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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1)화 (1/122)

제1화. 1장. 전설의 바이올린과 엑스트라 (1)

여성향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바이올린과 꽃미남들> 속 엑스트라 세이딘 그웨니르로 빙의한 지 어언 3년.

판타지 배경을 일상적으로 느끼며 살 만큼의 여유는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착각인 모양이었다.

‘이게 뭐야…….’

지금은 모두가 한창 잠이 든 시간이고, 나 또한 방금 전까지 꿈나라를 즐기고 있었다. 목이 말라 깨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흐음, 신기해라.”

나른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덕분에 나는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는 초점을 겨우 추스르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어둠 속에서도 확연한 존재감을 드러낸 미남이었다. 얼마나 잘생겼는지 지금껏 봐 온 미남미녀들이 순식간에 돌멩이로 보일 지경이었다.

나를 찬찬히 살피던 남자가 짙은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봐도 마나는 느껴지지 않는데 말이야. 어떻게 날 깨웠지?”

글쎄, 그건 누구보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왜 내 옆에 시크릿 캐릭터가 누워 있는 건데……?!’

이 남자, 레이프 유클리드는 <바이올린과 꽃미남들>의 모든 공략캐의 엔딩을 봐야 나오는 인물이자 이 게임의 진정한 주인공이었다.

여주인공 앞에 나타날 확률도 희귀한 인물이 게임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는 엑스트라의 앞에 나타났는데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역시 ‘저게’ 문젠가?’

나는 옷장 속에 처박아 둔 바이올린을 떠올렸다.

오랜 세월 광장을 지키던 바이올린 데스티니는 신의 가호를 받은 성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레이프를 봉인해 둔 매개체였다.

원래라면 선택받은 자, 그러니까 여주인공만이 만지고 연주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나도 다룰 수 있게 되어 버렸다.

‘아아악, 그깟 호기심이 뭐라고.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닌데 왜 만졌니, 왜!’

내게 이 상황은 최악 그 자체였다.

원래 세계에서 많이 구른 탓인지 나는 부유한 엑스트라의 삶에 만족했다. 그런데 호기심에 만져 본 데스티니 때문에 그 모든 걸 잃게 생겼다.

절대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하,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나는 눈을 감았다. 아까부터 관찰하는 레이프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였다.

‘일단 이대로 상황을 지켜봐야겠어. 눈이 마주친 건 잠결이었던 거로 치면 되고.’

스스로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변명거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줄곧 잊고 살았던 평면의 존재를 실제로 접하는 건 여러 가지로 용기와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아가씨는 언제까지 모른 척할 거야? 내가 보이잖아.”

이런 내 노력을 비웃듯, 레이프는 순식간에 나와의 거리를 좁혔다. 얼마나 가까운지 숨결이 이마를 간질일 지경이었다.

‘이런 미친……!’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심장이 널뛰듯 펄떡거렸다.

가뜩이나 미남에 대한 면역력이 없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눈앞에서 벌어진 것은 다름 아닌 레이프의 공략 초반에 시작되는 이벤트였다.

물론 말하는 대상과 장소가 다르긴 하지만, 저놈을 공략하겠다고 수많은 실패와 다시 하기를 거듭한 내가 그 정도도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연달아 충격에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응? 아가씨, 무슨 말이라도 해 봐. 안 그러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거든.”

얼굴을 간지럽히는 숨결에 나는 되레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긴장한 상태인데 저런 말은 심장에 좋지 않았다.

‘작전 변경이다.’

진작에 글러 먹은 작전이지만, 지금 상황만으로도 벅찬 나는 그것까지 일일이 따질 여력이 없었다.

충분히 숨을 고른 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어스름한 달빛 속에서도 확연한 존재감을 드러낸 레이프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였다.

호박색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휘어졌다.

“아름다운 눈동자를 보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이디.”

“…….”

우아하면서도 뻔뻔하기 짝이 없는 인사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다가 일어나 보니 즐겨 하던 게임의 공략캐, 그것도 번번이 공략에 실패했던 인물이 눈앞에서 조잘대는데 무슨 말을 하겠는가.

혼란과 신기함이 뒤죽박죽 뒤섞인 가운데, 심장에 위험한 미소를 짓던 레이프가 찬찬히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 진정된 거라면 나와 이야기 좀 하지 않겠어? 궁금한 게 산더미라 죽을 것 같아서 말이야.”

황당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레이프는 어깨를 으쓱했다.

농담으로 치부할 수도 있는 과한 표현이지만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진심이라는 것을.

반사적으로 달려온 긴장감과 함께 나는 몸을 일으켰다.

‘정신 바짝 차리자!’

게임을 떠올린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다른 놈 중에서도 레이프만은 유독 여주인공을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아니, 정확히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향해 의심하고 경계했다.

‘여러 번 속아 봤잖아. 미소에 속으면 안 돼.’

그랬다. 나는 이미 저 유해한 미소를 믿고 선택지를 골랐다가 호감도가 뚝뚝 떨어져 몇 번이고 배드엔딩을 본 경험이 있었다.

‘기회는 한 번. 최대한 침착하고 솔직하게 대답해야…….’

레이프의 배드엔딩은 자신의 고통을 함께 나누자며 여주인공을 바이올린으로 만들거나 혹은 질렸다며 개구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저 게임일 때는 짜증 한 번 내고 말았지만, 현실이 된 이상 그렇게 넘길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고아로 살며 가난과 생계에 찌들었던 내게 이 세계는 천국이었다.

엑스트라이긴 해도 나는 그웨니르 백작가의 하나뿐인 외동딸이었다. 다른 귀족이라면 대를 잇기 위해 데릴사위를 들일 생각을 했겠지만, 그웨니르 백작 부부는 ‘가주의 자리는 네 것이며 결혼은 선택’이라고 말할 만큼 나를 끔찍이 아꼈다.

‘모처럼 얻은 꽃길을 차 버릴 수 없지!’

마음을 단단히 잡은 나는 올 테면 와 봐라, 하는 심정으로 찬찬히 입을 열었다.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거면 해 드릴게요. 그 전에…….”

이것만큼은 짚고 넘어가야겠어.

실은 아까부터 신경 쓰였다.

“좀 떨어져 주실래요? 기왕이면 침대 밖으로요.”

“뭐?”

‘헉!’

짧은 물음에 나는 혼이 빠져나갈 뻔했다. 

아무리 의욕이 넘쳐도 그렇지, 속마음까지 같이 탈출할 필요는 없잖아!

‘끝났어! 이건 최소 개구리야!’

머릿속에 그려지는 개구리로 변하는 모습에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온 세계의 절망과 수치가 내게 모든 표를 던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감사합니다, 모든 프로듀서님…….

잠깐, 이게 아니지.

‘레이프의 봉인은 완전히 풀리지 않았어. 그러니 그 전에 상황을 봐서 도망가면 개구리는 면할 수 있을지도…….’

이어지던 생각은 뚝 끊겨 버렸다. 

목숨만 멀쩡할 뿐이지 그건 그냥 도망 노예랑 다를 바가 없잖아!

여길 보고 저길 봐도 한숨만 나오는 상황에 나는 답답해 죽을 것만 같았다.

‘아냐, 결국 목숨이 제일이지. 그러니까 일단 살고 보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 속에서 나름대로 결론을 내려 갈 때였다.

“후……!”

바람 빠진 소리와 함께 나는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레이프는 기다렸다는 듯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뭐야, 어떻게 날 보고 그런 반응을 보일 수 있지?”

‘허허, 그럼 대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니?’

“보통 날 본 사람들은 신이 강림한 것 같다며 감탄하거나 칭송해. 혹은 머리를 조아리거나.”

마치 생각이라도 읽은 듯한 대꾸에 나는 놀라 어깨를 들썩거렸다.

“어, 어떻게…….”

“얼굴에 다 쓰여 있던걸, 뭘. 아가씨, 굉장히 솔직하구나?”

방글방글 웃는 얼굴에 나는 입을 꾸깃거리며 다물었다. 살아가는 데 있어 솔직함은 그다지 좋은 미덕이 아니었다.

“너무 부끄러워하지 마. 나를 깨우려면 그 정도의 배짱은 가지고 있어야지. 안 그래도 자다 일어나서 낯선 사람을 봤는데도 소리 하나 안 지르는 걸 보고 감탄했지 뭐야? 참 겁 없는 아가씨구나 싶었어.”

‘그야 나도 소리를 지르고 싶었죠!!’

그렇지만 꿈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게임 속 인물과의 조우는 여러 의미로 비현실적이었다.

“알았어, 놀리는 건 이쯤 해 두고 아가씨의 바람대로 해 볼까?”

억울한 표정 가득한 나를 보며 레이프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곧바로 몸을 일으켜 거리를 두었다. 정확히 침대 밖으로.

정말 내 말을 들어줄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기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저렇게 순순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결국엔 방심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는 걸 떠올린 나는 다시 한번 경계심을 끌어 올렸다.

침대 근처의 의자에 앉은 레이프가 말했다.

“자, 더 이상 마음에 걸릴 것도 없으니 진솔한 대화를 한번 해 보자고.”

‘그래, 와라!’

“이름이 뭐야?”

별거 아닌 질문이었지만, 본래 첫 단추는 잘 끼워야 하는 법이었다.

나는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며 답했다.

“세이딘 그웨니르예요.”

레이프의 눈이 커졌다.

“그웨니르? 네펠리 그웨니르의 그 그웨니르? 혹시 아가씨, 그 얼간이의 손녀…는 아니겠지. 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 그놈이 증손자 자랑을 했으니까.”

“네펠리 그웨니르는 초대 가주님이세요. 저는 26대 현 가주의 딸이고요.”

“하!”

기가 막혔는지 레이프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약 500년가량을 바이올린 안에 봉인되어 있었으니 충분히 놀랄 만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니……. 역시 그때 찢어 죽였어야 했어.”

음산한 중얼거림에 나는 흠칫 놀랐다. 몇 번이고 본 이벤트 속 혼잣말인데도 문자로 읽는 것과 실제로 듣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레이프가 분노를 뿜는 상대는 다름 아닌 신이었다. 드래곤을 넘어선 마법사를 봉인할 수 있는 건 그 위의 존재뿐이었으니까.

‘어쩌면 개구리가 되는 게 다행일 수도 있겠다.’

봉인된 상태인데도 저 정도로 흉흉한 살기를 내뿜다니. 직접 체험하게 되니 마음도 종이 인형처럼 펄럭거렸다.

“왜 갑자기 전투적이 된 거야, 세이딘?”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크게 떴다. 전투적이라는 단어보다 레이프가 내 이름을 불렀다는 것이 놀라웠다.

“지금 뭐라고…….”

“아, 놀랐어? 명색이 날 깨워 준 은인에게 ‘아가씨’라고 부르는 건 너무 거리감이 느껴져서. 혹시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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