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외전 4_후계자 (1)
“황궁에 다녀오고 싶어요.”
“다녀오고 싶어요.”
아네타는 손을 잡고 서 있는 자신의 두 아이를 응시했다.
맏이인 칼리아가 먼저 입을 떼자, 둘째인 엘피스가 방글방글 웃는 얼굴로 누이의 말을 따라했다.
하지만 황궁은 들어가고 싶다고 해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아네타는 들고 있던 찻잔을 소리 없이 내려놓으며 허락을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칼리, 엘피. 황궁에 무슨 용건이라도 있는 거니?”
“오랜만에 폐하를 뵙고 싶어서요. 언제든 놀러가도 된다고 하셨거든요.”
칼리아는 아네타의 물음에 무리 없이 대답했다. 처음부터 이유를 물어올 것을 짐작했다는 듯 침착한 목소리였다.
황궁의 주인이 허락했다는데 별수 있나. 아네타는 제 옆에 앉은 칼로스에게로 눈을 돌렸다. 가장 중요한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폐하께서 오늘 일정이 있던가?”
“오늘은 집무실에게 간단한 정무만 보시는 걸로 알고 있어.”
기껏해야 황제의 그림자나 시종장 정도만 알고 있을 일정을 언급하는 태도는 태연했다.
“그럼 괜찮겠네.”
“당신은 쉬고 있어. 아이들은 내가 데리고 갔다 올게.”
러셀은 매년 생일마다 선물을 들고 직접 찾아올 정도로 조카들을 예뻐했다. 그러니 불쾌해하기는커녕 두 아이의 방문을 반기리라.
아네타는 그리 판단했고, 칼로스도 별다른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
“일단은 폐하께 사람을 보내야겠군.”
“제가 이미 사람을 보내서 허락까지 받아 놨어요.”
“칼리 네가?”
칼로스는 기다렸다는 듯 말하는 칼리아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사용인들은 유독 칼리아와 엘피스에게 약했다. 공작저와 후작저, 둘 중 어느 곳도 예외는 없었다.
엘피스가 아네타를 쏙 빼닮은 얼굴로 방긋방긋 웃고 다니며 사용인들의 마음을 사르르 녹인다면, 칼리아는 칼로스의 외모와 아네타의 성격을 닮아 사용인들의 신뢰와 믿음을 한 몸에 받았다.
아마 아네타와 칼로스에게 확인도 하지 않고 황궁으로 사람을 보낸 것은 자신들의 영민한 아가씨가 문제가 될 일을 벌일 리 없다는 믿음 때문일 터였다.
“그리고 아버지는 여기 계세요. 저희가 다 황궁으로 가 버리면 어머니 혼자 외로우실 거예요.”
칼리아는 아네타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말했다.
부모 입장에서는 눈에 훤히 보이는 변명이었지만,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다.
“괜찮겠니, 엘피?”
아네타는 칼리아의 곁에 찰싹 붙어있는 엘피스에게도 의사를 물었다.
“응. 누님이랑 둘이 갈래요. 그러자고 약속했어요.”
자신들끼리 갈 수 있다며 병아리처럼 삐약거리는 아이들의 의도는 투명했다.
아네타는 잠시의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하지만 허락해 주는 대신 조건이 있단다.”
“조건이요?”
“폐하께서 일이 있으신 것 같으면 바로 돌아오렴. 또,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티르도 데리고 가야 해.”
“알겠어요. 약속드릴게요.”
칼로스와 함께 가는 걸 거부했던 아이들은 티르가 언급되자 고민 없이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아네타는 힐끗 칼로스의 반응을 살폈다. 그 역시 아이들의 의도를 눈치챈 모양인지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었다.
“너희는 아빠보다 티르가 더 좋은 모양이구나.”
칼로스가 짐짓 서운하다는 투로 말했지만, 안절부절못하는 것은 엘피스뿐이었다.
칼리아는 칼로스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아버지가 티르보다 조금 더 좋지만, 오늘은 티르랑 가고 싶어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한 칼리아는 저를 따라 배꼽 인사를 하는 엘피스를 챙겨 침실을 밖으로 나갔다.
칼로스가 더 난감한 상황으로 몰아가기 전에 도망을 친 것이었다.
칼로스는 아이들이 문을 닫고 나가기 무섭게 참고 있던 웃음을 터트렸다.
“당신, 오늘은 좀 한가하겠네.”
열 살과 여섯 살.
네 살 터울의 아이들을 키우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칼로스였다.
낳는 건 당신이 했으니 키우는 건 자신이 하겠다며 나선 그는 일과 육아를 동시에 해냈다.
하루가 다르게 커 가는 아이들을 돌보는 건 그의 즐거움이었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그 기쁨을 누리기 어려울 것 같았다.
아네타는 칼로스를 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니. 당신도 나도 오늘은 평소보다 더 바쁠 예정이야. 우리 아이들이 기껏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 줬으니 알차게 보내야지.”
실망할 거라는 생각과는 다르게, 칼로스는 그녀보다 더 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역시나 칼로스는 아네타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생각을 꿰뚫고 있었다.
아네타는 그동안 아이들 앞이라 못했던 일들을 해야 한다며 몸을 붙여 오는 그의 행동에 헛웃음을 지었다.
“누가 들으면 당신이 열심히 참은 줄 알겠어.”
“참았는데.”
“그게?”
아네타는 양심이 없다며 그를 타박했다.
“어쨌든 좋아.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아이들 뒤에 호위를 붙이고 와야 할 것 같은데.”
티르가 곁에 있어 안심이었지만, 그래도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야 했다. 아직은 어린아이들이었으니까. 칼로스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은지, 그는 아네타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춘 뒤 몸을 일으켰다.
“이 다음은 다녀와서 할 거니까 기다리고 있어.”
***
아무리 또래에 비해 영특하다고 해도, 아이는 아이였다.
칼리아와 엘피스는 마차가 준비되길 기다리는 사이 자신들에게 호위가 붙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오직 티르만이 기척을 느꼈지만, 그것이 익숙한 이들의 것임을 눈치채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아이들을 따라 마차에 올랐다.
“누님.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요?”
황궁에 가자는 칼리아의 제안에 순순히 응하긴 했지만, 보호자 없이 외출하는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엘피스는 걱정스레 눈을 굴렸다.
“가끔은 두 분만의 시간도 보내야지. 우리가 두 분 사이에서 방해가 되는 건 아니지만, 가끔 이런 날도 있어야 두 분이 이런 것도 하고 저런 것도 하는 거야.”
“그럼 제 동생도 생길까요?”
엘피스가 불쑥 꺼낸 말에 창밖을 내다보던 칼리아는 동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동생이 가지고 싶니?”
“네. 노티온 영식이 이번에 동생이 태어났다고 자랑을 하고 다니던 걸요.”
칼리아는 부러운 기색이 역력한 엘피스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해야 할 말을 골랐다.
겨우 그런 이유 때문이냐며 타박하는 것보다는 다른 식으로 이해를 시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럼 어머니께 말씀 드려 봐.”
“정말요?”
“하지만 네게 동생이 생기는 대신, 어머니는 ‘아, 이러다 죽겠구나’ 싶을 만큼 아파야 해. 아이를 낳는 일은 그런 거야. 어머니는 그런 일을 겪으며 우리를 낳아 주신 거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밝았던 낯빛이 희게 질렸다.
“그럼 저, 동생 필요 없어요. 어머니가 아픈 건 싫어요.”
기대에 들떴던 엘피스는 금세 마음을 바꾸었다.
자신을 품에 안아 주며 상냥하게 미소 짓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상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그런데 누님은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어요?”
“……봤어. 네가 태어날 때. 그래서 처음엔 네가 많이 미웠어.”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미움은 동생을 향한 사랑으로 바뀌었다. 저만 보면 꺄르르 웃어 대는 말갛고 순수한 얼굴은 부정적인 감정을 말끔히 씻어 내렸다.
칼리아는 지금도 생생한 그때의 감정을 떠올리다, 동생의 표정을 살폈다.
서운해? 그리 물으려던 때였다.
“지금도 미워요?”
“아니. 지금은 어머니 아버지만큼 널 사랑해.”
“그럼 됐어요. 저, 얼른 커서 누님을 지켜 드릴 테니까 앞으로도 저 미워하면 안 돼요. 알겠죠?”
대답을 기다리는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는 얼굴에 칼리아는 웃었다.
“그래. 기대하고 있을게.”
저보다 작은 아이가 언제 커서 지켜 주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순간 새롭게 다짐한 것은 하나 있었다.
칼리아는 말갛게 웃는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그럼 나는 네가 날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해질 때까지 널 지킬게.’
***
마차가 황궁 앞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이십여 분이 흐른 뒤였다.
마차 안에 아이들만 타고 있는 것을 고려한 마부가 최대한 느리게 마차를 몬 까닭이었다.
칼리아는 그런 마부의 배려를 눈치채고 감사 인사를 한 뒤 황궁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기사들은 티르를 보고 놀랐지만, 그 앞을 막아서진 않았다.
황제가 조카들을 제 자식처럼 아끼는 데다, 티르는 먼저 위협만 하지 않으면 절대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네타가 아이들과 함께 티르를 보낸 이유는 혹시 모를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이들을 알아보고 불순한 의도로 접근하는 이들을 막기 위해서였다.
티르가 귀엽게 보이는 것은 발티모어 공작가 사람들에 한해서였다.
사자처럼 위협적인 생김새와 남다른 풍채는 보는 이로 하여금 겁을 집어먹게 해 타인이 접촉해 오는 것을 막았다.
그것은 칼리아에게 있어 퍽 흡족한 일이었다. 다른 때보다 여유롭게 황궁을 둘러볼 수 있었으니까.
칼리아는 공작저와 후작저만큼이나 황궁이 좋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사리분별이 가능해지고 보고 들은 것을 기억하기 시작할 때부터 그랬다.
“……날씨도 좋은데 폐하께 가기 전에 산책이라도 좀 하다가 갈까?”
그래서일까. 칼리아는 저도 모르게 답지 않은 말을 내뱉었다.
누님이 하는 말이라면 뭐든 좋은 엘피스는 당연하다는 듯 그 말에 동의하려 했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지지만 않았다면 분명 그리 했을 터였다.
“설마 도중에 다른 길로 새 버리려고 할 줄은 몰랐는데. 마중 나온 보람이 없군.”
등 뒤로 기척 없이 다가선 이의 목소리는 익숙한 이의 것이었다.
엘피스는 환하게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권위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러셀이 보였다.
“폐하!”
엘피스는 망설임 없이 그를 향해 두 팔을 벌렸고, 러셀은 능숙하게 아이를 안아 올렸다.
다른 아이들처럼 저를 두려워하기는커녕, 방긋방긋 잘도 웃는 모습에 러셀의 입가에도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다른 이가 보았다면 두 눈을 의심할 광경이었다.
‘이러니 다음 대의 황제로 나나 엘피가 언급되는 거겠지.’
칼리아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모습을 보다 태연하게 인사를 올렸다.
“제국의 자비로운 태양을 뵙습니다.”
“오랜만이구나, 칼리아.”
러셀은 엘피스를 한 팔에 안아 들곤 남은 한 손으로 칼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걸친 채였다.
그의 시선은 곧 제 다리에 얼굴을 부비는 티르에게로 향했다.
“오늘은 네가 이 녀석들의 보호자 역할인가 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