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1장. 전설의 바이올린과 엑스트라 (4)
세상에, 미쳤나 봐!
도롱이벌레가 되어 가던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번개같이 이불 속에서 튀어나와 레이프의 입을 막았다.
“으아, 조용히 해요!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얼굴이 빨간 것은 확실히 알겠다.
레이프는 잠시 그대로 있나 싶더니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입막음이 허무하리만치 소용없었다.
“아쉬워라. 기왕이면 입은 입으로 막아 줬으면 했는데.”
“저기요, 우리 어젯밤이 초면이었거든요?”
“그게 아니야, 세이딘. 데스티니.”
나는 황당함을 감추지 않았다.
조력자일 때든 공략캐일 때든 레이프는 단 한 번도 이런 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다.
물론 게임에서는 여주인공이 꼬박꼬박 레이프의 이름을 불렀으니 그럴 일이 없었겠지만, 어찌 됐건 어이가 없는 건 변함없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끈질긴 레이프의 눈초리 때문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의 바람을 받자왔다.
“……데스티니.”
“훌륭해, 세이딘. 그래서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뜨거운 사이엔 존대가 필요 없다는 거였나?”
“누가 들으면 어떡하냐 그랬거든요!”
“맞아, 그랬었지.”
시치미 뚝 떼고 웃은 레이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귀여운 세이딘.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의 모든 것은 전부 너만 볼 수 있으니까.”
과연, 시크릿 공략캐. 여심을 후드러팰 말만 골라서 하고 있다.
하지만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에 절어 있는 내게 이런 말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항의했다.
“그게 더 심각한 일이잖아요! 사람들이 제가 생쇼……, 아니 혼잣말하는 줄 알 거 아니에요! 정신 이상자 취급은 한 번으로 충분해요.”
레이프의 짙은 호박빛 눈동자가 가늘게 길어졌다. 얼핏 스쳐 간 빛이 맹수를 연상케 하는 것도 잠시, 그는 곧 곤란한 기색을 띤 미소를 지었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하지만 어제도 말했다시피 봉인이 완전하게 풀린 게 아니라서 말이야. 지금 상황에서는 실체를 유지하는 것도 버거워.”
그 정도였어?
당황해하는 나와 눈이 마주친 레이프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말했잖아. 내겐 네가 절실하다고.”
‘정확히는 내 ‘도움’이겠지.’
나는 레이프와 같이 속내를 감추고 말했다.
“물론 약속한 건 지킬 거예요. 그러니 당신도 잊으면 안 돼요.”
“물론이야. 약속은 목숨처럼 소중한 것인걸.”
원하던 대답을 받아 냈음에도 나는 여전히 찜찜했다. 어떡하면 좋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말만큼 덧없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 잘난 마법사는 못 미더운 표정을 곧바로 알아차리고는 곧장 내 입을 막아 버렸다.
“뭣하면 계약서라도 쓸까? 신뢰가 바닥이라면 어떻게든 얻어 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거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끔 저렇게 합리적인 말을 들을 때면 이 세계가 정말 게임 속인가 싶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그것과 별개로 계약서를 쓰는 것은 찬성이었기에 나는 이성을 긁어모아 대답했다.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당장 작성해요!”
이번에는 레이프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호박색 눈동자 위로 많은 감정이 찰나에 스쳐 갔다.
지나간 자리에 남은 감정은 유쾌함이었다.
“푸흡, 하여간 재미있는 아가씨라니까.”
칭찬인지, 비웃는 건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레이프는 귓가에 달린 귀걸이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깃털 장식에서 날렵한 깃펜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기한 광경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레이프가 허공에 손을 움직이자, 그 궤적을 따라 황금빛의 우아한 글자가 생겨났다.
“한번 확인해 봐.”
방금 전 나눈 대화를 토대로 계약서를 작성한 레이프는 내가 잘 볼 수 있도록 나를 향해 글씨를 돌렸다.
첨단 기술을 누리며 살았다고 해도 신기하기 짝이 없는 풍경의 연속인지라 나는 조금 허둥거리며 금색 글씨를 읽었다.
“……완벽하네요.”
“칭찬 고마워.”
당연하다는 듯 웃는 레이프를 보며 나는 헛웃음을 머금었다.
거참, 잘생겨서 재수가 없는데 잘생겼네.
“그런데 계약서가 이러면 어떻게 보관해요?”
“아, 그건 보면 알 거야. 더 확인할 것이 없으면 서명해 주겠어?”
‘얼마나 대단하길래 보면 안다고 하는 걸까?’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레이프의 서명 옆에 사인을 했다. 안 그래도 악필인데 명필 옆에 휘갈겨 놓으니 상태가 심각하구나.
내가 사인을 한 것을 확인한 레이프는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손에 있던 깃펜과 계약서가 전부 그에게 날아갔다.
레이프의 주위를 맴돌던 글씨들은 깃펜에 모여 작은 황금빛의 구체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두 개로 나뉘어 레이프와 내게 순식간에 스며들었다.
뭐야, 생각보다 시시하잖아?
“세이딘, 팔을 들어 봐.”
이번에도 생각이 전부 얼굴에 드러났는지 레이프의 말이 곧장 따라붙었다.
나는 뜨끔하는 마음을 감추고 그의 말을 따랐다.
“어? 이건…….”
나는 눈을 의심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없었던 얇은 금팔찌가 내 팔목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계약서야. 문서로 남겨 두는 건 구시대적 유물이 됐을 테니 말이야.”
나는 곧바로 대꾸했다.
“음……. 저기, 오백 년이 지난 지금도 계약서는 종이에 쓰는 게 일반적인데요.”
심지어 여기보다 문명이 발달한 원래 세계에서도 종이를 썼거든요?
뒷말까지는 차마 할 수 없던 나는 목구멍 뒤로 속마음을 삼켰다.
“뭐, 남들이 그런다고 해서 우리까지 그러라는 법은 없잖아?”
한편 레이프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계약서를 보려면 팔찌에 손을 대고 강하게 바라면 된다는 것을 설명하고는 화제를 돌렸다.
어젯밤부터 한결같은 주제였다.
“자, 이제 그럼 언제부터 도와줄 거야, 세이딘?”
* * *
내가 겨우 숨통을 튼 것은 계약서를 쓴 지 얼마 되지 않아 레이프가 바이올린으로 돌아갔을 때였다.
늦게 일어난 데다 일어나자마자 실랑이를 벌인 탓인지 이미 하루의 절반이 지나간 후였다.
“이대론 안 되겠어.”
아침 겸 점심 식사를 앞에 둔 나는 포크로 소시지를 찍으며 중얼거렸다.
줄곧 조용히 살아온 내 앞에 나타난 레이프의 존재는 부담 그 자체였다. 물론 그의 외모는 전 인류적인 안구 정화 효과가 있었지만, 대화를 하면 그 이상으로 기가 쭉쭉 빨렸다.
그 덕에 나는 여주인공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깨달음만 커져 버렸다.
“그리고 이거…….”
여상한 표정으로 소시지를 콕콕 집어대던 나는 고개를 들었다.
식사 바로 위에 떠오른 시스템창이 어젯밤만큼이나 비현실적이면서도 확실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레이프 유클리드: 80]
“대체 왜 이런 게 보이는 걸까?”
레이프를 공략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
‘그럴 리가.’
이 세계에 처음 왔을 때는 캐릭터를 전부 공략하고도 마지막 시크릿 캐릭터를 공략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눈곱만큼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아주 잠시, 내가 여주인공이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랬다면 처음 이 세계에 발을 들인 시점부터 모든 것이 내 중심으로 돌아갔어야 했다. 모든 미디어 속의 여주인공이 그러하듯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니 결국 제자리네.’
상태창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한참을 머리를 굴리던 나는 한숨을 터뜨렸다.
당장에라도 이 의문들이 해결됐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일단은 여주인공을 찾아야겠어.”
여러 방법을 모색한 끝에 내린 결론은 레이프를 볼 때부터 줄곧 다짐하던 것이었다.
어차피 나는 여주인공이 될 수도 없고, 되고 싶지도 않았다.
사랑을 찾는답시고 공략캐들과 엮이는 것은 조용히 욜로하며 살고 싶은 내 바람과 정반대의 것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얼른 이 달갑지 않은 상황이 더 커지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모든 것을 원래 자리로 되돌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때까지 잘할 수 있으려나.”
목표를 잡은 것은 좋지만, 여주인공을 찾을 때까지 레이프를 상대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자고로 눈부신 사람은 영화 스크린 정도의 거리를 두고 보는 것이 딱 좋았다. 숨결이 닿을 거리가 아니라.
“아니지, 어쩌면 레이프만 있어서 다행일 수 있어.”
이어지던 걱정은 되레 현실 도피로 방향을 틀어 버렸다.
게임 속 공략캐는 시크릿 캐릭터인 레이프를 포함해 총 4명이었다. 연애 시뮬레이션의 주인공들답게 그들은 저마다 치명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레이프만으로도 벅찬데 그들까지 엮였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괜히 엮이기 전에 얼른 여주인공을 찾자.”
결국, 정신 승리로 스스로를 납득시킨 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얼마 먹지 않고도 갑갑했던 속이 뻥 뚫린 것만 같았다.
“그럼 얼른 먹어 볼…….”
고뇌의 흔적이 가득한 너덜너덜한 소시지를 스푼으로 그러모아 입에 넣으려 할 때였다.
“세이딘 아가씨!!”
식당이 쩌렁쩌렁 울리는 외침과 함께 전담 시녀인 앤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너무하네,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식사를 방해받아 기분이 나빠진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식사 중이야, 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호들갑 떨지 말아 줄래?”
“아가씨, 한가하게 지금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에요! 큰일이에요, 큰일!”
“아니, 이 한입보다도 큰일은 없어.”
“아이참! 농담하지 마세요! 비상사태라고요!”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설정의) 시녀는 내 아무 말 대잔치 앞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급함을 피력했다.
미안, 앤. 그래도 역시 내 위장이 더 급해.
나는 소시지를 한입 가득 털어 넣었다. 모양새는 처참했지만, 육즙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나는 여러 감정이 떠오른 앤의 표정을 못 본 체하며 물었다.
“우응잉이야?(무슨 일이야?)”
“……오셨어요.”
오시다니, 누가?
주어가 빠진 대답에 눈으로 대신 질문을 던지자, 앤은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여명의 지배자요.”
“콜록!!”
목구멍 뒤로 넘어가던 소시지가 자유를 외치며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한참을 캑캑거리며 목을 가다듬은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그거참…….”
누가 게임 속이 아니랄까 봐 손발이 탈주할 것 같은 별칭이 따로 없네.
‘아니, 잠깐? 여명의 지배자?’
서늘한 감각이 등 뒤로 스쳐 갔다. 오글거림에 정신이 혼미해져 간과하고 있었지만, 저 별칭은 분명 공략캐 중 하나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절로 입이 움직였다.
“이티엘 루제로 데미르 오릴리어스?”
그는 집착광공……, 아니 집착 폭군을 담당하는 공략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