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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15)화 (15/122)

제15화. 3장. 빌어먹을 이벤트 (4)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서, 전 데스티니의 영향을 덜 받길 바라요.”

“할 수 있지만, 완전히 막는 것은 불가능해.”

“상관없어요. 이 이상 미친 듯이 환호하는 사람이 더 생기지 않길 바랄 뿐이에요.”

“그 정도라면 가능하지.”

짧은 말과 함께 성큼 다가온 단테는 내 이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순간 밀려오는 빛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빛이 사라짐과 동시에 단테가 말했다.

“이걸로 데스티니의 마법은 어느 정도 완화될 거다. 단, 영구적이 아니라 꾸준히 마법을 걸어야 해.”

“고마워요, 단테. 그래서 당신이 원하는 건…….”

“이걸 가지고 이틀에 한 번 내게 데스티니를 가지고 오면 된다.”

그렇게 말한 단테는 제 손에 꼈던 반지를 하나 건넸다. 딱 봐도 헐렁해 보였던 반지는 손에 끼자마자 내 사이즈에 딱 맞게 줄어들었다.

보아하니 마법의 반지 같은데 무슨 용도지?

“마탑의 좌표가 찍혀 있는 이동반지다. 장소를 말하면 거기에 데려다주지. 탑을 지키는 이들에게 반지를 보여 주면 알아서 내게 안내할 거야.”

어마어마한 걸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단테를 보며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남다르게 정신 나간 놈 같으니라고.

“우선 오늘은 여기까지 이야기하도록 하고, 이틀 후에 만나도록 하지.”

표정이 없던 단테의 얼굴에 희미하지만 확실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마치 꽃봉오리가 피어나는 순간처럼 찬란해서 무심코 넋을 놓고 보고 말았다.

그 속에서 단테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 자리에서 자취를 감췄다.

“하아…….”

오랜 긴장감에서 해방된 나는 깊은 한숨을 터뜨렸다. 피곤함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너무해, 세이딘.”

느닷없는 꿍얼거림의 주인은 불만스럽게 입을 비죽거렸다.

어쩐지 줄곧 조용하더라니, 왜 저런대?

“뭐가 너무해?”

“어떻게 날 두고 다른 남자의 마법을 받아들일 수 있어?”

“…….”

하루가 멀다 하고 헛소리를 갱신하는 레이프를 무시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으니 꾹 참고 한마디를 던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연주 때문에 저택에 모여들 얼간이들을 생각하면 이게 최선이라는 거 알잖아?”

“그 정도는 나도 해 줄 수 있는데.”

“봉인이 풀리면?”

“전부는 아니더라도 지금보다 더 풀리면…….”

“데스티니.”

입에서 흘러나간 내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레이프도 느낀 것인지 얼굴에 장난기가 달아나 있었다.

침묵을 깨고 답이 이어졌다.

“난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

오늘 연회에서 한 가지 확실해진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여주인공이었다.

원래라면 데스티니를 처음 봤던 날에 그녀도 그 자리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여주인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의도된 것처럼.

“초조해 보이네.”

나를 지켜보던 레이프가 천천히 입을 뗐다.

부정하진 않았다. 사실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없으니 이에 대한 것만 쏙 뺀 채로 대꾸했다.

“이렇게까지 사람들이 몰려올 줄은 몰랐어.”

“뭐, 무리도 아니지. 거기에 황제나 마탑의 마법사까지 있었으니 피곤할 법도 해.”

“잘 알면서 그런 말을 한 거란 거네?”

“그건 그거고, 서운한 건 서운한 거지.”

“…….”

스트레스가 상당하긴 한가 보다. 눈치를 보기보다 저놈의 멱살을 잡고 싶은 걸 보면.

“이런, 세이딘. 농담이니 그렇게 노려보지 마. 일단 네가 얼마나 압박을 받고 있는지는 잘 알았어. 내가 이런 말을 한 건 널 위해서야. 마법사들은 못 미덥거든.”

“넌 마법사가 아니고?”

“난 위대한 마법사니까 괜찮아.”

대체 그게 무슨 논리인지.

미간이 여전히 펴지지 않는 가운데, 레이프가 말을 이었다. 

“나보다 대단하진 않지만 어찌 됐건 내 마법에 걸리지 않은 자야. 그건 곧 속을 알 수 없다는 뜻이고. 그런 놈과 가까이 지낼 바에는 차라리 다른 놈들이 나아.”

조금 놀랐다. 언제나 속을 알 수 없는 레이프가 저 정도로 강하게 감정을 표현할 줄이야.

하지만 저마저도 분명 자신의 봉인을 풀기 위해서겠지.

“그런 건 걱정하지 마. 단테는 그럴 사람이 아냐.”

“그걸 어떻게 확신해?”

전에 공략해 본 적이 있거든요.

나는 입안에서 맴도는 말을 삼키며 말을 이어 나갔다.

“너에 대해서 말할 때 사람이 달라지잖아. 정말 좋아하지 않는 이상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

세상을 무미건조하게 바라보는 단테가 레이프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무수한 별처럼 찬연했다.

레이프도 이에 대해 동의하는 바인지 곧바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고르고 고른 한마디를 남길 뿐이었다.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을 거야. 너무 마음 주지 않았으면 해.”

“어쩐 일이야? 사랑을 찾아 떠나네 마네 이런 소리를 해 놓고.”

“그것도 사람 나름이지. 내 마법에 걸린 사람들은 속내를 알 수 있잖아?”

단호한 대답에 나는 입을 씰룩였다.

확실하게 날 연애시켜 봉인을 풀고자 하는 네놈의 마음은 아주 잘 알겠습니다, 네.

*  *  *

긴 연회의 밤이 지나고 다음 날.

내 예상은 한 치의 오차도 빗나가지 않고 정확히 들어맞았다.

“이게 뭐야…….”

“아, 세이딘 아가씨. 마침 잘 오셨습니다. 이것들을 어디에 두는 것이 좋겠습니까?”

“설마 이거 전부…….”

“네, 아가씨 앞으로 온 초대장과 편지들입니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집사 로우리의 대답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대연회가 바로 어젯밤이었는데 이렇게 빨리 그걸로 이렇게 몰려온다고?

몇 더미고 이어지는 하얀 봉투의 산을 끔찍하게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아가씨, 큰일 났어요!”

대문에서부터 부랴부랴 뛰어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앤이었다.

큰일이라고 한 것치고 그녀의 얼굴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나는 모순적인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앤?”

“오고 있어요.”

“뭐가?”

“꽃이 오고 있어요!”

심각하게 빈약한 설명과 함께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하얀 봉투의 산의 행렬 뒤로 알록달록 색채감이 물씬 나는 꽃이 파도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아, 급격히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앤, 저게 뭔지 설명 좀 해 줄래?”

“아가씨 앞으로 온 구혼이에요! 광장부터 계속 줄이 끊이지 않고 있다나 봐요. 잘됐네요!”

“잘됐다니, 뭐가?”

“앞으로 저분들을 다 차실 거잖아요. 보기 드문 재미를 놓치지 않으니 잘됐죠.”

나는 허허 웃어 버렸다. 앤에게 평범한 사고를 바란 내가 문제지, 문제야.

결국, 어떤 대꾸도 하지 못한 채로 깊은 한숨을 터뜨린 나는 다시 눈앞의 문제와 직면했다.

난 저 거지 같은 걸 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로우리.”

“네, 아가씨.”

“횃불을 가져와.”

“몇 개나 필요하신가요?”

“저걸 다 태워 버릴 수 있을 만큼.”

“알겠습니다.”

로우리는 더 의문을 품지 않고 곧장 횃불을 가지러 갔다. 다른 건 몰라도 아버지가 참 집사 하나는 잘 뒀단 말이야.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데 느닷없는 휘파람이 들려왔다.

“제법인데, 세이딘? 머리가 복잡할 텐데도 상황에 적절한 대처를 하니 말이야.”

“아니, 아직 부족해. 단지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었던 거지.”

“네가 만족하려면 어떤 걸 하고 싶은데?”

“…….”

“이런, 무서워라. 노려보지 마, 내 운명의 사람. 무서워.”

말은 저렇게 하지만 조금도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는 레이프는 굉장히 얄미웠다.

‘하, 저걸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이렇게 생각하지만 애초에 잘못은 오롯이 내게 있었으니 실제로 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무조건 탈출이다!’

이럴수록 다짐은 더욱 굳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단테의 반지를 사용해야겠어.’

의지에 반응한 데스티니는 어느새 내 손에 들려 있었다.

그 모습을 고스란히 본 레이프가 얼굴을 굳혔다. ‘설마 그놈에게 가려는 건 아니지?’라는 생각이 고스란히 표정에 드러났다.

하여간 눈치도 빨라요.

‘그럼 가자, 데스티…….’

그러나 내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그웨니르 영애?”

산들바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

집착하는 놈들만 득실거리는 이 게임 속에서 다정한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브누아… 영식?”

“기억해 주시는군요.”

짧게 대답한 린든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단정한 미소에 말문이 턱 막혔다.

성수 세례를 맞은 뱀파이어가 바로 딱 이런 기분이려나. 압도적인 치유력이 남다르네.

내가 정신 못 차리는 가운데, 린든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제가 날을 잘못 고른 모양이군요.”

“네?”

“연습을 하려 하시는 것 같아서요.”

린든의 말에 나는 손에 쥔 데스티니를 떠올렸다. 아, 이런.

“이건 그러니까…….”

여기서 린든이 나타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보니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연습하는 것을 구경해도 되겠습니까?”

내가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물음을 꺼낸 것은 린든이었다. 여름처럼 찬란한 청록빛 눈동자가 달처럼 휘어졌다.

“어젯밤에 들었던 연주가 귓가에 맴돌아서요. 절대 연습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상한 일이었다.

다른 공략캐들이라면 싫다고 했을 것이 분명한데 린든에게는 칼같이 거절할 수가 없었다.

‘치유캐라서 그런가?’

그렇게 생각하니 전부 납득이 되어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저러니까 린든, 린든, 했구나.

한편 내 허락이 떨어진 거라고 생각한 린든은 눈에 띄게 환한 표정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그웨니르 영애. 그럼 안내 잘 부탁드립니다.”

“하여간 세이딘은 어쩔 수 없다니까?”

이어지는 레이프의 추임새에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린든에게 홀린 걸 빤히 알고 저렇게 말하는 것이기에 민망함은 더욱 커져 갔다.

“그, 따라오세요!”

결국, 나는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린든과 함께 저택으로 들어왔다.

중간에 횃불을 든 로우리와 마주쳐 편지와 꽃을 태워 버릴 것을 요청한 것은 덤이었다.

“그웨니르 영애, 괜찮으십니까?”

“뭐가요?”

“방금 전 집사에게 명한 것 말입니다. 편지라든가, 꽃 말이에요.”

“그거라면 괜찮아요. 저에게 하등 필요 없는 것들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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