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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3)화 (3/122)

제3화. 1장. 전설의 바이올린과 엑스트라 (3)

누가 연애 시뮬레이션 공략캐 아니랄까 봐, 하는 말도 남다르다.

하지만 나는 레이프를 알고 있다. 물러서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는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이 정도면 더 이상 의심은 하지 않겠지?’

애초에 지금 상황에서 불리한 것은 나였다.

레이프는 500년이나 봉인되어 있었다. 그 긴 세월 끝에 선택받은 자가 나타났는데 쉽게 놔줄 리가 없었다.

‘거절하면 쫓아다니면서 바이올린을 켜야 하는 상황을 유도해 낼 거야.’

나는 호기심에 레이프를 돕지 않는다는 선택지를 눌렀던 때를 떠올렸다. 

전 연령가 게임은 무척이나 친절했다. 내가 돕지 않을 시 얻는 불이익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며 답정너를 시전했으니까.

이곳은 게임이지만 현실이고, 그럼에도 게임이었다.

바이올린을 잡은 뒤로 흘러가는 전개가 게임의 흐름과 흡사하니 여기서는 레이프의 말을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이건 확실히 해야겠어.’

생각을 마친 나는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알았어요, 당신을 도울게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물론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말은 잘한다. 안 그럴 거면서.’

속으로 톡 쏜 나는 아까부터 줄곧 생각했던 바를 입에 담았다.

“만약 당신을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나를 더 이상 이 일에 끌어들이지 마세요.”

“……마치 다른 사람이 나타날 거라고 예상하는 듯한 투네.”

솜털만큼 가벼운 어조와 달리, 레이프의 말은 뼈를 때렸다.

잠시 느슨해졌던 긴장이 단숨에 온몸을 휘감았다.

나는 태연을 가장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만약’이라고 했잖아요? 그런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거죠.”

“너 외엔 오백 년 동안 아무도 날 들지 못했는데 말이지.”

“…….”

하여간 할 말이 없게 만드는 데 뛰어난 재주가 있는 놈이었다.

레이프는 조금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흔쾌히 승낙했다.

“뭐, 그래, 좋아. 싫다고 하는 사람을 붙드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기도 하고. 대신 세이딘, 너도 ‘그런’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진 열심히 날 도왔으면 해.”

너무도 당연한 조건에 곧바로 대답하려던 차였다.

―또로롱!

‘응…?’

“방금 무슨 소리 못 들었어요?”

“아니, 아무것도 못 들었는데?”

‘정신이 없으려니 헛것을 들은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도 선명한 종소리였는데.

의아함과 함께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듯 방금 전 들은 종소리가 들려왔다.

―또로롱!

두 번째 소리를 들은 나는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게임 효과음?’

의문의 소리가 무엇인지 깨닫는 순간, 당황이 물밀듯이 쏟아져 흘러왔다. 

그리고 상황을 정리할 새도 없이 눈앞에 나타난 것은 투명한 창과 메시지였다.

[튜토리얼 클리어]

<바이올린과 꽃미남들>을 시작할 준비가 끝났습니다. 데스티니와 함께 마음껏 이 세계를 즐겨 주세요.

▷달성: 고대 대마법사와 협상을 이뤘다.

▷보상: 데스티니의 호감도 20 증가 / 3000H

“이게 대체….”

“세이딘, 대답하기 싫어서 그러는 거면…….”

레이프의 불만스러운 목소리는 더 귀에 닿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시스템창의 등장에 내 머릿속은 퍼즐 조각이 쏟아진 것처럼 뒤죽박죽이었다.

‘어째서? 지금껏 아무 일 없이 잘 살았잖아. 그런데 왜?’

순간 끝없이 흐르던 의문이 벽이라도 만난 것처럼 턱 막혔다.

‘지금껏 아무 일 없이……라고?’

벼락이라도 맞은 듯 충격으로 전신이 저릿했다. 

아무 일이 없다니, 그럴 리가. 이미 게임 속에 들어와 살게 된 시점부터 내겐 ‘아무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니 이 시스템창도 새삼스럽지 않은 것이었다.

“세이딘?”

한편 걱정이 되었는지 레이프가 재차 나를 불렀다. 하지만 대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과 달리, 입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실례할게.”

아득한 목소리와 함께 옷자락이 사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마에 닿는 따스한 온기에 이끌려 고개를 든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마에 닿은 것은 레이프의 이마였다.

“아니, 왜 여기…, 딸꾹!”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이에서 보는 미남은 심장이 놀라 딸꾹질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열이 있는 건 아니네. 다행이야.”

“세, 세상에 어떤 사람이 열을 잰다고 이마부터 들이대요?!”

“내가?”

“…….”

잠시 잊고 있었다. 이곳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속, 그리고 저놈은 공략캐였지. 상식이 통할 리가.

황당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가운데, 한발 물러선 레이프는 술술 말을 이어 갔다. 

온기가 닿았던 곳이 서늘했다.

“사실 열을 잰다는 건 핑계고, 이러면 정신을 차릴까 싶었어. 알다시피 내가 좀 잘생겼잖아?”

“…….”

틀린 말은 아닌데 왜 이렇게 갑갑한 마음이 들지?

“어찌 됐건 다행이야. 갑자기 다른 곳에 관심을 둬서 당황했거든.”

부드럽지만 날카로운 지적에 나는 속으로 뜨끔했다.

네놈을 공략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을 할 수 없는 노릇인지라 나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누가 보면 당신에게 관심이 있는 줄 알겠어요.”

“그럴 리가, 세이딘. 내 눈은 정확해. 내게 관심 있잖아?”

레이프의 말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그와 함께 미소 짓는 얼굴이 달보다도 눈부셨다.

‘정말 여주인공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미인들에게 둘러싸여 매번 이런 어택을 받는데도 흔들리지 않는 걸 보면 평범한 범주를 벗어난 일이었다.

애초에 정말 평범한 사람이라면 무차별 심장 공격을 당하고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이 정상이었다.

나처럼.

“……부정하진 않을게요.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이상한 쪽으로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호흡을 가다듬고 겨우 말을 하는 나와 달리, 레이프는 무척 여유만만했다.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 하지만 너무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세이딘. 아름다움에 끌리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니까.”

“사양할게요, 저는 가능한 한 조용히 길게 살고 싶어서요.”

“하여간 재미있는 아가씨라니까.”

어둠 속에 퍼지는 낮은 웃음소리가 괜히 가슴을 간지럽혔다.

서로 협의도 봤겠다, 이후 일은 한숨 자고 나서 생각해 보려고 했다.

―또로롱!

‘아, 이번엔 또 뭐…….’

[데스티니의 호감도가 40 증가했습니다! (20→60)]

사라졌나 싶었던 시스템창의 등장은 처음만큼 놀랍지 않았지만, 거기에 담긴 소식은 황당했다.

‘대체 왜 오른 거야?’

분명 내 기억 속 레이프는 결코 쉬운 남자가 아니었다. 

한참 지난 게임 속 기억을 떠올리던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레이프의 호감도를 올리는 선택지 중에는 내 대답과 비슷한 종류의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설마 ‘이런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뭐 그런 거야?’

혹시나 싶은 마음과 함께 나는 입을 열었다.

“……데스티니.”

처음 불린 이름이라는 걸 알아서일까, 레이프는 잠시 어깨를 움찔거리는가 싶거니 곧바로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왜 그래, 세이딘?”

“한 가지 더, 부탁이 있어요.”

“뭔데?”

싱글싱글 웃는 얼굴을 보며 나는 마음을 다잡고 선포했다.

“날 좋아하지 말아요.”

*  *  *

“꿈인가……?”

짹짹거리는 소리와 쏟아지는 햇살과 함께 하루를 맞이한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건국제를 구경한다고 나갔다가 데스티니를 갖게 되고, 그 안에 봉인된 대마법사 레이프까지 만나게 됐다.

거기에 느닷없는 게임 시스템창까지.

꿈이라고 믿고 싶은 일투성이였다.

“꿈이라니. 함께 강렬한 밤을 보내고 모른 척하기야?”

역시. 그럴 리 없지.

귓가에 착 감기는 낮은 목소리에 나는 무심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너무하네. 그렇게 대놓고 싫어하면 상처받거든?”

“……이 정도의 현실 도피는 좀 봐줘요. 아직도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라고요.”

“아, 그렇지. 이해해. 아무리 나라도 그건 정말 놀랐거든.”

‘놀라? 내가 놀라면 놀랐지 네가 놀랄 일은 그다지…….’

자연스럽게 흘러가던 생각은 몽롱했던 정신을 단숨에 번쩍 들게 만들었다.

불안하게 떨리는 시선과 마주친 대마법사가 매끄러운 입술을 움직였다.

“날 좋아하지 마세요.”

“으아아…!”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한 건데!!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가득 담아 이불을 둘둘 말고 있으려니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어젯밤 일이 별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뭐?’

‘날 좋아하지 말라고요.’

시스템창과 레이프의 호감도는 명백히 나를 연애 시뮬레이션으로 이끌고 있었다.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는 나는 필사적이었다.

한편 내 말을 들은 레이프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놀릴 줄 알았는데 저런 반응을 보이니 조금 많이 당황스러웠다.

그렇다고 ‘당신의 호감도는 여주인공을 만날 때까지 아껴 두세요.’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설명을 덧붙이려 했다.

―또로롱!

맑은 알림음과 함께 절망적인 소식이 허공에 떠올랐다.

[데스티니의 호감도가 20 증가했습니다! (60→80)]

‘혹시나 했는데…….’

기억을 확인하기 위해 시스템창을 불러낸 나는 헛웃음을 머금었다. 

물음표로 가득한 공략캐들 목록 속에서 레이프의 이름과 호감도는 독보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내 예상대로였다. 레이프는 엉뚱하고 자기애가 넘치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래, 마법사니까.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는데……! 이럴 거면 게임에서도 공평하게 이런 선택지를 넣어 주면 좀 좋아?’

나는 이불을 부여잡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빼꼼 얼굴만 드러낸 것조차도 부끄러워 꾸물꾸물 안으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레이프는 현실을 도피할 틈도 주지 않았다.

“참 감명 깊었지 뭐야. 지금껏 살아오면서 애정 구걸은 받아 봤어도 싹조차도 잘라 내려 하는 경우는 처음 봤거든. 하여간 정말 재미있는 아가씨야.”

“누가 당신 재미있으라고 한 줄 알아요? 살려고 하다 보니까 나온 거지.”

“흐응, 세이딘은 사랑에 목숨 거는 타입이구나?”

아니요, 사랑을 전적으로 피하고 싶은 타입입니다.

이미 반쯤은 무너져 내렸지만 어떻게든 이 생활을 유지하고 싶어서 발버둥 치는 나를 모르는 레이프는 물끄러미 바라보다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언제까지 존대할 거야? 우린 뜨거운 밤을 보낸 사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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