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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5)화 (5/122)

제5화. 2장. 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1)

“세상에, 아가씨! 폐하의 존함을 함부로 부르시면 어떡해요!”

앤은 펄쩍 뛰며 혹시나 들은 사람이 없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걱정도 많아. 여기엔 우리 둘뿐인데.

그보다도 내 관심은 온통 방금 전 대답에 쏠려 있었다.

‘아니, 갑자기 황제가 왜 튀어나와?’

예기치 못한 충격에 허우적거리는 와중에도 내 입은 정직한 감상을 뱉어 내길 주저하지 않았다.

“여명의 뭐시기보단 나을 거 같은데.”

내 대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앤은 꿈꾸는 소녀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뭘 모르시네요, 아가씨. 딱딱하게 황제 폐하라고 부르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우아하고 멋지잖아요.”

“아니. 안 멋져. 사대천왕 같아.”

“사대……, 뭐라고요?”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서 그……, 어디 계신데?”

나는 황제라는 주어를 얼버무리며 물음을 던졌다. 다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공략캐가 우리 집으로 굴러들어 왔다는 사실을 회피하기 위한 소심한 발악이었다.

그게 이상했는지 앤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곧 말했다.

“방금 본관에 오셨어요. 아가씨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라 하시는 걸 주인님께서 말리는 것까지 봤는데….”

“나를 찾는다고……?”

뇌를 거치지 않고 튀어나온 말과 동시에 이티엘이 왜 나를 찾는지가 번개처럼 번뜩였다.

정치적 이점이 조금도 없는 그웨니르 백작가의 영애는 공기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 나를 황제가 찾을 이유는 단 하나, 빌어먹을 바이올린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했다.

“어제 아가씨가 데스티니를 들고 오셨잖아요! 처음으로 제국의 보물에 선택받은 사람이 나타났는데 여명의 지배자께서 가만히 계실 리 있겠어요? 분명 상을 주려 하시는 걸 거예요!”

저 단어는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는구나. 오롯이 부끄러움만 받은 나는 심적으로 받은 타격을 내색하지 않으려 여상하게 대꾸했다.

“음, 글쎄……. 정말 그런 거라면 좋겠네.”

“아이참, 글쎄 제 말이 맞다니까요!”

“만약에 아니면?”

“저택의 모든 사람을 모아 두고 정원에서 코끼리코로 열 바퀴 돌고 뒤구르기를 한 뒤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지혜로운 세이딘 아가씨 만세!’를 외칠게요!”

어릴 때부터 자매처럼 함께 자라서인지 앤의 다짐은 남다른 패기를 자랑했다.

그런 무모함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구경하는 재미도 있고. 두고두고 놀릴 흑역사 적립도 좀 하고.

나는 다가올 미래에 먼저 속으로 유감을 표하며 답했다.

“그래, 그럼 기왕 하는 거 공중제비까지 추가하자.”

“좋아요!”

제법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기쁨도 잠시, 나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아직 접시엔 절반이나 음식이 남아 있었지만, 제2의 공략캐가 등장한 시점에서 식욕은 달아난 지 오래였다.

“자, 그럼 어서 폐하가 계신 곳으로 안내해 줘.”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피할 수 없으면 냉큼 해치워야지.

하지만 의자에서 일어나려던 나는 곧바로 앤에게 제지를 당했다.

“아가씨, 설마 그대로 가실 셈이세요?”

“그런데?”

“……그 차림으로요?”

내 차림이 어때서?

귀찮아서 잠옷을 입은 채로 식당에 오려던 걸 시녀들의 만류로 갈아입은 원피스는 깔끔하고 세련됐다.

못 봐 줄 정도로 숱 많고 부스스한 머리도 예쁘게 땋아 정돈했다.

당장 외출한다 해도 흠잡을 곳 없는 모습임에도 앤의 눈에는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세이딘 아가씨,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여명의 지배자예요. 일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분인데, 그에 걸맞은 격식은 차리셔야죠. 신속하게 개조……는 아니고 준비해 드릴게요.”

방금 자연스럽게 ‘개조’라고 하지 않았어?

내가 황당해하는 것도 잠시, 일어나기 편하게 의자를 끌어 준 앤은 어서 꾸미러 가자고 재촉했다.

“앤, 마음은 고마운데 나는 이대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 간택을 받을 것도 아닌데 치장할 필요가 뭐가 있어?”

“간택이요? 에이, 아가씨도 참. 여명의 지배자께서 황후 폐하를 아무나 들이시겠어요?”

“무례하긴.”

말은 그렇게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런 것으로 혼내거나 벌을 주지 않는다는 걸 아는 앤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객관적인 거죠. 주인님부터 정치나 권력에 일절 관심이 없으시잖아요. 앗! 아니면 아가씨, 혹시 여명의 지배자께 간택받고 싶으신 건…….”

얘가 남의 속도 모르고 태평한 소리를 하고 있네!

“불길한 소리 하지 마, 앤. 뭐 하러 그런 불구덩이를 자처해서 들어가니? 황궁은 머리싸움과 암투로 가득한데. 난 조용히 즐겁게 오래오래 살 거야.”

“하여간 아가씨도 특이하시다니까. 그런 게 욜로…랬죠? 그게 좋으세요?”

“당연하지. 누릴 돈도 있고 시간도 있고 해 볼 게 잔뜩 있는데 굳이 뭘 더 해야 하니?”

한때는 잘하는 것을 찾아 워라벨을 즐길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곧 그 생각을 접었다.

그웨니르 백작가는 정치적인 힘은 없을지언정 대대로 내려오는 금광 덕분에 돈은 썩어 넘칠 정도로 많았다. 일을 하지 않고 펑펑 써 재껴도 몇 대는 갈 정도로.

열렬한 내 주장을 들은 앤은 피식 웃었다. 3년간 주구장창 열띤 욜로를 외친 탓에 그녀도 해탈한 듯싶었다.

“어련하시겠어요. 하긴, 저 같아도 돈 있고 여유가 되면 굳이 일하거나 결혼하려고 하지 않을 것 같아요.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모를까.”

“그래, 그런 거라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새삼 얼마나 좋은 환경 속에 있는지를 다시금 떠올렸다.

‘그래, 이런 환경을 빼앗길 수 없지.’

가족이 없다는 이유로, 가난하다는 이유로 구박받던 원래 세계의 삶이 조금도 생각나지 않을 만큼 나는 현재에 만족했다.

이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여주인공을 찾아야 했다.

‘그 전에 첫 만남 이벤트 비스무리한 이 상황부터 어떻게 해야겠지만.’

나는 몇 번이고 이티엘 루트를 곱씹었다. 희미한 기억이었지만, 여기저기서 들이닥치는 상황 속에서 내가 의지할 것은 이것뿐이었다.

*  *  *

“그대가 세이딘 그웨니르인가?”

상냥한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응접실, 줄곧 말 없던 상대의 한마디에 체한 사람처럼 명치가 답답해졌다.

찌를 듯한 붉은 시선에 쫓긴 나는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잘생긴 만큼 위압감이 남다르구나.

“그…, 렇습니다.”

“‘그’ 데스티니를 들었다지?”

“네…….”

유감스럽게도요. 제가 어쩌자고 그랬을까요?

만약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 자신을 몇 번이고 뜯어말릴 것이었다. 

그 길은 약속된 지뢰밭이야! 발이 닿는 곳마다 터진다고!

한편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살피던 이티엘이 미소를 지었다. 부동의 인기투표 1위를 차지한 인물답게 서늘한 모습과 눈부신 미소 사이의 갭 차이가 맨틀과 명왕성의 거리감만큼 느껴졌다.

이티엘은 바싹 경계하는 나를 부드럽게 도닥였다.

“그렇게 어려운 표정 지을 것 없네. 제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 아직도 믿기지 않아 그럴 뿐, 그대에게 압박을 줄 생각은 없었어.”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얼핏 들을 때는 굉장히 배려 넘치는 말 같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갑자기 집에 들이닥친 황제에게 압박을 안 느껴?

연기가 날 정도로 머리를 굴린 끝에 이티엘이 여기에 온 이유를 알아차린 이상, 나는 이 만남과 대화를 오래 끌고 싶지 않았다.

“원하시는 게 뭔가요?”

“흠? 그게 무슨 의미지?”

“제국의 빛과 소금이신 분께서 고작 오백 년 된 바이올린 때문에 여기까지 친히 오실 거라고 생각되지 않아서요. 다른 이유가 있으시잖아요.”

밤이 되기 직전을 연상시키는 남색 머리카락 아래로 이티엘의 붉은 눈동자가 이채로 빛났다.

“굉장히 총명하군.”

나(외관 나이)와 몇 살 차이도 안 나는 상대에게 이런 칭찬을 듣는 것은 굉장히 묘한 기분이었다.

그런들 어쩌겠는가? 저쪽은 황제고 나는 백작가의 영애다. 그냥 굽실대야지.

‘하하, 앤의 코끼리코가 기대되는걸?’

나는 즐거운 방향으로 사고회로를 돌리며 애환을 떨쳐 냈다.

―또로롱!

그 와중에 눈치 없는 알림음과 함께 쓸데없는 정보가 허공에 떠올랐다.

[이티엘의 호감도가 20 증가했습니다! (0→20)]

‘아니, 레이프도 그렇고 무슨 한마디만 하면 호감도가 오르는데요? 너희가 언제부터 이렇게 쉬운 남자였다고?’

어이가 없어 웃음이 비죽비죽 흘러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게임 할 때나 이렇게 올랐으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은 개미 다리만큼의 관심도 필요 없는데.

머릿속이 쏟아진 퍼즐처럼 어지러운 가운데, 피식 웃은 이티엘은 내가 진정하든 말든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영애의 말대로야. 그깟 바이올린이 어떻게 되든 별 관심이 없지. 하지만 거기에 걸린 마법에 관해서라면 또 다른 이야기라네.”

“……그렇군요.”

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더지 게임처럼 튀어나오는 호감도보다 이야기를 듣는 것이 훨씬 편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공략 초반의 이티엘은 데스티니를 노리고 여주인공에게 접근했다.

그러니 날 찾아온 것도 분명 같은 이유겠지.

“그 반응을 보아하니 데스티니에 걸린 마법이 무엇인지 아는 모양이군.”

‘모를 리가. 제목부터가 그 모양인 데다 네놈들을 공략하는 열쇠가 바로 그 데스티니인데.’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없는 노릇이었기에 나는 적당히 둘러댔다.

“네, 어쩌다 보니…….”

“보다 설명이 빨라지겠군. 좋아, 그웨니르 영애, 짐은 그대가 짐의 입지를 확실히 다져 줬으면 좋겠어.”

이티엘은 사실을 뭉뚱그려 말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들을 때는 그저 부탁 같지만, 실상은 데스티니를 이용해 사람들을 홀려 놓으라는 무시무시한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네, 좋아요.”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기름처럼 매끄러웠다.

레이프가 들으면 어젯밤은 왜 그렇게 반대했냐며 불만을 표할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공략캐가 엮이는 현실을 부정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여주인공을 찾는다는 목적이 생긴 이상, 지금은 이용할 수 있는 건 전부 이용해야 했다.

이티엘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금은 생각하고 대답하는 것이 어떤가, 그웨니르 영애? 짐이 뭘 시킬 줄 알고 그렇게 선뜻 대답하는 거지?”

“충분히 생각하고 드린 대답입니다. 제국의 국민인 이상, 폐하의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시동이라도 걸린 듯 술술 터져 나오는 아무 말에 이티엘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완벽하게 온화한 미소를 그렸다.

“그웨니르 영애는 애국심이 강하군. 모든 제국민이 본받았으면 할 만큼 감명 깊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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