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3장. 빌어먹을 이벤트 (3)
너무 갑작스러워서 어버버 하는 나를 보며 이티엘은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짙은 미소를 지었다.
“다음에 보도록 하지, 은의 현자.”
돌아가겠다고 한 것도 잠시, 경쾌하게 문으로 향하던 이티엘은 지금껏 공기 취급하며 거들떠보지 않던 단테에게 느닷없는 인사를 던졌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단테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할 말만 남긴 채 떠나는 이티엘을 지켜볼 뿐.
“얼굴이 유감스러운 녀석이구나.”
황제에 대한 레이프의 감상에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누가 누구한테 그런 말을 하고 있어?
“왜 웃는 거지?”
고요한 물음에 나는 슬그머니 올라갔던 입꼬리를 내리며 대꾸했다.
“기가 막혀서요.”
“그런가.”
“…….”
뭐야, 질문은 본인이 해 놓고 머쓱한 분위기를 만들면 어쩌자는 건데?
고요한 호수를 연상시키는 푸른 눈동자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슬금슬금 밀려오는 침묵이 온몸을 짓누르려 할 때, 단테의 입이 달싹였다.
“매우 인상적인 대처였다.”
“네? 그게 무슨…….”
“날 두고 싸우지 말라던 것 말이야.”
“아!”
모든 피가 얼굴로 쏠렸다. 부끄러움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왜 그러지? 다시 몸이 안 좋아진 건가?”
“부끄러워하긴. 좀 더 당당하게 굴어도 되는데 말이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두 번 더 당당했다간 수치사로 죽겠다.
예고 없이 훅 들어온 정신적 데미지를 어찌어찌 추스른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보다 에레즈 님, 아직 안 끝난 이야기가 있었죠?”
“그렇긴 한데……. 의외로군. 네가 먼저 말을 꺼낼 줄이야.”
예상했으면 먼저 말을 꺼내면 좀 좋아?
나는 고개를 쳐든 불만을 쑤셔 넣으며 대꾸했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푹 쉬고 싶어서요.”
“그렇다면 빨리 끝내도록 하지.”
어쩐 일인지 단테는 고개까지 끄덕이며 순순히 내 말에 응했다.
“내 제자가 되면 된다.”
……는 무슨! 아까랑 똑같은 평행선이잖아!
“그 전에 꼭 들어야 할 말이 있어요. 어떻게 안 거죠?”
“아, 데스티니에서 해방되길 바라는 것 말이군. 말하지 않았나?”
전혀요. 들은 기억이 없는데요.
단호한 의지를 담아 고개를 젓자, 단테는 천천히 눈을 깜박이더니 곧 대답했다.
“생각하는 게 얼굴에 다 드러나더군. 그래, 지금처럼.”
꽉 찬 돌직구에 나는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며 한 가지 다짐했다. 지금부터라도 감정 숨기는 연습 좀 해야지, 안 되겠네.
“음, 세이딘. 난 언제나 네 편이 되어 주고 싶지만, 이에 대해선 저놈의 손을 들어 줄 수밖에 없네.”
레이프까지 한마디를 거드는 덕분에 나는 한층 더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마. 사람은 온전할 수 없다. 상황에 따라 존속 여부가 갈리기는 하지만, 네게 있어 이 경우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을 거다.”
“……어떻게 그렇게 장담하나요?”
“나는 데스티니를 원하고, 너는 데스티니와 멀어지길 바란다. 이해관계가 정확하게 일치하지. 그리고 현존하는 마법사 중 나를 넘어설 자는 아무도 없다.”
자신감 과잉일 수도 있겠지만 단테의 주장은 구구절절 옳았다. 심지어 결론이 빠진 마지막 말조차도.
“세이딘, 설마 순진하게 저 녀석의 말을 믿는 건 아니지? 이 봉인은 아무나 깰 수 없어.”
그렇게 정체를 숨기고 싶어 하던 레이프는 더 이상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알아,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 봐.’
제스처로 답하기엔 워낙 단테의 눈치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에 나는 속으로 대꾸했다.
그리고 다시 마주 본 상대에게 관심을 돌렸다.
“에레즈 님, 무슨 말인지 잘 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의 조건들은 현저히 제게 불리하기만 해요.”
원래의 나라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철저히 취향에 의거한 것이었다.
단테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대화법을 좋아했고 시도해 본 바, 결과는 훌륭했다.
“무엇을 원하지?”
짧은 물음과 달리 변화 없던 푸른 눈동자는 이채가 어렸다.
‘걸려들었구나!’
한편 나는 속으로 시커먼 미소를 지었다. 이거라면 이 지긋지긋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몰랐다.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받으며 나는 답했다.
“당신이 가진 능력 전부를 원해요.”
단테는 표정이 없었지만, 침묵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의문으로 가득했다.
압박을 견디지 못한 내가 입을 열었다.
“지금껏 듣도 보도 못한 개소리라도 들은 표정이시네요.”
“…이렇게까지 직설적이고 정열적인 구애를 들어 본 적은 처음이라 그렇다.”
아니, 얜 또 왜 이래?
뜬금없는 말에 머리가 아득한 가운데 이어지는 알림음이 신경을 자극했다.
―또로롱!
[단테의 호감도가 15 증가했습니다! (15→30)]
‘여기 놈들은 무슨 말 한마디만 하면 작업을 걸려고 해…….’
설탕기둥처럼 나약하기만 한 공략캐들의 호감도가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이건 게임 개발자들이 전적으로 잘못했다!
나는 배배 꼬이는 생각을 겨우겨우 구겨 넣으며 단호하게 대꾸했다.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에레즈 님께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당신의 능력에 관심이 있는 거예요.”
“그 또한 내 일부니 좋다는 말이나 다름없고.”
아무래도 단테는 사람의 의도를 멋대로 왜곡하고 해석하는 데 능숙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다른 공략캐들만큼이나 자존감이 넘쳐났고.
정정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여전히 내 앞에는 거슬리는 이벤트창이 있었으니까.
돌발 이벤트나 기간이 정해져 있는 이벤트의 경우, 카운트다운이 다 될 때까지 창을 닫을 수 없었다.
거기에 기절하기 전에 떴던 단테의 돌발 이벤트인 ‘제자가 되어라’도 다시 한번 30초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었다.
20초를 남겨 두고 조급해진 나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농담은 이쯤에서 끝내고 제 이야기를 들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제자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은 중요하지. 그래, 세이딘 그웨니르.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아직 제자가 아니래도?
“어느 정도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사람들의 이목을 받고 싶지 않아요. 에레즈 님의 제자가 되면 제가 바람과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는 거잖아요. 그런 리스크는 데스티니만으로도 충분해요.”
“흐음, 세이딘은 날 짐짝처럼 여기고 있었구나.”
레이프의 어투는 깃털처럼 가벼웠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의미는 바위처럼 무거웠다.
방글방글 웃는 얼굴과 달리, 나를 향한 호박색 눈동자는 따가워서 차마 쳐다볼 수가 없었다.
일단은 못 본 척해야지.
한편 내 말을 어떻게 들은 것인지 단테는 다소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내가 없으면 데스티니를 떼어 내기는 어렵다.”
“그래서 하는 말이에요. 그만큼 제가 짊어질 손해가 막심하니 당신도 그에 걸맞은 것을 저에게 주셔야죠.”
“거기에 부합한 것이 내 능력이고?”
“잘 아시네요.”
겉으로 볼 때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 같지만, 속은 조금도 그렇지 않았다.
점차적으로 쪼그라드는 가운데, 무표정하던 단테의 입가에 살짝 옅은 미소가 피어났다.
“흥미로운 발상이야.”
“…칭찬 감사해요. 요즘 유독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더라고요.”
“그러니 데스티니에게 선택받았겠지. 역시 레이프 유클리드.”
이 사람은 무슨 이야기만 하면 기승전 레이프로 이어지는구나.
어찌 됐건 다행인 것은 단테가 내 제안을 제법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충분히 의사를 전한 것 같으니 결론만 말할게요. 단테 에레즈 님, 어떤 상황에서든 전력으로 당신의 힘을 빌려주세요. 그런다면 기꺼이 당신의 제자가 되겠어요.”
“좋다.”
간단명료한 대답과 동시에 알림음이 울렸다.
[단테 돌발 이벤트 ― 내 제자가 되어라! 클리어!]
보상으로 단테의 호감도가 40 증가했습니다! (30→70)
평판이 20 증가했습니다!
[양다리 이벤트 ― 날 두고 싸우지 말아요! 클리어!]
보상으로 이티엘의 호감도가 80 증가했습니다! (50→130)
보상으로 단테의 호감도가 80 증가했습니다! (70→150)
보상으로 2000H를 받았습니다.
보상으로 내 정보가 업데이트 되었습니다.
지금껏 한 긴장이 무색할 정도로 허무한 결과에 절로 어깨가 축 늘어졌다.
‘아니. 뭘 시킬 건지 정도는 물어봐야죠, 이 사람아….’
이 게임, 이대로 괜찮을까?
“왜 그러지, 세이딘 그웨니르? 아까의 후유증이라도 있는 건가?”
“긴장이 풀려서 그래요. 매번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라서.”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을. 안타깝군.”
날 때부터 온몸에 잘난 아우라를 두른 사람이 소심한 일반인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자가 되었으니 세이딘, 이제 원하는 걸 말해 봐라.”
단테는 무심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귀신처럼 눈치가 빨랐다.
좋아, 지금껏 아껴 둔 보람이 있어.
“데스티니에 걸린 마법 말이에요. 에레즈 님이면……,”
“단테.”
“네?”
“사제 사이에 성은 의미 없다. 높일 필요도 없어. 단테로 충분해.”
왜 이 게임의 인물들은 죄다 이름을 못 불려서 안달인 거지?
“아니, 아무리 형식적인 사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제자가 스승의 이름을 찍찍 불러요?”
“내가 허락했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나?”
그래, 그게 맞다. 그게 맞는데…….
레이프에게 말을 놓는 것도 애를 먹었는데 하물며 만난 지 고작 몇 시간도 되지 않는 단테는 오죽할까.
난감함에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나를 보며 단테가 말을 이었다.
“내게 깍듯이 대하는 것은 마탑과 다른 사람들로 충분하다. 가까이 두기로 한 이상, 높임 받고 싶지 않아.”
평이한 어조에 실린 단호함에 나는 작은 한숨을 터뜨렸다.
어쩌겠어, 힘없는 사람이 고개를 숙이는 법인걸.
“알았어요, 단테.”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단테의 무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