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13)화 (13/122)

제13화. 3장. 빌어먹을 이벤트 (2)

[양다리 이벤트 ― 날 두고 싸우지 말아요!]

가시밭길을 선택한 당신! 이후의 꽃길을 위해 이티엘과 단테의 마음을 동시에 잡아 보세요!

▷조건: ‘날 두고 싸우지 말아요!’를 말할 것 / 두 인물의 신경전을 저지하고 관심을 이끌어 낼 것

▷보상 : 이티엘, 단테의 호감도 80 증가 / 2000H / 내 정보 업데이트

하도 기가 막힌 일의 연속이라서 그런지 노골적으로 속을 긁는 조건들이 딱히 거슬리지 않았다.

그보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보상이었다. 두 사람분의 이벤트인 만큼 성공하면 꽤 많은 것들이 따라왔다.

‘올, 꽤 짭짤한데?’

그중에서도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돈이었다. 돈이라도 많으면 여차할 때 도망갈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머리로 계산을 두들기는 것과 함께, 두 놈의 호감도를 체크했다.

‘이티엘이 30, 단테가 15…….’

호감도의 차이는 꽤 큰데, 왜 대하는 태도나 집착은 그놈이 그놈인 걸까?

소소한 의문과 함께 나는 기억을 쥐어짰다. 한 명 한 명 공략하는 것도 버거워서 양다리 이벤트를 해 본 적은 없었지만, 조금이라도 편안한 내 휴식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해야 했다.

“날 두고 싸우지 말아요!”

심호흡과 동시에 흘러나온 말에 기 싸움이 한창이던 두 남자가 멈칫했다. 듣도 보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야 나도 오글거린다. 여주인공이 아닌 이상 누가 이런 말을 하고 싶겠어?

그렇다 해서 이미 시작된 이벤트를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스스로를 도닥였다.

‘괜찮아, 세이딘. 할 수 있어. 최대한 무해하고 뻔뻔하게 굴자!’

그래, 한… 레이프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나는 평소 레이프의 행동들을 떠올리며 매우 서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좀 더 효과적으로 보이기 위해 주먹 쥔 손을 입가에 갖다 대는 건 덤이었다.

“너무해요. 저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면서 당사자를 제외하다뇨!”

별거 아닌 말임에도 냉기 풀풀 날리던 이티엘은 깜짝 놀란 듯 나를 바라보았고, 세상만사 관심 없는 것처럼 보였던 단테도 당황했는지 살짝 미간이 찌푸려져 있었다.

‘토, 통했다…! 혹시나 안 통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안도와 희열이 교차하는 한편, 그 뒤로 이어지는 것은 강한 후폭풍이었다.

‘하, 고작 이런 게 먹히다니……. 레이프는 인생 참 편하게 살았구나.’

이 말도 안 되는 일은 내가 데스티니를 연주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반면 레이프는 얼굴과 능력, 그리고 넉살 좋은 성격이 삼박자를 이룬 완전체였다. 그러니 조금만 말해도 주위에서 알아서 뭐든 해 줬겠지.

‘부럽다, 다 가진 놈…!’

“뭔진 몰라도 방금 굉장히 무례한 생각 하지 않았어, 세이딘?”

무서운 아이. 하여튼 이런 건 귀신같이 알아차려요.

레이프의 미소가 바늘이라도 된 것처럼 온 얼굴과 양심을 쿡쿡 찔러댔다.

나는 끈질기게 따라붙는 시선을 겨우 떨쳐 내고 입을 열었다.

“우선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 그웨니르 영애. 뭐든 말해 보아라.”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난 아무 말 안 했다? 뭐든 말하라고 한 건 너지.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내 인생에서 손에 꼽을 미친 짓이었다.

“제정신이세요?”

“뭐…?”

으와, 눈매 더러운 것 봐! 

가슴이 쪼그라들고 식은땀을 뻘뻘 흘린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되돌릴 수 없었다.

‘인생은 실전이지!’

나는 원래 세계에서 아득바득 끈질기게 살아남았던 경험을 곱씹으며 현실을 마주했다. 잘게 떨리는 손을 감추려 맞잡은 것은 덤이었다.

“폐하께서 제게 부탁하신 것은 데스티니를 이용해 제국을 안정시키는 것이었지, 스캔들에 휩싸이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 하지만 짐은 그대에게 청혼했지.”

“그렇다 해서 제 일에 관여하실 권한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웨니르 영애, 설마 그대는 받아들이지 않을 생각인가?”

어떻게 하면 사고가 그렇게 멀리 튀어 갈 수 있는지 누가 좀 알려 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겐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티엘에게는 아니었는지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떨렸다.

“짐을 거절한다고? 진심인가?”

“네.”

깔끔한 대답에 이티엘의 붉은 눈동자가 한층 더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그런…! 그럴 리가 없다. 짐은 이 제국의 황제고 미남이야. 거기에 다정하기까지 하지. 거절할 이유가 없을 텐데?”

영앤리치를 주장하던 레이프부터 시작해서 이놈의 게임 속 인물들은 어째 죄다 자존감이 넘치다 못해 터져 나냐?

물론 그들이 하는 말에 일말의 과장이나 거짓은 없었다. 선택적 행동은 있었지만.

나는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운 투로 설명을 했다.

“말씀대로 폐하는 꿈에 그린 듯 완벽한 군주시고.”

같은 편이 아니면 무자비한 폭군이지만.

“훌륭한 신랑감이세요.”

황제인 것만으로도 이미 훌륭하다 불리니까.

속으로 대꾸한 것들을 전부 숨긴 나는 살짝 눈을 내렸다. 강렬하다 못해 끈덕진 시선을 견디기 어려워서였다.

여기까지 말해도 되나 하는 고민 끝에 나는 해치지 않을 거라는 결론을 내리고 조심히 입을 열었다.

“문제는 제게 있어요.”

“마음에 품은 사람이 있는 건가?”

이티엘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긍정하는 순간, 곧장 그 상대를 찾아 쓱싹해 버릴 기세였다.

고개를 가로젓자, 이티엘은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

“혼담이 오가는 상대가 있나?”

“아니요.”

“백작이 빚을 졌어?”

“저희 금광은 언제나 성황리에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불치병이라도 앓는 건가?”

“체력은 저질이지만 저는 굉장히 건강하답니다, 폐하.”

“그러면 대체 뭐가 문제지?”

결론 없는 문답이 답답했는지 이티엘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데도 목소리 하나 높이지 않는 것을 보면 새삼 그가 얼마나 인내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데스티니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나는 한풀 꺾인 그를 향해 찬찬히 입을 열었다.

“폐하, 저는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그 한마디에 이티엘의 얼굴이 경악에 물들었다. 미소 속에 서늘함을 품던 남자가 시시각각 놀라는 모습은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짜릿했지만, 여운을 온전히 만끽할 시간은 없었다.

“결혼… 생각이 없다고……? 어째서지?”

“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껴서요. 물론 연애도 마찬가지고요.”

이어진 대답에 이티엘은 한층 더 충격에 휩싸였다.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 세계에서 귀족의 결혼은 가문이 엮여 있는 문제이기에 필수적인 책임이자 의무였다.

그러니 그에게 내 말은 곧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의미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웨니르 백작과 부인은…….”

“이미 알고 계세요. 어떤 선택이든 응원해 주시겠다 하셨고요.”

“…….”

“그리고 이 외에도 폐하와 결혼할 수 없는 이유는 또 있어요.”

“뭔가?”

“폐하도 알고 계시잖아요. 저에 대한 감정은 전부 데스티니의 마법 때문이라는 걸요.”

그 말에 이티엘은 할 말을 잃었다. 나는 조마조마하는 심정을 숨긴 채로 그를 살폈다.

호감도를 올리는 데 이런 말을 할 필요가 뭐가 있나 싶겠지만, 이티엘은 ‘너 같은 여자는 처음이야.’ 하며 반하는 타입이었다.

레이프와 결이 비슷한데도 다른 점이라면 그는 정복욕으로 불타는 직진남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집착 폭군 포지션이었겠지…….’

애초에 이 게임에서 집착하지 않는 놈이 없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 넘어가야지.

“후…….”

부담스러운 침묵 후에 이어진 것은 길고 긴 침묵이었다.

속눈썹이 만들어 낸 그림자가 걷힌 붉은 눈동자는 더 이상 미동이 없었다.

“재미있군.”

뜬금없는 말이었음에도 그다지 놀라지 않는 것은 예상 범위의 반응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이티엘의 얼굴에 여름 햇살 같은 미소가 번졌다.

“참 재미있어.”

―또로롱!

‘왔구나, 호감도!’

무섭고도 반가운 소리와 함께 허공에 알림이 떠올랐다.

[이티엘의 호감도가 20 증가했습니다! (30→50)]

알차게 오르는 호감도를 보며 나는 다시 한번 다짐했다.

‘앞으로는 이런 식으로 상황을 모면하지 말아야지.’

호감도가 최대 500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차다가는 눈 깜박할 사이에 엔딩을 볼 판이었다.

이럴수록 절실해지는 건 여주인공이었다. 나는 코 꿰이고 싶지 않아!

“솔직한 의견 감사하네, 그웨니르 영애. 그런데 그거 아나?”

다른 건 몰라도 별로 알고 싶지 않은 말을 할 거라는 건 확실히 알겠네요.

“선대 폐하 이후로 짐에게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말한 사람은 그대가 처음이야.”

역시나, 안 물어봤고 안 궁금한 말이었다.

“그런데도 하나도 기분 나쁘지 않은 걸 보면……, 짐은 어지간히 그대에게 빠진 듯해.”

얼굴을 찌푸리고 싶은 것을 겨우 참고 있는 가운데, 이티엘이 천천히 속삭였다.

“그대의 생각은 잘 알았으니 오늘은 돌아가도록 하겠어.”

내 생각을 전혀 모르는 이티엘이 앞으로 할 헛소리를 위한 밑밥을 깔았다.

“이 마음이 데스티니의 마법에 의한 것임은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 마음의 갈피를 잡는 것은 온전히 내 의지고 선택이야.”

‘완벽한 아무 말이네.’

“흐응, 개소리네.”

드물게 같은 의견을 드러낸 레이프가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고작 이 정도 마법에도 정신을 못 차리는 주제에 입만 살아선. 요즘 것들은 무모한 게 유행인가 봐?”

기분 나빠하는 건 충분히 이해하지만, 부디 단테에게 보였던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망언이라고 생각하나?”

“…….”

“어떻게 생각할지는 그대의 자유야. 그러니 짐은 그대의 마음을 잡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하지.”

성큼 다가온 이티엘이 대뜸 내 머리카락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태도로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부디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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