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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9)화 (9/122)

제9화. 2장. 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5)

같잖은 조언에 따라 나는 팔을 들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들던 그것은 자석처럼 내 손에 착 붙었다.

“저게 무슨…!”

“방금…, 데스티니 맞죠?”

“하늘을 나는 바이올린이라니…….”

술렁거림은 아까보다 한층 더 커졌다. 온갖 것이 존재하는 판타지 세계라고 해도, 눈앞에서 마법을 볼 기회가 드물다 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니 그런 세계에 살지 않았던 나는 얼마나 놀랐을까.

‘뭐지? 뭐야? 갑자기 왜 날아?’

“주목받는 게 싫다고 했잖아. 그래서 관심을 돌려 봤어.”

정확히 내 마음을 읽은 듯한 대꾸였다. 나는 황당함을 금치 못하고 상대를 바라보았다. 

관심을 돌리기는커녕, 더 눈에 띄고 있잖아!

말 대신 눈으로 욕을 쏟아 내는데도 레이프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할 뿐, 어떤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샹들리에보다 더 반짝이는 미소를 그린 그가 찬찬히 입을 열었다.

“기선 제압은 확실히 해 둬야지.”

‘결국 그게 목적이구만! 어디서 약을 팔아?!’

사람은 적응의 생물이었다. 황당한 상황이 계속되니 이제 놀라기보다는 기가 막혀 헛웃음만 입안에 맴돌았다.

한편 이를 모르는 레이프는 얼굴을 구긴 내게 예쁘게 눈을 접었다.

“이런, 세이딘. 약을 판다니. 이건 널 위해서니 오해하지 않았으면 해. 세월이 지나도 이런 자들의 습성은 쉽게 변하지 않아. 그러니 다소 유치하기는 해도 압도적인 격차로 눌러 주는 것이 가장 빠르고 편한 방법이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거들먹거리던 스타비드 공작은 데스티니가 날아온 것만으로도 입을 다물고 말았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내 생각을 알았지?’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 새도 없이 레이프는 말을 이어 갔다.

“아무래도 계약의 영향인 것 같아. 아, 그래도 걱정하지 마! 네 생각을 전부 읽을 수 있는 건 아니거든.”

머리가 지끈거렸다.

‘무슨 놈의 바이올린 한번 만졌다가 이게 무슨 일이람? 생각도 맘대로 못 하게 생겼어!’

머릿속이 이리저리 엉키는 것을 느낀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하자.’

지금 따져 봐야 더 머리만 복잡해질 뿐이니까.

레이프가 한 손을 가슴에 얹고 살짝 허리를 숙였다. 귀족식 인사였다.

“레이디가 원한다면 얼마든지요.”

‘하여간 말은 잘해요.’

나는 작은 한숨을 터뜨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체감상 굉장히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수군대고 있었으니까.

“그웨니르 영애, 괜찮나?”

하지만 그 속에서도 이티엘만큼은 걱정 어린 말을 건넸다.

놀랄 만도 했다. 그의 눈에는 내가 갑자기 날아온 데스티니를 잡고 그대로 굳어 버린 것도 모자라 혼잣말까지 중얼거리는 것처럼 보일 테니 말이다.

“네, 전 괜찮아요. 잠깐 놀랐을 뿐이에요.”

‘네놈이 걱정하지 않아도 약속은 지킬 거란다.’

적절한 선을 긋는 대답과 미소에 이티엘은 조금 움찔하는가 싶더니 더 묻지 않았다.

이티엘을 뒤로한 나는 사람들 앞에 섰다. 긴장한 탓인지 데스티니를 쥔 손에서 축축한 물기가 느껴졌다.

‘얼른 해치우자.’

매도 얼른 맞는 것이 낫다고, 빨리 연주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이래서 이불 밖이 위험한 거야!

나는 데스티니를 잡았다. 그간 적응해서일까, 맘대로 자세를 잡는 바이올린이 전만큼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술렁거림 속에서 연주가 시작되었다.

심드렁했던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하나둘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얼마 가지 않아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정확히 이티엘이 밟았던 전철이었다.

“와아아!!”

“천상의 소리, 그 자체야!”

“브라보!”

실력이 조금도 반영되지 않은 연주가 끝난 후, 연회장은 환호와 찬사로 가득했다.

물론 그 속에는 스타비드 공작도 있었다. 노골적으로 나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그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브라보를 외치고 있었다.

‘무섭다, 마법의 힘…….’

이미 이티엘 및 집안사람들을 통해 겪은 일이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단번에 태도를 바꾸는 모습은 좀처럼 적응되지 않았다.

“역시 대단한 연주로군, 그웨니르 영애.”

가장 가까이서 듣고 있던 이티엘이 박수를 치며 내 곁에 다가왔다. 쏟아지는 열광 속에서 그는 나만 들을 수 있는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그대에게 부탁하길 잘했어. 저 완고한 영감을 비롯해 이 안의 모든 사람을 단번에 사로잡을 정도의 강력한 마법이라면 얼마 가지 않아 제국도 안정되겠지.”

“하하, 감사합니다.”

어색한 감사와 함께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부드러운 어투와 달리, 이티엘의 눈동자는 불을 품고 있었다.

익히 경험한 바가 있는 감정에 마음을 졸이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난감하군.”

의미심장한 한마디에 불안감이 더욱 증가했다. 나를 향한 시선은 이제 뒤통수가 따갑다 못해 뚫릴 정도로 뜨거웠다.

“머리로는 마법의 영향이라는 걸 알면서도 눈과 마음이 먼저 그대를 좇게 돼.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나?”

“글…쎄요?”

나는 댁의 마음에 조금도 관심 없습니다. 그 마음, 여주인공을 위해 아껴 두세요!

이러한 필사적인 몸부림과 무언의 시위 속에서도 현실은 잔인했다.

이제는 불길하게만 들릴 뿐인 알림음과 함께 눈앞에 글자가 나타났다.

[이티엘 돌발 이벤트 ― 싹트는 마음]

이티엘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이벤트입니다.

30초 후, 시작됩니다.

▷보상: 이티엘의 호감도 40 증가 / 평판 20 증가

‘이 죠X퐁에 말아 먹어도 시원찮을 시스템아!’

나는 이를 가는 대신, 눈이 튀어나와라 시스템창을 노려보았다. 

하다못해 ‘예/아니오’로 의사라도 물어봐 주면 덧나냐!

“너무하십니다, 폐하.”

갑자기 날아든 한마디에 날파리만큼 거슬리던 시스템창이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이렇게 매력적인 레이디를 혼자 독점하려 하시다니요. 부디 제게도 그분과 대화할 기회를 주십시오.”

숲에 부는 바람처럼 다정함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에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고개를 들었다.

그는 나무를 연상시키는 사람이었다. 햇빛을 머금은 듯한 옅은 갈색 머리카락과 그 아래로 빛나는 청록빛 눈동자는 막 싹을 틔운 나뭇잎을 연상케 했다.

‘엘프인가?’

화려한 연회장이 전부 숲으로 보일 만큼 자연 친화적이고 비현실적인 외모에 생각이 무심코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 가 버렸다.

‘근데 왜 이렇게 낯이 익……. 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얼굴을 굳혔다.

낯이 익을 수밖에 없었다. 이 수많은 사람 속에서도 압도적인 외모를 가진 것은 공략캐인 남자주인공들뿐이었다.

그리고 저 남자는 분명…….

“여전히 발칙하군, 린든 브누아 영식.”

그랬다. 린든 브누아.

브누아 후작가의 차남이자, 헤브론 상단을 온 대륙에 알린 수완 좋은 젊은 상단주.

언제나 다정다감하고 배려심 많은 성격으로 여주인공의 곁을 지켜 수많은 플레이어의 힐링을 담당하던 인물이었다.

‘이로써 세 명…….’

이미 둘이나 겪었기 때문일까. 공략캐와 조우했다고 해서 더 이상 놀라지는 않았다. 머리가 좀 아플 뿐이지.

한편 이티엘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로 질문을 던졌다.

“공사다망한 이가 어쩐 일로 이런 곳에 있지?”

“몇 년 만에 열린 대연회인데 불참할 수 없는 일이죠. 게다가 폐하만큼 공사다망하겠습니까?”

“하여간 말은 잘하는군.”

“제 사업 수단이니까요. 칭찬 감사합니다.”

그들의 대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봄바람처럼 따스한 어조였지만, 오가는 내용은 가시처럼 뾰족하기 그지없었다.

그럼에도 어떤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린든과 이티엘이 오랜 친우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폐하, 계속해서 레이디를 독점하실 생각이십니까?”

린든은 밀크티처럼 부드러운 미소로 재차 물었다.

그 말에 이티엘의 미간은 좀 더 깊게 팼다.

“이후에 보도록 하지.”

내 귀에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는 짙은 아쉬움이 가득했다. 반면 내게서 멀어지는 이티엘은 그런 기색은 조금도 내비치지 않았다.

‘음, 일단 이벤트는 피한 거지?’

다시 보자는 말이 무섭긴 했지만, 그래도 다행이었다. 아무리 돌발 상황에 익숙해져 간다고 해도 그건 좀 아니었거든.

“세이딘 그웨니르 영애?”

멀어진 이티엘의 자리를 대신한 린든이 내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린든 브누아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브누아 영식.”

“갑자기 놀라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그웨니르 영애.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과 대화를 할 수 없을 것 같아서요.”

“아, 네…….”

떨떠름한 대답을 하자, 린든이 곧바로 물었다.

“영애는 제가 불편하신가요?”

“편하다고 할 수는 없겠네요.”

어떻게 편하겠니. 너와 나는 만날 일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는걸.

린든이 아무리 호의 가득한 투로 말을 한들, 내게는 데스티니에게 홀린 사람일 뿐이었다. 이티엘을 비롯해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또한 그러했고.

린든은 조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곧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제 생각이 짧았군요. 무례를 용서하세요. 마음이 앞선 나머지 영애를 배려하지 못했습니다.”

느닷없이 날아든 정중한 사과에 나는 괜한 화풀이를 했나 싶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린든의 역습이 돌아왔다.

“그런 의미에서 그웨니르 영애, 실수를 만회할 수 있도록 저에게 당신을 대접할 기회를 주지 않겠습니까?”

내가 황제를 상대로는 함부로 말을 할 수 없지만, 상대는 후작가의 사람이었다.

물론 백작가인 그웨니르 가보다 훨씬 높은 작위이긴 하지만 황제보다는 아래이니 상대적으로 말을 꺼내기가 편했다.

“브누아 영식, 마음은 감사하지만 이런 제의를 받을 정도로 기분 상할 만한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니 괘념치 마세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어? 아까도 그렇고 왜 이렇게 순순해?

지금껏 내 말은 들어 먹을 생각도 안 하던 놈들과 있다가 막상 흔쾌한 동의를 듣게 되니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었다.

거리감을 유지하던 린든이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불편해하는 나를 배려하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행동이었다.

마침내 지척에 선 린든이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언젠가 다시 뵐 수 있는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그웨니르 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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