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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7)화 (7/122)

제7화. 2장. 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3)

정말 그 말대로였다. 처절한 쇳소리를 낼 줄 알았는데. 내 의지라곤 일절 없는 연주라는 것 외엔 완벽 그 자체였다.

여러 의미로 꿈같은 순간이 지나고, 이티엘과 나 사이에는 정적이 찾아들었다.

“잘했어, 세이딘! 처음 연주하는 사람치고는 굉장히 연주가 남다르던걸? 봉인이 풀리면 제자로 들이고 싶을 정도야.”

칭찬인지 장난인지 모를 말이 신경을 거슬렀지만, 물먹은 솜처럼 제 몸을 불려 가는 침묵의 압박에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수, 숨 막혀…….’

이티엘이 입을 연 것은 어떻게 숨을 쉬는지조차 잊어버릴 것 같을 때였다.

“세이딘 그웨니르 영애.”

다정하던 목소리가 단숨에 동굴처럼 깊고 서늘하게 울렸다. 바싹 달려온 긴장이 어깨를 굳게 만들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내게 이티엘이 다가왔다. 물처럼 흐르듯 자연스러운 행동이어서 손이 잡힌 줄도 모를 정도였다.

나는 찌를 듯이 노려보는 붉은 눈동자가 흉흉한 나머지 필사적으로 시선을 마주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이티엘은 내게 조금도 그런 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웨니르 영애, 짐을 봐.”

거절할 힘과 명분이 없는 나는 이리저리 굴리던 눈을 찬찬히 이티엘에게 돌렸다.

“그래, 그렇게.”

죽일 듯이 노려보던 시선이 버터가 녹는 것처럼 삽시간에 누그러지는 것을 보며 나는 이제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이티엘이 상상 이상으로 잘생겨서, 이성적으로 끌려서가 아니었다.

“참 아름다운 눈동자군. 갓 틔운 어린 새싹 같아.”

‘아, 시작됐다.’

앞으로 마주해야 할 데스티니의 능력 때문이었다.

이티엘이 감탄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마법 효과가 대단하군.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두근거리니 말이야.”

여기까지 들었을 때는 조금도 마법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상대는 이티엘이었다.

그는 내 손을 잡아 제 가슴으로 이끌었다.

“들리나, 영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살 수 있는 데스티니는 유독, 이상하게 이티엘에게 매우 잘 들었다.

“이 안에 그대가 있어.”

간질거려 견딜 수 없을 심장과 오글거려 실종될 손가락에 대한 마음 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이티엘이 무릎을 꿇었다.

“그러니 나와 결혼해 주게, 세이딘 그웨니르 영애.”

―또로롱!

이쯤 되면 효과음은 날 골탕 먹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  *  *

“축하해, 세이딘! 황제의 눈에 들었으니 이제 조만간 황후가 되려나?”

정원에서 있는 힘껏 잡초를 쥐어뜯고 있는데 레이프가 말을 걸었다.

나는 있는 힘껏 그를 째려보았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 끔찍하니까.”

“오, 세이딘. 이제는 존댓말을 하지 않는구나! 기뻐!”

“…….”

말이 통하지 않는군. 씹어야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레이프는 빙그레 웃더니 넌지시 한마디를 던졌다.

“그런데 정말로 관심을 싫어하는구나.”

“그럼 빈말인 줄 알았어?”

“귀족들은 좋으면서도 아닌 척을 하잖아?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대꾸했다간 레이프의 페이스에 말려들 뿐이었다.

“하아, 도망가고 싶다.”

“이제 겨우 시작인데 벌써부터 지치면 곤란한데. 나를 다룰 수 있는 또 다른 사람을 찾을 거라면서.”

“알고 있어. 생소한 일이라 당황스러울 뿐이야.”

“그렇다고 하기엔 얼굴이 너무 창백하잖아.”

“……데스티니.”

짙은 한숨 섞인 부름에 레이프가 눈을 깜박였다.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주장이 가득한 가증스러운 눈빛은 주먹을 불렀지만,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이 덮일 정도로 그의 미모는 대단히 압도적이었다.

타다 남은 재처럼 해탈한 나는 몇 번이나 입을 벙긋거리며 할 말을 고르고 골랐다.

마침내 흘러나온 진심은 소극적이었다.

“제발 부탁이니 놀리지 말아 줘. 난 진심이란 말이야.”

빙글빙글 웃던 레이프는 당황한 것인지 주춤하는 기색을 보였다. 

잠시 후, 그는 유감을 가득 담은 얼굴로 말했다.

“이런. 미안해, 세이딘. 내가 너무 너를 배려하지 못한 것 같아. 생각해 보면 그럴 만해. 한미한 백작가의 레이디가 갑자기 평생 가도 못 받을 미인들의 관심을 받고 있으니 혼란스럽겠지. 처음 범죄에 손댄 기분일 거야.”

“어떻게 범죄랑 미인들의 관심을 동일 선상에 둬?”

“앞으로도 이런 일은 넘치도록 많겠지.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약속할 수 있어.”

가볍게 내 물음을 무시하고 말을 이어 나가던 레이프가 작은 심호흡을 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널 지켜 줄게, 세이딘 그웨니르.”

‘찰진 개소리를!’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입은 쉽게 진심을 뱉지 못했다. 장난기 쏙 뺀 표정과 목소리가 갑작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머리의 과부하에 내가 좀처럼 대답을 못 하는 사이, 지척에 다가온 레이프가 내 손에 들린 잡초를 뺏으며 말했다.

“뭐, 그 전에 진심으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꼭 말해 줘야 해. 알았지? 그자까진 지켜 줄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하하, 세이딘. 뭘 그렇게 겁을 먹고 그래? 별거 아냐. 날파리를 쫓을 거야. 이런 식으로.”

도자기처럼 매끄러운 입술을 끌어 올린 레이프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빛바래게 할 정도로 빛이 났다.

순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던 것은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이, 이게 무슨…!”

내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한 것은 레이프의 손바닥에서 타오르던 불이 사라졌을 때였다.

제비꽃을 연상시키는 보랏빛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호박빛 눈동자가 투명하게 빛났다.

“어떤 식으로 퇴치를 할지에 대한 시범이야. 물론 죽이진 않아. 봉인을 풀려면 살생은 금지거든.”

“어젠 분명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고….”

“응, 계약서를 쓸 때까지만 해도 그랬는데 아까부터 돌아와 있지 뭐야?”

레이프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내 생각에는 마나가 돌아온 건 세이딘, 네 연주와 관련이 있지 않나 싶어.”

“연주?”

의지를 무시하고 움직이던 몸을 떠올린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과연 그걸 연주라고 부를 수 있을까?

“너무 싫어하지 마. 못하던 걸 잘하게 되는 건 좋은 일이잖아?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서, 아무래도 내 힘은 네가 날 켤수록 돌아오는 모양이야. 그리고 한번 돌아오면 그대로 유지되고.”

―또로롱!

고작 이틀 사이에 단 한 번도 신경 쓰지 않았던 게임음이 귀와 신경을 날카롭게 긁었다.

‘뭐야, 또! 지 혼자 과거사 말한 거로 또 호감도가 오른다고?!’

만약 눈앞에 게임 개발자가 있었다면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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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대체…?’

시도 때도 없이 오르는 호감도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보상이 왜 저래?

주는 건 거절하지 않는 성격이라 얌전히 아이템 창고에 넣어 두면서도 내 의아함은 끊이지 않았다.

의문 속에서 허우적대는 중, 레이프의 물음이 날아들었다.

“그러니 각오는 됐지, 세이딘?”

“각오? 무슨 각오……는 설마.”

허우적대며 물음을 쏟아 내던 내가 얼굴을 굳히자, 레이프는 활짝 웃었다.

“맞아, 황제가 말한 대연회.”

“하아…….”

한숨이 우러나오는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나를 보며 레이프가 말했다.

“한숨만 쉴 게 아니라 잘 생각해 봐, 세이딘. 이건 기회야. 그것도 네 목적을 이룰지도 모르는 대단히 중요한 기회. 황제가 아니더라도 꼭 가야 해.” 

‘요놈 봐라? 저는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는 것처럼 말하네?’

어떻게든 봉인을 풀고 싶어 하는 레이프의 꿍꿍이는 훤히 보였지만, 이와 별개로 그의 주장은 옳았다.

대연회는 황제의 권한으로 열리는 비정기적인 행사였다. 이티엘이 즉위하던 해 이후로 5년이나 지나서 열리는 연회였으니 이름 모를 시골에 있는 귀족들도 눈에 불을 켜고 몰려들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여주인공이 거기에 올 것인가인데…….’

희미한 기억임에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여주인공이 데스티니를 얻고 레이프와 만나던 때가 건국제가 아닌, 추수제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티엘 및 다른 공략캐들과의 만남도 전부 추수제가 한창일 때였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시간이 어긋나 버린 상황에서 여주인공이 나타날지는 미지수였다.

“이런.”

안타까움이 서린 짧은 탄식이 귓가를 스쳤다.

“우리 아가씨는 너무 생각이 많아서 탈이야.”

그 말과 동시에 온기가 이마에 내려앉았다. 무심코 눈을 든 나는 깜짝 놀라 딸꾹질을 하고 말았다. 간질거리는 숨결과 코앞까지 드리운 레이프의 얼굴로 인한 치명상이 원인이었다.

“또, 또, 또 이런다!!”

머리로는 벌써 몇 번이고 겪은 일이니 새로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매번 당하는 스스로가 한심해서 분했다.

이젠 좀 익숙해질 때도 됐지 않았니, 세이딘 그웨니르?

이마를 맞댄 레이프가 허둥대는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번에도 해로워?”

“응, 그러니까 떨어져.”

참 신기하다. 말 한번 놓고 이렇게 스스럼없이 솔직하게 구는 나 자신이.

‘사실 그보다 호감도를 믿고 배짱부리는 거지만.’

기준이고 나발이고 저만의 길을 가는 호감도가 언제 어디서 밑바닥을 찍을지 모른다. 그러니 올라가는 지금이라도 소신껏 솔직해 봐야지.

한편, 레이프는 내 즉답을 예상했는지 놀라지 않았다. 대신 그는 피식 웃으며 여유를 자랑했다.

조심스레 내 손등에 짙게 키스한 레이프가 말했다.

“매번 놀라게 해서 미안해. 그런데 어쩔 수 없었어. 넌 이 정도의 충격 요법을 주지 않으면 미동도 하지 않잖아.”

“……생각이 깊어지면 주변 소리를 잘 듣지 못하는 건 인정할게. 그럴 때는 차라리 딱밤을 먹였으면 좋겠어.”

“딱밤? 그게 뭔데?”

“이렇게 이마를 치는 거야.”

엄지와 검지로 튕기는 시늉을 해 보이자, 레이프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이제 고민은 좀 해결됐어?”

“네 생각엔 해결된 거로 보여?”

“그럼 더 생각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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