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2장. 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6)
레이프는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시다.
이티엘은 가시를 품은 꽃처럼 아름답고 날카롭다.
그리고 눈앞의 린든은…….
‘시, 싱그러워……!’
마치 수풀이 우거진 삼림처럼 상쾌하고 정중해서 지난 며칠간 받은 피로가 싹 씻겨 나가는 것만 같았다.
‘이래서 린든 추종자들이 그렇게 린든, 린든, 하면서 울부짖었구나.’
게임을 플레이할 당시, 나는 린든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남자는 다정하고 조신한 게 최고다!
싱긋 웃은 린든은 깔끔하게 물러났다. 아닌 척하는 능구렁이 같은 놈들과 너무도 달랐다.
“세이딘, 정말 괜찮겠어?”
‘괜찮냐니, 뭐가?’
레이프의 물음에 시스템창에 새로이 뜬 린든의 이름을 보던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장 강한 방패 둘이 사라졌잖아.”
“가장 강한 방패……? 아.”
레이프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던 나는 얼굴을 굳혔다. 공략캐들의 존재감이 너무 큰 나머지 잠시 여기가 어디인지에 대해 간과하고 있었다.
린든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자, 주위를 맴돌던 귀족들이 단숨에 몰려들었다.
“그웨니르 영애,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어요. 저는 벨로타 파사디나라고 해요!”
“데스티니에게 선택된 분답게 굉장히 아름다운 분이시군요.”
“어쩜 그렇게 아름다운 연주를 할 수 있는 거죠?”
“그러니 선택받은 것이 아니겠어요?”
“하, 하하…….”
태어나서 처음 받는 관심은 폭포처럼 쏟아졌고, 덕분에 나는 저 멀리 날아가려는 정신을 붙잡느라 한참을 고생해야 했다.
* * *
“아……. 죽다 살아났네.”
끊임없이 몰아치는 사람들을 겨우 따돌리고 테라스로 나온 나는 짙은 한숨을 터뜨렸다.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기만 했다.
나는 구두를 벗고 기둥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답답함이 한결 편안해졌다.
진정을 찾아 가는 중, 귓가에 나직한 웃음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레이프였다.
“우리 아가씨는 참 상냥하단 말이야. 마법에 걸린 자들까지 신경을 써 주고.”
“내가 언제 신경을 썼다고 그래? 되는대로 아무 말이나 던지던 거 못 봤어?”
“아무 말이라면 ‘화장실이 너무너무 급하다’라는 것 말이야?”
“으아아악! 데스티니!”
“하하, 별것도 아닌 거로 부끄러워하긴. 그들은 네가 어떤 말을 해도 귀엽고 사랑스러울걸? 설령 네가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 말이야.”
갑자기 장르를 연애 시뮬레이션에서 스릴러로 바꾸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데스티니, 무서운 말 하지 마.”
종잇장처럼 일그러진 내 표정을 본 레이프는 낄낄 웃었다.
“세이딘도 참, 예를 들면 그렇다는 거지. 그래도 마법이 오래 지속되지 않아서 다행이야. 만약 그랬다면 널 차지하기 위해 온 대륙에 피바람이 불었을걸?”
“하……. 듣기만 해도 끔찍하네.”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여주인공만 찾으면 어떻게든 될 거라 믿었던 과거의 나를 매우 때려 주고 싶었다.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 세이딘. 그래도 아주 나쁜 일만 있었던 건 아니잖아? 린든 브누아라고 했던가? 그 남자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한 눈치니 한번 친해져 보는 것도…….”
“안 돼!”
단호한 외침에 레이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쏟아질 듯 반짝이는 별만큼이나 빛나는 호박색 눈동자는 아름다웠지만, 앞으로의 인생이 달린 일 앞에서 그런 것에 넋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잘 들어, 데스티니. 저번에도 말했지만, 난 얇고 길고 즐겁게 살 거야.”
“그렇다면 사랑과 연애도 그 속에 충분히 포함되잖아?”
“내 욜로엔 그런 거 없어. 아니, 적어도 폐하나 린든은 포함되지 않아.”
나는 딱 잘라 말했다.
여주인공과의 연애 전선이 진전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건 재미있지만, 그 대상이 내가 되는 건 끔찍했다. 공략캐들과의 연애는 욜로와 매우 거리가 먼 것이었으니까.
그런 나를 보던 레이프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거참, 겁이 많은 건지 대담한 건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자유였기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테라스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아쉬워 조금 더 바라보다 갈 생각이었다.
“아, 여기에 있었군.”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찾았다, 세이딘 그웨니르.”
낯선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나는 얼굴을 굳혔다. 나왔다, 마지막 공략캐!
달을 머금은 듯한 긴 은발, 그리고 선명한 여름 하늘을 연상시키는 푸른 눈을 가진 남자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덧없어 보였다. 거기에 헉 소리 나오는 미모까지 더해지니 더욱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단테 에레즈…….’
마탑의 수장, 혹은 은의 현자라고 불리는 그는 레이프 이후로 대마법사 칭호를 받은 유일한 마법사였다.
이 정도로 눈에 띄는데도 연회장에서 보이지 않았던 걸 보면 위장마법을 쓰고 있던 모양이었다.
‘설마 들은 건 아니겠지?’
다른 사람의 눈엔 레이프가 보이지 않으니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 분명했다. 그것만으로도 골치 아픈데 이야기 내용을 들었다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또다시 긴장이 온몸을 덮쳐 왔다.
게임 내용대로 흘러가면 좋겠지만, 방금 전 그렇지 않았던 린든의 사례가 있는 만큼 방심할 수 없었다. 내가 아는 단테는 린든처럼 말을 해서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세이딘 그웨니르.”
테라스를 감돌던 정적 속에서 단테가 나를 불렀다. 대답을 바란 것이 아니라는 건 아는데도 고개가 절로 까딱거렸다.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던 푸른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작은 불씨를 품은 그는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묻고 싶은 게 있다.”
네, 궁금하시면 물어보셔야죠. 그 전에….
“스톱!”
“…뭐?”
“거기까지. 딱 이 거리를 유지해 주세요.”
공략캐와의 조우가 전만큼 당황스럽지 않다고는 하지만, 연달아 발생하는 만남은 부담스러웠다.
―또로롱!
이거 봐라, 아무것도 안 했는데 호감도 오르는 거.
나는 애써 시스템창을 외면하며 단테를 향해 더욱 눈에 힘을 주었다.
“해치지 않으니 안심해라.”
아무래도 단테는 단단히 오해를 하는 모양이었다.
차라리 잘됐다. 네 호감도가 얼마나 올랐는지 보는 게 두려워서 그런다, 혹은 네놈의 외모에 홀리지 않기 위해 거리를 뒀다고 할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
단테는 말없이 눈만 부라리고 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양손을 들고 한두 발자국 물러났다.
‘해치지 않아요’라는 의도가 다분한 그 태도에 먹이사슬 최하층의 초식동물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묘해졌다.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신사님. 그런데 실례지만 우리가 어디서 만난 적이 있던가요? 이렇게 멋진 분을 뵌 기억이 없어서요.”
다행히도 단테는 ‘네놈은 누구냐?’라는 귀족식 화법 정도는 알아듣는 모양이었다. 그는 가슴에 손을 얹어 인사를 했다.
“소개가 늦어 미안하다. 마탑의 수장, 단테 에레즈다.”
“만나서 반가워요, 에레즈 님. 세이딘 그웨니르예요. 제게 궁금한 것이 무엇인가요?”
“아까 그건 뭐지?”
주어 없이 직진인 단테의 화법에 잠시 의식이 달까지 날아갔다 돌아왔다.
게임으로 익히 알고 있던 바였지만, 실제로 겪어 보니 상상 이상으로 정신력을 소모했다.
“죄송하지만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단테는 되레 놀라 물었다.
“모르는 건가?”
“…….”
그거로 뭘 알겠니?
대답 대신 침묵으로 빤히 쳐다보자 단테는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가 싶더니 곧 말문을 열었다.
“연주에 대해서다. 어떻게 데스티니가 그렇게 형편없는 소리를 낼 수 있지?”
“…네?”
사람들이 극찬한 연주는 내 귀에도 유감스러울 만큼 감미롭고 아름다웠다. 심지어 레이프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 속에서 단테만이 연주가 형편없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뭐야, 마법이 안 통한 거야?’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게임 전개를 따라가기만도 벅찬데 자꾸 기존과 다른 상황이 따라붙으니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신나게 머리를 굴리던 머릿속으로 그럴듯한 가설이 지나갔다.
‘설마 내가 연주를 못해서 그런 건가?’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게임 속의 여주인공은 마법의 바이올린이 없어도 아름다운 연주를 한다는 설정이었으니까.
‘아름다운 연주군.’
그러니 단테도 첫 만남에서 그렇게 찬사를 보냈겠지.
‘흑흑, 실력으로 사람을 가르는 더러운 세상.’
다 됐고 하루라도 빨리 이 여주인공 버프에서 벗어나고 싶을 따름이었다.
“흐음, 이자도 생긴 건 나쁘지 않네?”
가벼운 말투에 이끌려 고개를 든 나는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레이프가 코가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단테를 뚫어지라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뭐 하는 거야!!!’
나는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외침을 억지로 참았다.
미남은 좋다. 거기에 미남이 나란히 서 있으면 더 좋다.
하지만 저건 좋은 걸 넘어서 심장에 좋지 않았다. 저러다 들키면 뭐라고 설명할 건데?!
행여나 들킬까 걱정하는 나와 달리, 단테를 요모조모 뜯어본 레이프는 봄날처럼 화사한 미소를 피워 냈다.
“세이딘, 또 걱정한다. 고작 이 정도 힘을 가진 놈에게 내가 보일 리 없어.”
‘마법이 통하지 않은 건 뭐로 설명할 건데?’
“내게 걸린 마법은 일정 수준 이상의 마법사들에겐 통하지 않아. 그런 걸 보면 저놈은 그 정도는 되는 모양이네.”
어쩐지 변명처럼 들리는 건 내 착각일까?
하지만 구태여 짚을 필요는 없기에 나는 레이프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거로 답을 대신했다.
“그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지 않는다.”
잠시 단테를 잊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는 느닷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내가 의아했을 것이었다.
나는 대충 둘러댔다.
“대답이 아니라 잠시 생각 좀 했어요. 그런 말을 한 건 당신이 처음이어서요.”
“데스티니에 마법이 걸려 있다는 것은 알고 있나 보군.”
“뭐, 그렇죠. 연주를 하면 사람들이 죄다 돌변하는데 모를 수가 있나요?”
와, 능청스럽기도 해라. 양어깨가 무거운데도 술술 아무 말이나 해대는 걸 보면 어쩌면 연기자 기질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사기꾼 기질이 있거나.
단테의 대꾸는 내가 상상의 나래로 저 멀리 가 버리기 직전에 현실로 데려다 놓았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지.”
“그건 저도 모르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놀랐고요.”
“그런 건가.”
도돌이표처럼 돌아오는 질문에 나는 입을 앙다물었다. 벌써부터 답답한 기분이 온몸을 감쌌다.
“혹시 데스티니가 생겨난 유래를 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