이 닿는 한 적극적으로 원조하겠습니다.”
“지금 같은 후원이라면 원하는 걸 얻는 건 영식뿐이에요.”
“영애는 눈에 띄는 걸 꺼리셨으니까요. 그러면…….”
“아니요. 방향이 조금 다를 뿐, 브누아 영식의 후원은 꼭 받고 싶어요.”
상인의 태도를 취한 린든의 얼굴에 궁금증이 퍼져 나갔다. 성미에 맞지 않게 빙빙 돌려 말한 보람이 있는지 알림음과 함께 시스템창이 나타났다.
[린든의 호감도가 20 올랐습니다. (70→90)]
착잡한 마음이 술렁이는 가운데, 나는 입을 열었다.
“영식께서 후원을 제의하신 이유는 제가 데스티니에게 선택받았기 때문이잖아요? 그건 바꿔 말하면 데스티니가 없는 전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말과 같아요.”
“그런…….”
린든은 그렇지 않다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나한테 관심을 보인 것부터가 데스티니에 걸린 마법 때문인걸.
그리고 머리로 안다고 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랬다면 성군으로 불리는 이티엘이 이러고 있지 않았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브누아 영식. 저는 마법의 바이올린을 가진 것에 가치를 둔 것이 아닌, 저 스스로에 대한 가치로 후원을 받고 싶어요.”
말을 끝맺음과 함께 정적이 찾아들었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린든을 보며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나는 공략캐들의 눈에 띌 일 없는 엑스트라였으니까.
스스로에 대한 가치를 운운하고 있지만 실은 이마저도 데스티니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그웨니르 영애.”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린든이 나를 불렀다.
“영애의 가치는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음, 글쎄요…. 현 상황에서는 단테 에레즈의 제자라는 이름이 가장 이목을 끌겠죠?”
“단테 에레즈라면…. 은의 현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 그놈의 은의 현자!
오글거리는 호칭이 괴로웠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웨니르 영애께서는 마법에 조예가 있으셨던 겁니까?”
“뭐, 그 비슷한 거 같더라고요.”
“대단하군요! 마법의 재능은 극소수에게만 발현되는 것이라고 들었는데, 은의 현자의 눈에 띌 정도면 상당한 것이 분명합니다.”
애매모호한 대답이었음에도 린든에게는 충분히 받아들여진 모양이었다.
나는 찜찜한 마음을 한편에 쌓아 둔 채로 물었다.
“그래서 어떨 것 같나요?”
이것도 별로라면 모두가 선택받기 원하는 데스티니를 버리려고 한다는 것으로 내 가치를 증명할 참이었다.
조금 긴장한 마음으로 대답을 기다리는 가운데, 고민 많은 표정의 린든이 옅은 미소를 띠었다.
“보람된 후원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