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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12)화 (12/122)

제12화. 3장. 빌어먹을 이벤트 (1)

따사로운 햇살에 이끌려 잠에서 깨고 부모님과 함께 느긋한 식사를 한다. 언제나 맛있는 디저트는 기다림 속에 소소한 행복이 있었다.

오후에는 책을 읽거나 정원을 걷고, 혹은 그날따라 하고 싶은 것들을 한다.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배웠고,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어디든 갔다.

남들이 보기엔 의미 없어 보여도 내게는 그런 일상이 무척이나 충실하고 행복했다.

원래 세계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안온함이었으니까.

가능하면 이대로 평생 살길 바랐다. 드디어 숨이 멎도록 달려왔던 지금까지의 인생을 보상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일상에 물들어 게임 속에서나 보던 바이올린이 신기하다고 의심 없이 손을 뻗은 것은.

“이 죽일 놈의 팬심.”

평소에는 기억에 없었으면서 왜 그런 때 떠올라?

과거의 나를 만날 수만 있다면 머리채를 뜯어서라도 꼭 말릴 거다. 

죽어도 데스티니는 쳐다보지도 말고 만지지 마! 도박, 마약에 이어 패가망신으로 가는 지름길이야!

‘정신이 들면 이번에는 꼭 제대로 여주인공을 찾아야…….’

다시 한번 굳은 다짐을 다지는 중, 느닷없이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팬심이 뭐야?”

“무언가를 너무 좋아해서 드는 마음이…….”

어라?

여기서 왜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지? 게다가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목소리인데.

‘……레이프?’

기어코 떠오른 이름에 나는 얼굴을 종잇장처럼 구겼다. 아무래도 의식이 현실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세이딘?”

한편 레이프는 재촉하듯 나를 불렀다.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리니 놀랐겠지.

“정신이 좀 들어?”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로 날아든 질문은 헤아릴 수 없는 별만큼이나 까마득한 고민을 만들어 냈다.

좀 더 꿈을 즐기고 싶은 마음이 큰 나는 결국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하며 미동 없이 있었다.

나는 아직 꿈속이다. 잠을 자고 있다.

“잠꼬대였나?”

웃음 섞인 중얼거림에도 나는 꿋꿋했다. 현실이 가깝다는 걸 인정하는 순간, 방금 전까지 행복했던 기분이 거품처럼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그래, 방금 전엔 잠꼬대를 한 것뿐이니까 조용히 퇴장하길 바라!

조금 양심이 찔리긴 했지만, 별수 없었다. 눈을 뜨면 시스템창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 거고, 그 뒤를 따라 단테가 제자 어쩌고 하면서 질척거리겠지.

물론 언젠가는 잠에서 깨야겠지만, 모든 공략캐를 동시다발적으로 만나 지친 내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그러니 부디 숙면을 위해서 이대로 조용히 꺼져 주세요!

사형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긴장 어린 시간이 흘러갔다.

‘왜 아무 말이 없지?’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말이 없자, 불안이 슬금슬금 고개를 쳐들고 존재감을 드러냈다.

레이프와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간 게임을 하면서 쌓인 경험에 따르면 그는 익살스러운 수다쟁이였다.

결국, 나는 외면하던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고 아주 작게 실눈을 떴다.

그곳에는 시야를 채울 만큼 가까운 거리에 호박색 눈동자가 있었다. 예상하던 바였다.

“아, 눈 떴다.”

얼핏 들을 때는 해맑은 혼잣말이지만, 그 안에는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엿보였다.

“계속 시치미 뗄 생각이라면 그래도 돼. 대신 이후 어떤 일이 벌어져도 난 책임 못 져.”

‘책임? 대체 무슨 일을 벌이는데 그런 말까지 튀어나오는 거야?’

의미심장한 말에 머릿속은 뒤죽박죽 꼬였고, 레이프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민망할 만큼 코앞이었던 거리가 무해할 정도로 멀어졌다.

“그렇게 놀라지 마. 농담이니까. 실은 지금 네가 일어나면 곤란해. 널 이렇게 만든 원흉이 있거든.”

‘그중에서도 가장 선두에 선 놈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도 기가 막힌 말에 잠결에 둥둥 떠다니던 의식이 단숨에 맑아졌다.

“너무해라. 난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널 돕는 사람인 것을. 내가 말한 건 황제와 단테야. 네가 일어나는 걸 보겠다고 몇 시간째 대기 중이지.”

와, 당장이라도 다시 기절하고 싶은 충동이 하늘을 찔렀다. 

단테야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이티엘은 대체 왜? 금붕어 똥이세요?

내 생각을 고스란히 느끼는 것인지 레이프는 꼬박꼬박 답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당연하지. 황제는 가뜩이나 마법이 잘 듣는 체질인 데다 네 연주를 두 번이나 들었잖아. 머릿속이 온통 너로 가득하다 못해 넘쳐흐를 거야.”

참 좋은 것만 전해 주네.

나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마음을 꾹꾹 억눌렀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도 딱히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택했다. 어차피 피곤해질 거 얼른 해치워 버리자!

“아가씨! 괜찮으세요?! 제가 누군진 알아보시고요?”

“물론이야, 앤. 그러니까 너무 호들갑 떨지 마.”

“호들갑이라뇨! 아가씨가 저택에 오시고 벌써 네 시간이나 지났어요. 거기다 방금 전까지 알 수 없는 말을 하셨는데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레이프에게 낚인 대답까지 콕 짚어 말하면 너무 민망하잖아.

그런 사정을 모르는 앤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마에 손을 대고 열을 쟀다.

“다행히 열은 떨어졌네요. 잠시 누워 계세요. 의사 선생님을 불러올게요!”

앤은 어떤 말을 할 틈도 주지 않고 곧장 밖으로 달려가 버렸다. 병자라고 부둥부둥 해 놓고 정작 문은 쾅 닫고 가 버리는 모순된 행동에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괜찮겠어?”

“별수 없잖아. 내가 일어날 때까지 눌러앉을 기세인데. 어느 쪽도 불편하다면 빨리 해결하는 게 나아.”

“……의외네.”

“뭐가?”

“난 네가 무척 여린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지금 보니…….”

말끝을 흐린 레이프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 위로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쳐 갔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여?’

한창 궁금증이 빵처럼 부풀어 오를 때였다.

“정신이 들었군.”

“괜찮은가, 그웨니르 영애?”

나직하게 울리는 목소리와 그 뒤를 잇는 급박한 목소리가 흐름을 끊어 버렸다.

‘감질나게 이게 무슨 짓이야!’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중요한 말이 아니더라도 이런 식으로 잘라 먹으면 어떤 형태로라도 여운이 남기 마련이었다.

“폐하, 그리고 마법사님. 마음은 이해 갑니다만, 그웨니르 영애는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그러니 진료가 끝날 때까지 잠시 물러서 주십시오.”

함께 방에 들어선 의사, 포트넘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지금만큼은 황제인 이티엘도, 마탑의 수장인 단테도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과연 황실 의사.

“기력이 약해지신 것을 제외하면 정상입니다. 보아하니 단시간에 스트레스가 쌓이신 모양이군요.”

천천히 꼼꼼하게 살핀 뒤, 포트넘이 꺼낸 첫마디는 마음에 깊이 와닿았다. 

나는 찡한 마음을 담아 말했다.

“명의시네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이런 늙은이에게 분에 넘치는 칭찬을 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모처럼의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마음이 누그러지는 가운데, 이티엘이 끼어들었다.

“정말로 그뿐인가, 포트넘? 쓰러졌는데?”

“물론입니다, 폐하. 이러니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라고 불리는 겁니다. 그웨니르 영애는 아직 젊으니 며칠 푹 쉬면 금방 회복할 겁니다.”

이티엘은 괜찮다는 포트넘의 말에도 성에 찰 때까지 몇 번이고 묻고 또 물었다. 정말이지 과보호와 진상의 끝을 달리는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그쯤 하세요, 폐하.”

내가 입을 연 것은 한 번 더 이티엘이 노의사를 닦달하려 들 때였다.

“포트넘 님께서 괜찮다고 하시잖아요.”

“하지만…….”

“폐하, 저 이러다 스트레스받아서 또 쓰러질 수도 있어요.”

네놈 때문에요.

공손하지 못한 말을 빼도 이티엘은 곧장 알아들었다. 살짝 찌푸린 미간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걸 드러냈지만, 모른 척했다.

“그럼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그웨니르 영애, 잘 아시겠지만 안정, 또 안정입니다.”

황제가 버티고 있어서인 건지, 아니면 성격이 그런 건지, 포트넘도 이티엘 못지않게 몇 번이고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의사가 떠나고, 내 방은 삽시간에 침묵으로 가득 찼다.

어색한 마음에 이리저리 눈을 굴려 보지만, 제국의 황제와 마탑의 수장, 그리고 내 눈에만 보이는 대마법사가 떡 버티고 있었다.

덕분에 가뜩이나 무거운 마음에 짐이 더해졌다.

“그웨니르 영애를 구해 줘서 고맙네, 은의 현자.”

고무줄처럼 당겨진 긴장 속에서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이티엘이었다. 마법에 단단히 홀린 탓인지 그는 내가 무슨 자신의 약혼자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그 와중에 저 칭호로 부르다니…….’

오글거리는 마음으로 오늘도 이 세계가 게임 속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군주의 미소를 띤 이티엘은 내 침대 근처에 선 뒤,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는 짐이 알아서 할 테니 그대는 이만 가 봐도 좋아.”

“제르아일의 황제, 배려는 감사하나 그럴 수 없다. 세이딘은 내게 맡기고 다망한 당신이 돌아가도록 해.”

내가 언제부터 너와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됐답니까? 정신을 잃은 동안 내적 친밀감이 대기권을 탈출했니?

이티엘 또한 그 점이 신경 쓰였는지 완벽한 미소에 옅은 금이 가 있었다.

“은의 현자, 지금 뭐라고…….”

“세이딘을 돌보겠다고 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지. 무슨 자격으로 그대가 그웨니르 영애를 맡는다는 건가?”

“이거 흥미로워지는데?”

숨 막힐 듯 팽팽한 경쟁 속에서도 레이프는 티 없이 밝기만 했다. 조금도 동의할 수 없던 나는 허허 웃음을 흘렸다.

고요히 이티엘을 바라보던 단테가 입을 열었다.

“자격이라면 충분히 있어. 세이딘은 내 제자거든.”

‘난 허락한 적이 없는데?’

“제자라고?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없어.”

‘당연하죠. 오늘 들은 말이거든요.’

당사자의 의견이라곤 고양이 털끝만큼도 포함되지 않은 공방은 팽팽하기만 했다.

‘어째 갈수록 심각해지니…….’

정말 울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시스템창!’

그저 생각한 것만으로 나타난 시스템창은 게임을 하던 때 봤던 것과 똑같았다.

나는 추억에 젖을 새도 없이 곧장 ‘도움말’을 제외한 메뉴를 뒤적였다.

별 볼 일 없는 내 정보와 궁금하지 않은 호감도를 지나 이벤트 목록을 살펴볼 차례였다.

눈이 빠져라 메인 이벤트와 물음표로 되어 있는 시크릿 및 돌발 이벤트를 훑던 나는 마침내 원하던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이거다!’

[양다리 이벤트]

다소 양심이 찔리는 종류의 이벤트였지만 어쩌겠어? 상황이 이런 걸 뭘. 일단 저놈들을 집으로 보내 버리는 것이 우선인 것을.

스스로를 납득시킨 나는 망설임 없이 이벤트를 선택했다.

[날 두고 싸우지 말아요!]

정말이지 어장관리 냄새가 풀풀 풍기는 제목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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