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16)화 (16/122)

제16화. 3장. 빌어먹을 이벤트 (5)

“푸흡…!”

린든은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덕분에 나는 머릿속에 물음표만 가득해졌다.

대체 이 치유캐의 웃음 포인트는 뭡니까?

내가 정신을 추슬러도 한번 터진 린든의 웃음은 좀처럼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저기, 브누아 영식?”

“아하하! 죄송합니다, 그웨니르 영애. 폐하의 표정을 생각하니 굉장히 유쾌해져서요.”

“부디 알아듣게 설명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편지는 아니지만, 저 꽃 중의 9할은 전부 폐하께서 보내신 겁니다. 저희 상단에서 공수해 온 꽃이거든요.”

아니, 이런 돌은 자를 보았나!

이티엘이 단단히 미친놈이란 건 알았지만 이런 식으로! 미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너무하잖아!

“……진작 말씀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암반수처럼 터져 나와 하늘까지 치솟은 억울한 마음은 볼멘소리로 터져 나왔다.

그런 나를 보는 린든은 웃음을 꾹 참았다.

“그렇게 세상 잃은 표정 짓지 않으셔도 됩니다. 폐하께서 이 정도로 심기가 틀어지거나 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해요?”

“폐하께서 이렇게까지 누군가에게 관심을 두는 것은 처음이니까요.”

그건 제가 아니라 이 망할 놈의 바이올린의 영향 때문이고요.

짜증이 머리까지 솟구치는 가운데 레이프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게 왜 황제는 그렇게 약해선.”

문득 이티엘의 집착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그런 설정을 추가했다는 개발자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3년도 전에 본 인터뷰가 기억난 것도 놀라운데 그 내용이 속을 박박 긁어서 굉장히 복합적인 기분이었다.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걱정하지 마시라는 겁니다.”

“아, 네…….”

그렇게 말한들 개운해지지는 않습니다만.

여기서 더 질질 끌려다닐 수 없던 터라 나는 화제를 전환했다.

“브누아 영식은 여기 왜 오신 건가요?”

“조만간 뵙겠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웨니르 영애와 대화를 해 보고 싶었어요. 줄곧 데스티니에게 선택받은 자는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거든요.”

원래라면 굉장히 예쁘고 상냥한 미인인 여주인공이 선택받은 자인데 이런 사람이라 미안합니다.

내 잘못이 아닌데도 죄책감이 드는 가운데, 모난 질문이 튀어 나갔다.

“그래서 실제로 본 소감은 어떤가요?”

“상상 이상으로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누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공략캐 아니랄까 봐 남다르게 말한다.

“음…….”

절로 흘러나온 탄식에 린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 말씀이 불편하신가요?”

“부정하진 않겠어요. 과찬이라고 생각해요.”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미인인 공략캐가 그런 말을 한들 설득력이 없기도 하고.

푸스스 웃는 린든은 무척이나 소탈했다.

“그웨니르 영애는 자신에게 엄격하신 분이군요.”

“객관적인 거죠.”

레이프나 이티엘처럼 살벌한 난이도를 가진 공략캐가 아닌 만큼 이 정도에 기분 상할 린든이 아니었다.

그는 굉장히 정중한 투로 대꾸했다.

“영애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요. 하지만 제게는 다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처음 보는 순간부터 시선을 뗄 수 없었는걸요.”

‘그건 데스티니의 마법 때문에 그런 거고요!’

그놈의 바이올린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이런 외침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화제, 화제를 돌리자!’

가만히 있으면 대화 내용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 이어질 것이 뻔했다.

“칭찬 감사해요, 브누아 영식. 이제 슬슬 연습을 해 볼까 하는데요.”

“알겠습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편히 연주해 주세요.”

반박하고 싶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신경 쓰는 사람이 지는 법이었다.

‘제발 지금 이대로만 가 줘라….’

네 명의 공략캐 중 호감도나 이벤트가 뜨지 않은 유일한 사람은 린든이었다.

그마저도 연주를 듣는 순간 사라지겠지만, 날개라도 단 듯 쑥쑥 오르는 공략캐들의 호감도를 보고 있으려니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생각이 많아졌다.”

레이프의 대꾸에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내 생각이 상대에게도 읽힐 수 있다는 것은 적응할 듯 적응되지 않았다.

지척에 다가온 레이프는 연주 자세를 잡은 나와 마주 서고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세이딘, 네게 이 상황이 거북한 건 알지만 나를 대할 때는 부디 즐거웠으면 해. 음악은 자유롭거든.”

‘사랑을 찾아 떠나자고 할 땐 언제고 즐기라는 말을 해?’

“그야 그건 그거고 음악은 음악이니까. 아, 뭣하면 음악과 사랑에 빠져도 괜찮아. 네 마음이 닿은 곳에는 분명 결실이 있을 테니까.”

음악이고 자시고 내가 원하는 것은 하루빨리 여주인공이 나타나 각자 갈 길 가는 거란다.

고개를 쳐들려는 강한 의지를 꾸역꾸역 누르고 어깨를 으쓱이며 연주를 시작했다.

이질적인 움직임에 맞추어 흘러나오는 음색은 어김없이 아름다웠다.

누군가를 홀리는 골치 아픈 마법만 없었다면 레이프의 말대로 좀 더 음악에 관심을 가졌을지도 몰랐다. 너무 팍팍한 탓에 원래 세계에서는 음악조차 즐길 여유가 없었으니까.

짧은 연주가 끝난 뒤, 선율이 사라진 방을 감도는 정적은 유독 존재감이 뚜렷했다.

―또로롱!

아이러니하게도 밀려오는 어색함을 떨쳐 낼 수 있었던 것은 지긋지긋하게 여기던 알림음이었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지만 시스템은 조금도 내 바람을 반영하지 않았다.

[린든의 호감도가 50 증가했습니다! (0→50)]

린든의 호감도는 지금껏 미동 없던 것이 무색하리만치 단번에 쑥 올랐다.

눈앞에 떠오른 상태창을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좋은 연주 감사합니다, 그웨니르 영애. 지금껏 들은 어떤 연주보다도 훌륭하군요. 압도되었습니다.”

데스티니의 연주를 듣고도 저렇게까지 담백하고 솔직하게 다가온 감상은 린든이 처음이었다.

과연 치유캐.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사람에게 스며들 줄 아네.

“방금 전 연주를 보니 왜 폐하께서 당신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알 것 같아요.”

“그, 런가요?”

그런 건 몰라도 되는데. 괜히 불안해지잖아.

린든이 대답했다.

“세상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데스티니의 음색과 온기 가득한 영애의 연주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마음을 울리거든요.”

제발 이런 예감은 스쳐 갔으면 좋겠다.

나는 치유캐 어쩌고 했던 감탄을 냉큼 취소하며 한 귀로 듣고 흘렸다.

“과찬이세요.”

“진심입니다. 허락하신다면 이후 영애의 활동을 응원하고 후원하고 싶을 정도로요.”

린든은 음악과 미술에 굉장히 관심이 많아서 예술가들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하곤 했다.

여주인공 또한 제의를 받았었다.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뻔질나게 엮이기 시작했고.

거기까지 생각하니 내 대답은 단 한 가지였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미 공략캐란 공략캐는 모두 엮인 마당에 이런 거절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할 수 있다면 한 명만이라도 피하고 싶었다.

딱딱하게 굳은 내 표정을 본 린든은 곧바로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물론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선택은 영애의 몫이죠.”

‘넘어……간 건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속으로는 의심을 거두지 못하면서도 입 밖으로 흘러나온 말은 기름처럼 매끄러웠다.

―또로롱!

하지만 신경을 긁는 알림음과 동시에 사람을 안심시키는 린든 특유의 미소와 마주친 순간, 의심을 거두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린든의 호감도가 20 올랐습니다. (50→70)]

[돌발 이벤트 ― 매력적인 제안]

후원자 린든의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 당신! 최대한 구미가 당기는 제안을 얻어 내세요.

▷보상 : 린든의 호감도 100 증가 / 평판 40 증가 / 스킬: 협상 lv.2 / 마도구(랜덤) 

*  *  *

“이 거지 같은 세상.”

나는 정원에서 가장 큰 나무 아래에 드러누운 채로 불만 어린 진심을 토해 냈다. 먹구름이 드리운 하늘처럼 거무죽죽한 내 마음과 달리, 시야에 펼쳐진 하늘은 유독 아름다웠다.

“너무 비관하지 말고 긍정적인 면을 생각하……, 세이딘, 너 지금 울어?”

노래하듯 아무 말이나 늘어놓던 레이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 울어! 눈이 시려서 그래!”

그래, 이건 어디까지나 하늘이 파란 탓이다. 쓸데없이 왜 이렇게 맑아서는 사람 마음을 술렁거리게 만들어?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되뇐 나는 더욱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며칠 전부터 내내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피운 탓에 이 이상 분노를 표출할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잘 생각해 봐, 세이딘. 이럴 때일수록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해야 해.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으니 이젠 올라가기만 하면 되잖아, 안 그래?”

“우연이네. 마침 그렇게 생각하는 네가 그런 말을 하니까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

“알잖아, 원래 남이 지적하면 더 그렇게 느끼는 법이야.”

그러면 알면서도 굳이 말을 하고 있다는 거잖아?

제정신이 아닌 머리 탓에 배드엔딩을 고려하지 않은 충동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또라이 같은 놈.”

“칭찬 고마워. 마법사는 좀 미쳐야 해.”

“…….”

생글생글 웃으며 고맙다는 말을 들으니 밀물처럼 솟아났던 분노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나저나 세이딘, 마탑엔 언제 갈 셈이야?”

레이프의 질문은 느닷없으면서도 당황스러웠다. 

“어쩐 일이야? 그렇게 단테를 경계했을 땐 언제고.”

“내 팬이라잖아. 이해해 줘야지.”

마법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던 네 주장이 아직도 내 귀에 생생한데요.

“마탑 가기 싫어했던 거 아니었어?”

“그건 의미 없는 고민에 머리를 싸매고 있는 놈들을 보기 싫어서 그랬던 거고. 어찌 됐건 귀찮고 까다로워도 엮인 놈들 중에서는 단테가 가장 다루기 쉽잖아.”

부정하고 싶은데 선뜻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게 슬플 따름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있잖아. 예를 들면 황제나 브누아 영식 같은 사람들.”

“황제? 짓궂긴. 네가 그놈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아는데 어떻게 잘해 보라고 해?”

지금껏 그렇게 했던 놈이 누군데!

“그리고 린든 브누아는…… 껄끄러워.”

“맞아, 그렇게 멀쩡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 마법에 휘둘리는 걸 보면 껄끄럽지.”

“그런 의미가 아냐. 그자는…….”

레이프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다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 수상쩍은 행동이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네 연인이 될 후보 중에서는 린든 브누아가 가장 괜찮지. 황제에게 밀리지 않을 정도의 힘도 지니고 있으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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