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2장. 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2)
본받지 않아도 되니 그 감명 도로 가져가시면 안 되나요?
“영애의 도움에 감사하네. 그럼 데스티니를 이곳에 가져와 줄 수 있나?”
“……데스티니를요?”
“그래, 오래전부터 전해져 오는 마법이 얼마나 대단한지 가늠하고 싶어서 말이야.”
“…….”
데스티니의 마법은 연주를 할 때 발현된다. 난 지금껏 누구도 들 수 없던 데스티니를 들었으니 당연히 연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라면 내가 악기를 다뤄 본 적이 없다는 것이지.
예상 못 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여서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폐하의 귀를 더럽힐 수도 있는 점, 미리 사죄드립니다.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셨으면 해요.”
“후후, 그러도록 하지.”
[이티엘의 호감도가 10 증가했습니다! (20→30)]
나는 호감도창을 애써 무시하며 응접실을 나섰다.
온갖 생각이 잡다하게 뒤섞이는 가운데, 방으로 가는 걸음은 유독 무거웠다.
이윽고 방에 들어선 나는 눈을 찌푸렸다. 청명한 풍경을 비추는 창틀에 몸을 기댄 미남 때문이었다.
부서지는 햇살에 반짝이는 머리카락은 자수정처럼 눈부셨고, 밖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황금처럼 찬란하고 물처럼 투명했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에 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창밖을 바라보던 레이프는 내가 왔다는 것을 알아채곤 고개를 돌렸다. 몇 배로 눈이 부셨다.
“세이딘, 좋은 아침이야! 잘 잤……던 건 아닌가 보네. 무슨 일이야?”
“……황제가 왔어요.”
“그래? 어쩐지 소란스럽더라니. 보나 마나 내가 목적일 테고. 그런데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 세이딘? 모처럼 굴러들어 온 좋은 기회인걸.”
“그게, 저는 악기를 연주할 줄 몰라요.”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모래알처럼 껄끄러웠다. 미리 양해를 구하고 이티엘이 허락했다고 해도 만약의 상황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상황 속에 연달아 내몰린 나는 그저 불안한 마음뿐이었다.
“뭐야, 고작 그런 거로 걱정한 거야?”
끊임없는 걱정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들려온 목소리는 밝았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레이프는 구김 없는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세이딘. 내게 걸린 마법은 그렇게 조잡하지 않거든. 네가 발로 연주해도 나는 아름다운 음색을 낼 거야.”
“……좀 더 나은 비유는 없어요?”
“내게 선택된 사람이라면 이 정도의 혜택은 당연한 거야. 그러니 그렇게 침울해하지 말고 당당하게 있어.”
나는 황망히 레이프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평생 연주해 본 적 없는 바이올린을 켜게 되는 것이 과연 혜택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겠어. 태생부터 잘난 놈 앞에서 걱정한 내가 잘못이지, 잘못이야.’
한편, 나를 바라보던 레이프가 고양이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내 말을 믿기 어려운 모양이구나?”
“믿기 어렵다기보단 상상이 잘 가지 않는 거죠. 당신 때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마법이 희귀하거든요.”
흠, 하는 한숨과 함께 작은 웃음을 터뜨린 레이프가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라도 익숙해져. 앞으로는 자주 보게 될 거니까.”
아니요. 됐습니다. 넣어 두세요.
입안을 맴도는 세 마디 중 하나라도 뱉어 낼 새 없이 레이프는 내게 다가왔다. 물론 해로운 거리였다.
“뭐, 뭐 하는 거예요!”
“항의.”
“항의라뇨, 대체 뭘?”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내 입은 부지런히 질문을 던졌다.
맑게 갠 하늘처럼 웃은 레이프가 대답했다.
“존대, 이젠 안 쓰기로 했잖아.”
‘그런데 계속 쓰니까 이러는 거라고?’
당황한 나머지 얼굴이 빨개진 나는 황급히 양손으로 레이프를 밀어냈다.
“그, 그렇다고 이러는 건……!”
“치명적이잖아.”
“……네?”
두꺼비처럼 눈을 끔뻑이는 나와는 달리, 레이프는 졸린 고양이처럼 나른하게 웃었다.
“내 얼굴 말이야. 치명적이잖아. 가까이 다가가면 타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도 분해 죽겠는데, 그걸 말한 사람이 본인이라는 것이 짜증 났다.
끈질기게 이어지는 시선을 견디지 못한 나는 레이프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 해로운 얼굴 좀 치워! 죽을 거 같다고!”
“해…로운?”
이런 미친 주둥아리야. 대마법사를 상대로 뭐라고 지껄인 거니!
동그랗게 뜬 호박색 눈동자를 보는 순간 나는 굳어 버렸다. 온몸의 모든 기관과 신경이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미친 듯이 돌고 있었다.
“아하하하!!”
느닷없이 튀어나온 웃음소리에 나는 눈을 깜박였다. 배까지 잡으며 웃은 레이프는 어느새 내게서 떨어져 있었다.
“아, 세이딘. 이렇게 재미있어서 어떡하면 좋아? 널 만난 건 정말 최고의 행운이야.”
대체 이놈은 날 뭐로 보길래 뭐만 하면 재미있다 그러지?
레이프는 내가 왈칵 얼굴을 구겨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었다.
한참을 웃은 그는 내게 말했다.
“좋아. 이제 다 웃었으니 황제 낯짝 좀 구경하러 가 볼까?”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아니지, 세이딘.”
단호한 레이프의 말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하여간 그놈의 반말, 써 달라니 얼마든지 써 주마!
마음은 독립투사처럼 열정이 넘치지만, 실상은 소심하게 탄식 섞인 대답을 내뱉을 뿐이었다.
“……맞아?”
정색했던 레이프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칭찬이라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햇살 같은 마법사가 말했다.
“물론이야. 넌 그저 바이올린을 들고 가만히 있으면 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레이프의 한마디는 세상의 모든 것을 적으로 둔대도 든든하게 느껴질 만큼 힘이 있었다. 그는 전무후무한 대마법사였으니까.
하지만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믿기에 나는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의심의 가시를 세우고 고민한 끝에 나는 겨우 한마디를 꺼내 놓았다.
빈곤한 허세였다.
“……계약서에 적은 말, 잊지 마.”
* * *
“드디어 왔군, 그웨니르 영애.”
응접실을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이티엘은 우아한 미소를 띤 채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옆에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티포트가 있었다. 딱 봐도 다시 내온 것이 분명했다.
나는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이럴 때는 무조건 사과부터 하고 봐야지.
“늦어서 죄송합니다, 폐하. 데스티니를 연주하기에 앞서 이것저것 챙길 것들이 있어서요.”
“아, 개의치 말게. 그대를 질책한 게 아니니.”
개의치 말라고 할 거면 드디어 왔냐는 말은 하지 말든가.
“흠, 그게 데스티니인가?”
“예, 폐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으로 데스티니를 내밀었다. 애써 태연한 척하려 해도 미세한 손 떨림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떨지 말아, 영애. 그대는 짐의 말을 믿지 못하는 건가?”
“아,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좀 긴장했을 뿐이에요.”
이티엘은 격한 내 반응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곧 데스티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덕분에 나는 졸도할 것만 같았다.
다름 아닌 바이올린 위에 다리를 꼰 채로 앉아 있는 레이프 때문이었다. 그와 이티엘은 민망할 만큼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끄아아아! 어떡해! 좋아, 좋긴 한데 저러다 들키는 거 아냐?’
미남과 미남이 붙어 있는 모습은 설레면서도 한편으로는 심장이 입 밖으로 나올 것처럼 조마조마하고 불안했다.
내가 두 가지 마음 속에서 갈팡질팡하는 와중에도 레이프는 신기한 표정으로 데스티니를 보는 이티엘을 이리저리 살폈다.
호박빛 눈동자를 빛내며 아주 꼼꼼하게 탐색을 끝낸 레이프가 입가에 만족 가득한 미소를 그렸다.
“잘생겼네. 초대 황제놈보다 훨씬 나아.”
‘지금 그걸 감상이라고….’
누구는 들킬까 봐 조마조마하고 있는데!
불만의 시선을 보내자 레이프는 나를 힐끗 보더니 피식 웃었다.
“걱정 말래도? 이제 저 완고한 놈은 푸딩보다 더 흐물흐물해질 거야.”
그쪽도 여러모로 썩 좋은 선택지는 아니었지만, 이미 몇 번을 말했듯이 내겐 여유와 호사를 부릴 만한 정신이 없었다. 그러니 넙죽 엎드려야지.
한차례 뻘뻘거리는 데스티니의 신고식을 겨우 끝내나 싶었더니 이티엘은 곧바로 본래의 목적을 꺼냈다.
“그럼 부탁한 대로 연주를 부탁하네, 그웨니르 영애.”
나는 지진이라도 난 듯 떨리는 눈동자로 데스티니와 황제를 번갈아 보았다.
한쪽은 너무도 당연히 켤 수 있다는 자신감을, 그리고 다른 한쪽은 왜 연주를 하지 않는지 의문을 드러내고 있었다.
냉탕과 열탕 같은 관심 속에서 나는 꾸역꾸역 바이올린을 들었다. 내키지 않는 탓인지 모든 동작이 하나같이 녹슨 고철처럼 삐거덕거렸다.
어색함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계속하게.”
상냥한 재촉에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부드러운 어조에 속지 맙시다. 안 한다고 하면 목이 날아가진 않아도 다른 곳이 문제가 될 테니까요.
죽음, 혹은 영원히 고통받는 배드엔딩이 가득했던 이티엘 루트를 떠올리며 나는 천천히 활을 들었다.
그리고 곧 당황했다.
‘음…?!’
물 흐르듯 움직인 몸은 내 의지와 조금도 상관없는 것이었다.
순간 걱정할 필요 없다는 레이프의 말이 떠올랐다.
“내 말대로지, 세이딘?”
생각이라도 읽은 듯 이어지는 레이프의 물음에 나는 울컥 짜증이 솟았다. 마법이 걸려 있다는 건 알았어도 이렇게까지 강제적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게임 속 여주인공은 악기라면 뭐든 잘 다루는 능력자여서 데스티니는 거기에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능력만 더했을 뿐이었다.
놀라서 입을 뻐끔거릴 새도 없이 멋대로 자세를 잡은 몸은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 이번 생은 망했어…!’
걱정 없던 생활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머릿속에 천둥이 칠… 줄 알았는데.
‘응…?’
귀에 흘러들어 오는 이 아름다운 선율은 뭐죠?
눈이 마주친 레이프가 어깨를 으쓱였다.
“걱정하지 말라고 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