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2장. 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7)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나는 단호한 심정을 담아 고개를 저었다. 고요하게 따라붙는 시선이 어쩐지 그런 것도 모르냐고 하는 것 같아 괜히 찔렸다.
“데스티니는 최고의 바이올린 장인인 가스파르 페레슈가 남긴 최고이자 마지막인 명기다. 엘프의 숲에서만 자라는 산차나무로 만든 것으로 유명하지.”
“아, 네…….”
느닷없이 시작된 데스티니의 역사에 나는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단테는 조금도 나를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가스파르는 대마법사 레이프 유클리드였다.”
응?
갑자기 드러난 반전에 나는 힐끗 레이프를 보았다. 여전히 단테의 옆에 서 있던 그는 입꼬리만 끌어 올렸다.
“좀 거슬리네.”
화사한 미소와 달리, 조금도 웃지 않는 눈에 등골이 서늘했다.
“없앨까?”
지나가는 투로 뱉은 말에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지금껏 나 혼자서 졸아들었을 뿐, 레이프는 단 한 번도 진심으로 노골적인 감정을 내비친 적이 없었다.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나를 보며 레이프는 그제야 살짝 눈꼬리를 접었다.
“농담이야, 세이딘. 내가 그런 힘이 어디 있어? 그리고 전에도 말했듯이 살생을 하면 봉인을 풀 수 없어.”
왜 내 귀에는 힘이 돌아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을까?
나는 강한 마음을 담아 레이프를 쏘아보았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 할 거면 적어도 새로운 선택받은 자가 나타나면 하든가.’
적개심을 풀풀 날리던 레이프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얼마 후 김빠지는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그게 뭐야, 세이딘. 너무해. 이렇게 아름답고 귀여운 나를 두고 떠나겠다는 거야?”
너무한 게 누군데 그러는지 모르겠다. 조용히 살고 싶다는 사람 앞에서 왜 피바람을 예고하는 건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며 노려보기를 계속하자, 과장스러울 만큼 귀엽게 굴던 레이프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농담이야. 알았으니까 그렇게 무서운 표정 짓지 마.”
농담 두 번 듣다가 세상 로그아웃하게 생겼네.
이 필사적인 실랑이를 알 리 없는 단테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중얼거린 혼잣말이 대단히 예리했다.
“어쩐지 주위가 따끔거리는군.”
“모, 모기라도 있나 보죠.”
스스로가 생각해도 참 부실한 변명이었다.
더 파고들 생각은 없었는지 단테는 그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고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갑자기 제게 그런 말을 하시는 이유가 뭔가요?”
“데스티니는 엄청난 바이올린이다.”
“…….”
“못 믿겠지만 사실이다. 어쩌면 그 안에는 레이프 유클리드가 봉인되어 있을 가능성을 지니고 있어.”
“……네?”
너무 놀란 나머지 질문이 반사적으로 튀어 나갔다. 레이프를 만난 이후로 제일 충격적이고 파격적인 말이었다.
레이프의 눈동자가 다시 한번 날카로워지는 것을 보며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마탑에서 발견된 오래된 문헌에 나와 있었다. 그것 외에 다른 책에는 적혀 있는 바가 없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안 되겠네. 역시…….”
‘봉인 풀 거라면서요! 애먼 생각 하지 마!’
나는 속으로 레이프를 뜯어말리며 단테에게 질문을 던졌다.
“만약에 레이프 유클리드가 정말로 봉인되어 있다면 당신은 뭘 할 셈이죠?”
“……놀랍군. 거기까지 파악하다니.”
과연 이걸 파악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얼마나 사람을 무시하면 고작 이 정도로 감탄을 해?
형언할 수 없는 기분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가운데, 단테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자를 원한다.”
주어가 실종된 대답은 또다시 나를 물음표의 폭풍 속으로 이끌었다.
대체 누가 누구의 제자가 되는 건데요?
하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비록 3년 전의 일이긴 해도 나는 단테를 공략한 적이 있었다. 게임과 다른 전개라고 해도 저놈의 화법은 그대로일 테니 해석해 봐야지.
나는 기억을 다듬어 겨우 그의 뜻을 알아챘다.
“레이프 유클리드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말이죠?”
“그렇다.”
짧은 대답에 담긴 열기와 반짝이는 푸른 눈은 명백한 호의를 담고 있었다.
‘그렇다는데 어떻게 생각해?’
나는 레이프에게 시선을 던졌다.
방금 전까지 방긋방긋 웃으며 살기를 뿜어대던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순수한 미소를 지었다.
“그쪽이었으면 진작 말할 것이지. 추종자를 만나는 건 오랜만이네.”
저기요, 방금 전까지 죽이네 마네 하고 있지 않았어?
하고 싶은 말이 쌓여 가는 가운데, 단테는 담담한 얼굴로 열변을 토했다.
“사람들은 나에 대해 레이프 유클리드를 이을 마법사라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가 쓴 책 첫 줄을 읽었을 때, 난 발끝에도 미치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 레이프 유클리드는 전 역사를 통틀어 전에도 후에도 없을 위대한 마법사다.”
그렇게 칭찬을 늘어놓은들 나는 단테가 느낀 충격의 절반도 느낄 수 없었다.
‘위대한 건 몰라도 마법의 위력이 엄청나다는 건 잘 알지.’
데스티니를 켤 때마다 넘어오는 공략캐들과 수많은 사람이 그 증거였다.
그 뒤로도 레이프에 대한 극찬은 끊이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간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아 나는 조용히 사실을 찔렀다.
“그런데 레이프 유클리드가 데스티니에 봉인되어 있지 않다면요? 가능성이라는 건 아닐 수도 있는 거잖아요.”
“모르겠나?”
“뭘요?”
“세이딘 그웨니르, 내 제자가 되어라.”
지금까지는 어찌어찌 눈치껏 알아들었는데, 이건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떤 사고방식을 갖고 있길래 저런 결론이 나올 수 있는 거지?
“이거 생긴 거랑 다르게 완전 재미있는 놈이네?”
재미? 무슨 재미? 대체 어디가 재미있는 건데?
끝없이 늘어나는 물음표에 레이프가 티 하나 없이 맑게 대꾸했다.
“순수하게 원하는 것에 집중하는 점 말이야. 마법사라면 이 정도는 해야지.”
레이프는 언제 살벌한 소리를 늘어놨나 싶을 정도로 단테에게 무척이나 호의적이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런데 거기에 날 끌어들이지 말라고!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것이 무색하게 단테의 물음이 날아들었다.
“어떻게 생각하지?”
“거절합니다.”
“어째서?”
“그럴 목적이나 이유가 없으니까요. 전 마법에 관심 없어요. 그리고 결론을 말하기 전에 사정을 설명하는 게 먼저 아닌가요?”
주어 없이 자유롭고 제멋대로인 말을 듣고 있노라니 남은 것은 답답함과 짜증뿐이었다.
숨도 쉬지 않고 쏟아 낸 나를 비춘 단테의 눈동자는 의문으로 물들었다.
“왜지? 사정을 설명해 봐야 어차피 도달하는 건 결론이다.”
단테를 공략하던 시절이 떠오른 나는 쥐구멍으로 숨고 싶었다. 사회성이 결여된 공략캐가 성장하는 모습은 멀리서 구경해야 좋지, 실제로 겪으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같이 답답했다.
‘흑흑, 여주인공은 보살이야!’
새삼 여주인공의 존재가 얼마나 눈부신지 다시금 떠올렸다. 동시에 데스티니와 공략캐들에게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굳건해졌다.
“그리고 목적과 이유라면 있을 텐데?”
이번에도 단테의 물음은 예고 없이 날아들었다.
나는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을 더욱 꽉 쥐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주둥아리의 소유자인지라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단테는 그 모든 것을 간단히 부숴 버렸다.
“데스티니에게서 벗어나길 바라잖아. 아닌가?”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까맣게 내려앉은 어둠도,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별도, 밤을 속삭이는 바람도, 전부 까마득하게 느껴질 정도로 감각이 사라졌다.
“왜 그렇게 놀라지? 뭔가 문제라도 있나?”
“너무 문제가 많아서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성을 무시하고 달려 나간 대답에 단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도 이해 못 하겠다는 그 행동에 고구마가 목에 걸린 것처럼 목이 멨다.
“흐음, 그런 의도인 건가?”
이보다도 더 나를 갑갑하게 만드는 것은 저 괴랄한 말을 이해한 듯한 레이프였다.
‘뭔지 알아들었으면 설명 좀!’
눈을 부릅뜬 나와 맞닥뜨린 레이프는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불쌍한 세이딘. 많이 놀랐나 보네. 대단한 건 아냐. 단테는 내 봉인을 풀 연구를 수월하게 하려고 제자 운운한 거야. 마침 넌 내게서 자유롭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 당연히 허락할 거라 생각하는 거고.”
손이 절로 뒷목으로 올라갔다. 저 짧은 말에 이렇게 구구절절한 내용이 들어 있다는 것이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세이딘 그웨니르, 목은 왜 잡는 거지?”
“……말 걸지 말아요. 필사적으로 생각 정리 중이니까.”
다소 뾰족한 대꾸였음에도 단테는 군말 없이 내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괜히 머쓱해지게.
사실 저런 것은 전부 멋대로 나타나는 시스템창 앞에서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 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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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 : 마도구(랜덤) / 잊혀진 데스티니의 정보 / 단테의 호감도 40 증가
‘이 미친 시스템창….’
저번부터 느낀 거지만 이벤트 내용이 왜 저러니? 약 파니? 아니면 만들기 귀찮았니? 선택지 정도는 줄 수 있는 거잖아? 진짜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끊임없이 이어지는 의문과 불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줄곧 참고 있던 문제들은 이미 몸을 키울 대로 키워 이 이상 붙잡아 둘 수 없는 지경이었다.
‘아, 더는 못 참겠다…….’
빙글빙글 돌던 모든 기억이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그만두었다. 별로 가득히 수놓인 밤하늘이 점점 흐릿해졌다.
“어…. 세이딘!!”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레이프가 다급히 외쳤다. 기울어지던 시야에 잠깐이지만 미미하게 놀란 단테가 보였던 것 같기도 했다.
‘꼴좋다.’
얼마나 타격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거로 저 빌어먹을 놈들이 조금이라도 곤란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난감한 상황만을 쏟아 내는 시스템창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