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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8)화 (8/122)

제8화. 2장. 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4)

상큼한 미소로 개소리 한번 거하게 하네.

온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내 모습이 고스란히 호박빛 눈동자에 비쳤다.

“이런, 세이딘.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 줘. 경험상 고민해서 아무것도 나아지는 게 없을 때는 행동으로 옮기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어서 한 조언일 뿐이야. 싫으면 받아들이지 않아도 돼.”

레이프가 저런 말을 하는 것은 내가 거절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저 말을 믿었다가 도달한 수많은 배드엔딩이 머릿속을 스쳤다.

“치사한 놈.”

“칭찬 고마워. 세이딘도 솔직하지 못한 모습이 귀여워.”

나는 한숨을 푹 내쉰 뒤, 입을 꾹 다물었다. 의사소통이 통하지 않는 대화를 진행한들 피곤하기만 할 뿐이었다.

*  *  *

해처럼 반짝이는 샹들리에는 사람보다도 컸다. 그 아래로 빛나는 대리석 기둥과 바닥은 눈처럼 하얬다. 거기에 저마다 다채롭게 치장한 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무색할 만큼 화려했다.

빙의해서 처음으로 맞는 대연회는 과연 소문 이상으로 규모가 엄청났다. 

그러나 순수한 감탄이 나오는 것과 별개로, 나는 이 상황을 조금도 즐길 수 없었다.

화려한 조명이 감싼 것도 모자라 수많은 시선이 내게로 쏟아지고 있었으니까.

“저 영애가 데스티니의 선택을 받은 건가요?”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데.”

“신께 선택될 정도니 특출난 무언가가 있겠죠.”

“어느 가문 출신이지?”

“그웨니르 백작이래요. 그 왜, 금광왕이요.”

“아……. 그러고 보니 딸이 하나 있다고 들었던 거 같네요.”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소리에 나는 피식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과 동시에 식은땀이 났다. 고작 3년 정도 평온한 생활을 한 것뿐인데도 거기에 적응한 나머지 사람들의 관심이 무섭게만 느껴졌다.

이대로 가면 우리 백작님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까지 흘러가겠어.

“사돈의 팔촌까지 파헤칠 기세인걸?”

마치 생각을 고스란히 읽은 듯한 말이었다. 

레이프는 나에게 쏠린 수많은 시선을 느긋하게 구경했다. 마치 배부른 맹수가 연상되는 모습에 나는 속으로 감탄을 터뜨렸다.

‘레이프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네.’

하긴 왕년에 대마법사였으면 이런 시선쯤은 아무것도 아닐지 몰랐다.

레이프가 월드컵 경기장만큼이나 넓은 연회장을 다 둘러보았을 때쯤이었다. 여유로운 그의 태도 때문일까, 지금껏 어깨를 짓누르던 압박과 긴장이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다. 신기하게도.

“신경 쓰지 마, 세이딘. 좀 있으면 저런 말들은 전부 사라질 거야.”

이를 모르는 레이프는 내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고는 씨익 웃었다. 자신감으로 가득 찬 그 모습에 나는 겨우 웃을 수 있었다.

“이제야 좀 웃네.”

“누구 덕분에. 줄곧 죽을 것 같았거든. 조명은 화려하지, 사람은 더럽게 많지, 이티엘은 웃으면서 압박하지……. 무엇보다도 맛있는 게 저렇게 널려 있는데 한 입도 못 먹는다는 게 말이 돼?”

“다른 건 몰라도 마지막이 본심이라는 건 잘 알겠어. 그러니 얼른 해치우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코르셋 때문에 안 돼.”

어찌 보면 내가 느끼던 압박의 반 이상은 코르셋이 한몫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 말을 들은 레이프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뭐야, 그거 때문이야?”

대수롭지 않은 말과 동시에 흉부를 압박하던 힘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순간 코르셋이 풀렸나 싶어 화들짝 놀랐지만, 옷매무새는 완벽했다.

“숨통이 트일 수 있게 조금 손봤어. 어때, 감쪽같지?”

“…마법으로 한 거야?”

레이프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막 되찾은 힘이 이 정도라면 원래는 얼마나 대단했다는 거야?

“그웨니르 영애.”

따사롭게 울리는 목소리에 잊고 있던 긴장을 떠올리며 나는 고개를 돌렸다.

“오늘 사냥감의 등장이네.”

아까부터 햇빛처럼 환하다 못해 타 버릴 듯한 시선을 보내던 이티엘이 모세의 기적처럼 사람들을 가르며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힘내, 세이딘!”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응원에 이어 지척에 선 이티엘이 찬란한 미소로 폭탄을 던졌다.

“아까부터 그대에게 계속 인사했는데 받아 주지 않더군. 우리 사이에 서운하게 말이야.”

황제의 한마디는 굉장한 파장을 일으켰다. 침묵 속에서 울리던 왈츠가 단숨에 멎고 술렁임이 파도처럼 일어날 만큼.

“우리 사이……?”

“분명 폐하께서 향후 삼 년간 혼인은 일절 생각이 없으시다고…….”

“어허, 저걸 보면 모르겠나? 그 말은 이미 철회된 거나 다름없어!”

사람들의 속닥거림을 듣고 있노라니 멀미가 온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그런 나를 보며 레이프는 등을 쓸어 주었다.

“이런, 우리 아가씨는 아기 사슴처럼 섬세해서 탈이야.”

그 아기 사슴을 물에다 던져 놓은 게 어떤 놈인지 참 주둥이를 비틀어 버리고 싶구나, 하하.

속으로 신나게 레이프를 씹어대고 있는데, 코르셋 때와 마찬가지로 울렁임이 말끔하게 사라져 버렸다. 이번에도 마법인 듯싶었다.

잔뜩 곤두서 있던 신경이 가라앉자, 그제야 나는 이 몰아치는 상황들을 조금 더 차분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존귀하신 분을 뵙습니다.”

“그런 겉치레는 됐네. 그래서 그웨니르 영애, 왜 짐의 인사를 모른 척했지?”

데스티니의 연주의 잔재가 남아 있는 탓인지 이티엘은 상당히 집요했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귀족 영애인 척 굴었다.

“죄송해요.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연회는 처음인지라 폐하께서 제게 인사를 건네신 줄 몰랐어요.”

여기저기서 기가 막혀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한 탄식이 쏟아졌다. 하지만 별수 없었다. 여기서 긍정을 하게 되면 일부러 무시했다는 것을 술술 불어 버리는 꼴이니까.

“영애는 참 귀여운 말만 골라서 하는군. 그대가 원한다면 그렇다고 해 두지.”

‘아, 네. 그것참 고맙네요.’

내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을 지껄인 이티엘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것까지 거절할 거냐는 의미가 다분한 행동이었다.

어떤 변명도 할 수 없게 된 나는 꾸역꾸역 그 위에 손을 포갰다. 맞닿은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간 것처럼 느껴졌다.

나를 에스코트하듯 선 이티엘이 좌중을 향해 말했다.

“모처럼 이렇게 모였으니 소개하도록 하지. 세이딘 그웨니르 영애다. 이미 알고 있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녀는 데스티니에게 선택받은 자로서 앞으로 짐을 도와 나라를 위해 일할 것이야. 일단은.”

‘거기서 ‘일단은’이 왜 나와!!’

은밀한 시선을 보내는 이티엘을 보며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죽을 맛이었다.

덕분에 연회장의 분위기는 단숨에 달라졌다.

처음에 무시와 조롱이 가득했다면 지금은 호기심과 약간의 기대로 바뀌어 있었다.

물론 여전히 의심하는 무리는 건재했다.

“폐하, 제안하고 싶은 바가 있습니다.”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군중 속에서 나온 사람은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를 연상시키는 중년 남자였다.

“말해 보게, 스타비드 공작.”

이티엘의 말에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공작. 북부. 그리고 무가.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완벽한 주인공 혹은 공략캐 키워드를 가진 사람이 왜 저 모양이야! 공작에 무슨 원한 있어?!

“제국의 역사와 대륙의 역사를 통틀어 처음으로 나타난 선택된 자입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에 걸맞은 증거를 보았으면 합니다.”

“하하, 재미있는 놈이네? 스스로 멍청하다고 당당하게 밝히고.”

‘동감이야.’

데스티니를 들 수 있는 것부터가 선택된 자라는 증거인데, 무언가를 더 보여 달라는 것은 억지에 가까웠고 동시에 연주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슬쩍 꿍꿍이 가득한 미소를 짓는 걸 보면 스타비드 공작은 내가 악기와 친하지 않다는 사실을 사전에 조사한 듯싶었다.

“저런 멍청한 놈들에겐 보여 주는 게 빠르다 보는데. 세이딘, 너는 어떻게 생각해?”

의미 없는 질문인 것이, 연회에 모인 모든 사람이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저렇다는데 영애 생각은 어떠한가?”

이티엘의 물음은 부드럽고 정중했지만, 그뿐이었다. 애초에 이런 상황을 기대하고 내게 이목을 쏠리게 한 놈한테 뭘 바랄까.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이번만큼은 나 또한 레이프의 말에 동의한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우리 집이 사교계 및 정치계 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한들, 제국에 4개밖에 없는 백작가 중 하나인 데다 전 대륙을 통틀어 가장 큰 금광을 갖고 있어 마냥 무시할 수 없었다.

사실 그보다 큰 이유는 다른 것이었지만.

‘내 꿈을 부숴 놓은 주제에 어디서 자격 운운을…….’

사람을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면 안 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공략캐스러운 키워드로 저런 결과물(?)은 용납할 수 없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부족한 실력이지만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그래, 좋은 마음가짐이야.”

그렇게 말한 이티엘은 한 발 내디딘 나를 에스코트하기 시작했다. 홍해처럼 갈라지는 사람들 사이를 걷는 것은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웠다.

‘아, 민망해. 이렇게 주목받는 건 별론데.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데스티니를 들고 있을걸.’

무심코 한 생각과 동시에 어디선가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정확히 나를 향해서 날아왔다.

“그웨니르 영애!”

“두려워하지 마, 세이딘.”

‘아니, 엑스트라한테 대체 왜 이래요!’

극과 극을 달리는 두 남자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지만, 그들 말에 신경 쓸 겨를이 없던 나는 질끈 눈을 감고 말았다.

아니, 감으려고 했다.

[TIP]

당신의 얼굴을 지키고 싶다면 손을 펴고 팔을 뻗으세요!

‘팁 같은 소리 하네!’

그 순간 떠오른 시스템창은 너무 해맑아서 어이가 없다 못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쯤 되면 알기 싫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대포처럼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오는 저건 데스티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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