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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2)화 (2/122)

제2화. 1장. 전설의 바이올린과 엑스트라 (2)

“그렇진 않은데…….”

부담은 되죠.

“그럼 세이딘이라고 부를게.”

하지만 조심스레 의견을 꺼내기도 전에 레이프가 쐐기를 박았다.

압박 가득한 미소를 띤 레이프가 또 다른 물음을 던졌다.

“혹시 세이딘은 내가 누군지 알아?”

“전설의 바이올린 님……?”

레이프의 정체가 대마법사라는 설정은 한참 뒤에나 풀린다는 걸 고려해서 한 대답이었는데, 레이프는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미려한 미간이 삽시간에 좁혀지는 것과 함께 내 심장도 쪼그라들었다.

“하하, 이런. 예상은 했지만 갈 길이 머네.”

개구리가 되는 것을 각오해야 하는 것인지 다시 한번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레이프가 입을 열었다.

“모르는 것 같으니 먼저 내 소개를 할게. 난 데스티니. 오늘 네가 켠 바이올린의 정령이야.”

“아, 그러시구나…….”

레이프가 마음을 열기 전까지는 이름을 비롯해 제대로 된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으니 그에 상응하는 반응을 보이려 했다.

하지만 너무 동화스러운 발언에 황당한 나머지 입이 먼저 멋대로 움직여 버렸다.

“흐음, 안 믿는 눈치네. 슬픈걸?”

‘약 팔지 말고 맞장구쳐 줄 만한 거짓말을 쳐라!’

“그런데 사실이야. 암살자가 아닌 이상, 평범한 인간이 이런 시간에 기척도 없이 남의 방에 잠입할 수 없잖아, 안 그래?”

아무래도 레이프는 그놈의 정령 설정을 밀어붙이려는 듯했다.

그래, 이 세계에서는 마법사도 일반적으로 볼 수 없는 귀한 존재이니 정령이나 마법사나 신기하긴 매한가지긴 하지.

‘그렇긴 한데 쟤는 왜 저렇게 뒤가 구린 표정을 짓고 있어? 사람 불안하게.’

웃으며 설명하던 레이프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와 동시에 나는 바짝 긴장했다. 원체 게임에서 저놈에게 이래저래 다양한 방법으로 골탕을 먹은 경험이 있어서인지 단순히 놀리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빠진 웃음소리를 흘린 레이프가 언제 그랬냐는 듯 말했다.

“좋아. 착한 아이구나. 믿어 준 건 고맙지만 난 정령이 아냐. 마법사지. 사정이 있어서 이 바이올린에 붙어 있는 신세지만 말이야.”

‘이미 알고 있단다.’

“내가 계속 질문을 한 건 네가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지 알고 싶어서였어. 그런데 다행이야. 넌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으니까.”

‘다행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처음에 뭣도 모르고 ‘난 당신을 도울 수 있어요!’라는 선택지를 골랐다가 계약을 하자마자 여주인공을 바이올린으로 만들어 버린 배드엔딩을 떠올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놈까지 완벽하게 공략해 놓을걸.’

그랬다면 지금처럼 심장 쫄깃하게 쩔쩔맬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나는 알아서 굴러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럴 때 레이프에게 먹히는 것은 솔직한 선방을 날리는 것이었다.

“제게 뭘 원하세요?”

“음? 왜 그렇게 생각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원하는 것처럼 말씀하셨잖아요.”

꼬시려고 작정한 듯 휘어졌던 호박색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의외로 눈치가 빠르구나? 합격이야.”

무례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은 레이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보랏빛 머리의 마법사가 내게 손을 내밀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강렬한 이벤트의 메인 대사였다.

“나와 사랑을 찾아 떠나지 않겠어, 세이딘?”

“개소리하지 마세요.”

예상하던 대사이긴 했지만 실제로 들었을 때의 파급력은 멋대로 입을 움직이게 할 정도로 엄청났다.

곧바로 정신이 돌아온 나는 서둘러 입을 막았지만, 소리는 빛보다 빨랐다.

또 한 번 레이프의 눈이 토끼처럼 커졌다가 삽시간에 달을 그렸다.

“푸흡……! 너 진짜 재미있구나? 그렇게 눈치 보면서도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걸 보면 역시 날 깨울 만해.”

대체 뭘 보고 그런 판단을 하는 건지 알려 줬으면 좋겠다.

“그런데 너무 싫어하진 않았으면 좋겠어. 철 지난 작업 멘트처럼 들리겠지만, 사랑을 찾는 건 내가 완전히 봉인에서 벗어나려면 필요한 일이거든.”

레이프의 봉인은 데스티니를 만지고 연주할 수 있는 선택받은 자에게만 반응했다.

지금은 어디까지나 임시적일 뿐, 온전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조건이 필요했는데 그것은 바로 선택받은 자의 ‘진정한 사랑’이었다.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충동을 견디지 못하고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혹시 그 사랑이라는 거, 제가 하는 거 아니죠?”

“물론 네가 해야지. 여기에 너 말고 더 있어?”

네가 있잖아요, 네가!

눈을 부릅뜨는 내게 레이프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쩌겠어, 봉인을 건 놈이 그렇게 만든 걸. 유감스럽게 생각해.”

유려하고도 뻔뻔한 대답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지금 당사자 아니라고 저러는 거지?

한편 자리에서 일어난 레이프는 어느새 내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세상에 그렇게 아련해 보일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으, 부담스러워.

“어려운 부탁인 건 알지만 세이딘, 부디 날 도와줬으면 좋겠어.”

“대체 어떻게…….”

이미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다고 해서 아무 대꾸도 안 할 수 없는 노릇인지라 추임새를 넣었다.

그리고 레이프는 기다렸다는 듯 착실하게 떡밥을 던졌다.

“항상 날 갖고 다니면서 연주하면 돼. 아주 간단하지? 실력의 여부는 상관없어. 선택받은 자는 날 손에 쥐게 되면 최상의 연주를 할 수 있거든. 아까처럼 말이야.”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해요. 단지 연주만으로 어떻게 사랑을 찾을 수 있다는 거예요?”

레이프는 까다로운 성격이었다. 비위를 맞추되, 너무 맞추면 그건 그거대로 수상하다며 의심을 품었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한 선의 물음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나는 이에 있어서 얼렁뚱땅 넘길 생각이 없었다. 레이프가 숨긴 이야기들은 앞으로 내 일상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마냥 어수룩한 건 아니구나. 맘에 들어.”

그런 내 의지를 느낀 것인지 미소 띤 레이프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바이올린에는 사랑에 빠지는 마법이 걸려 있어. 그 연주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너에게 열렬한 사랑을 고백할 테니, 넌 그 안에서 네 취향의 사람을 골라 진정한 사랑을 이루면 돼. 참 간단한 이야기지?”

게임이었을 땐 공략캐를 함락시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으니 깊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현실이 되니 머리가 아파 왔다.

지적하고 싶은 것이 많음에도 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굉장히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모양이네.”

이번에도 티가 났는지 레이프가 피식 웃었다.

나는 속으로 개구리로 변하는 선을 가늠하다가 이 정도까지는 괜찮겠지 싶어 입을 열었다.

“……당연하죠. 사기를 치자는 말을 들었는데.”

“사기라니? 좋아한다는 사람을 받아 주는 게 어떻게 사기야?”

“바이올린을 연주하면 사람들이 절 사랑하게 된다면서요. 마법의 힘으로 마음을 좌지우지하는 거니 사기죠.”

레이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뭐가 문젠데? 바이올린에 걸린 마법은 그렇게 세지 않아. 그러니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돌아올 거야.”

“안 돌아오면요?”

“그건 그놈의 문제지. 약한 마법을 걸어 놨는데도 못 벗어난다는 건 정신적으로 해이하단 뜻이거든.”

‘그게 말이라고…. 네놈 기준에서 약한 건 약한 게 아니잖아요!’

나는 가슴을 치고 싶은 것을 꾹 억눌렀다.

레이프는 그냥 마법사가 아닌, 혈혈단신으로 드래곤을 때려잡은 대마법사였다. 데스티니는 그런 그가 취미로 만든 마법의 바이올린이었고.

내가 납득하지 못한 것을 귀신같이 알아차린 레이프는 잽싸게 설득 노선을 바꿨다. 이제 정령이라는 설정은 말끔히 내다 버릴 작정인 듯했다.

“생각해 봐, 세이딘.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사기나 그런 게 아냐. 애초에 그랬으면 그 자식……, 아니 신이 왜 이 마법을 남겨 뒀겠어? 문제 될 게 없으니까 그런 거지.”

레이프의 설득은 그럴듯했지만, 게임 밖 주민이었던 내 마음을 울리지 못했다.

‘그냥 그건……, 설정상 구멍이 아닐까 싶은데.’

어찌 됐건 이 게임은 여자주인공이 여러 남자주인공을 사로잡는 것이 주목적인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었다.

이런 류 게임은 대체로 접근성을 중요하게 여겨 곧장 연애로 이어지는 접점을 만드는데, <바이올린과 꽃미남들>에서는 데스티니가 그 역할을 담당했다.

“그 시커먼 속은 알 수 없지만.”

한편 이 사실을 모르는 레이프는 작게 중얼거렸다. 

누가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모르겠네, 참.

“하여튼 사람들과 관련해서는 일절 걱정할 필요가 없어, 세이딘. 어떻게 보면 넌 선택받은 거야. 많은 사람 중에 원하는 남자를 고를 수 있는 거잖아?”

얘 좀 봐라?

“제가 그걸 원하지 않는다면요?”

“어……?”

레이프는 허를 찔린 것인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놀란 얼굴은 단숨에 경악으로 바뀌었다.

“거짓말! 그 나이대 레이디들은 다들 영앤리치 톨앤핸섬을 동경하잖아? 요즘 시대는 남자를 보는 기준이 다른 건가?”

랩처럼 쏟아지는 레이프의 혼잣말에 나는 얼굴이 홧홧해졌다.

“저기, 단어 선택 좀…….”

영앤리치 톨앤핸섬이라니. 현실에서 듣던 단어를 게임 속, 그것도 세상을 초월한 미남인 레이프가 말하니 어쩐지 욕망 덩어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바이올린에 봉인된 대마법사가 의아해했다.

“왜? 영앤리치 톨앤핸섬이 어때서? 싫어?”

“물론 싫은 건 아니에요! 엄청 좋아합니다!!”

“그치? 이거 봐, 꼭 남자가 아니더라도 미인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고.”

“맞아요. 하지만 우선순위가 절대적으로 미인이라는 법은 없죠.”

“……그건 그러네.”

의외로 레이프는 순순히 자신의 주장을 굽혔다. 나를 향했던 그의 시선은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나도 그랬던 적이 있으니까. 지금도 그렇고.”

‘이건 본 적 없는 대산데……. 시크릿 이벤트에서 나온 건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중요한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억 한편에 조용히 담아 두었다.

레이프가 추억에 잠기는 것은 잠시였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곤란한걸……. 난 세이딘이 없으면 안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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