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외전 3_혈육 (5)
처음 듣는 이야기에 아네타의 눈빛이 흔들렸다.
“제 어머니께서 고모님께 부탁을 했었다니요?”
“말 그대로란다. 어느 날 갑자기 날 찾아왔었지.”
아네타는 빠르게 기억을 더듬었다.
떠오른 것은 엘레나의 손을 잡고 난생처음 백작저에 왔을 때의 일이었다.
“어머니께서 백작저를 찾아온 건 단 한 번뿐인데, 설마 그때였나요?”
“정확해. 그날, 아네타 너도 함께 왔었지. 네 어머니가 인사만 시키고 곧장 밖으로 내보냈지만.”
“하지만 어머니께선 전해 줄 것이 있어서 찾아가는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꽤 정확하게 기억하는구나. 그때 맡아 달라고 부탁 받은 물건이 이거란다.”
릴리에트는 제 앞에 놓여 있던 서류 봉투를 아네타 쪽으로 밀어 주었다.
아네타는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봉투와 릴리에트의 얼굴을 곁눈질했다.
“열어 보렴.”
아네타는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봉투를 열었다.
안을 들여다보자 보이는 것은 여러 장의 서류였다. 얼핏 봐서는 계약서 같은 그것을 꺼내 들자, 낯익은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아네타가 가주 자리에 앉은 이후, 눈에 박히도록 보아 온 것이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아네타는 제법 길게 늘어진 내용을 빠르게 읽어 내렸다.
그러곤 다음 장으로 넘기자, 그곳엔 같은 내용이 다른 필체로 적혀 있었다.
세 번째, 네 번째 장도 마찬가지였지만 아네타는 하단에 적힌 이름으로 그것이 누구의 필체인지 알 수 있었다.
첫 번째 장이 조부의 필체로 쓰여 있었다면, 두 번째 장은 제로프 멜렛, 세 번째 장은 외조모인 클라나 멜렛, 네 번째 장은 트로일 멜렛의 필체였다.
“이건…….”
“일종의 각서지. 아버지로부터 거액의 돈을 받는 조건으로 너희 모녀에게 접근하거나 손을 벌리지 않겠다는.”
아네타는 마지막 장에 있는 짤막한 편지를 읽었다.
거기엔 못난 아들을 둔 아비가 며느리와 손녀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라고 적혀 있었다.
조부가 멜렛 남작가에 넘겨 준 돈은 자그마치 20억 벨론이었다.
아네타는 그 돈을 받고도, 엘레나가 죽자 데릭에게 들러붙었던 제로프 멜렛을 떠올렸다.
정말이지 데릭과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아비 자격이 없는 인간이었다.
‘아마 공작저로 찾아왔던 것도 내가 각서에 대해 알고 있는지 떠보기 위함이었겠지. 협박을 할 수 있었던 건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일 테고.’
아네타는 제로프 멜렛이 눈치챈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각서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그것을 언급해 쫓아냈을 테니까.
“네 어머니의 부탁은 염려하던 일이 생기면 이걸 직접 네게 전해 달라는 것이었지. 사실 난 그때 엘레나를 이해할 수 없었어. 그래서 물었지. 왜 하필 내게 이런 부탁을 하느냐고.”
“……어머니께선 뭐라고 하셨나요?”
“믿을 만한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고 하더구나.”
아네타는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엘레나의 세상은 좁았다. 그녀의 부모도, 데릭 아데나워도 그녀에게 집 안에만 있을 것을 강요했으니까.
자연히 누군가와 친분을 쌓을 기회는 없었다. 릴리에트를 찾은 건 엘레나에게 있어 최선의 선택이었을 터였다.
“또, 자신에게 일이 생기면 세상에 데릭 아데나워와 단 둘이 남게 될 널 가엽게 여겨 달라고도 했어. 아마 그때부터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은데.”
아네타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릴리에트의 예상은 사실일 것이다. 백작저에 방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엘레나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으니까.
아네타는 이야기를 끝내고 나온 엘레나가 저택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릴리에트를 향해 허리를 숙이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 했던 잘 부탁한다는 말이 이걸 의미하는 거였구나.’
아네타는 저도 모르게 각서를 들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참담한 심정이었지만, 겉으로 드러낸 감정 표현은 그것이 전부였다.
릴리에트는 조금 구겨진 종이를 응시했다. 오랜만에 만난 조카는 어릴 때와 마찬가지로 제 감정을 감추는 일에 능했다.
지금 앉아 있는 이 자리에서 처음 아이를 보았을 땐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나이가 같은 아들을 키우는 입장이었기에 보는 순간 아네타와 또래 아이들의 차이를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릴리에트는 아이답지 못한 모습이었다는 말로 아네타를 깎아내릴 생각은 없었다. 아이가 남들보다 일찍 어른이 되어야 했던 이유는 변변치 못한 주변의 어른들 때문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이었다.
아네타를 안타깝게 여겼지만, 그뿐이었다. 그동안 릴리에트가 아무 죄 없는 조카를 위해 해 준 일이라고는 고작 각서 몇 장 맡아 둔 것뿐이었다.
릴리에트는 어쩌면 자신이 그 사실에 알게 모르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소식을 듣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제도로 온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리 짐작하는 사이, 아네타가 입을 열었다.
“어째서 그동안 이 일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 않은 건가요?”
“당연히 데릭 아데나워 때문이었지. 그자가 너와 내가 만난 걸 알면 득달같이 달려들 테니까.”
그리고 그것을 나쁜 쪽으로 이용하려 들 것이 뻔했다.
굳이 뒷말을 하지 않아도 어떻게 될지 누구보다 잘 아는 두 사람이었다.
“하여튼 내 역할은 여기까지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는 됐어. 아무리 다 이긴 싸움이라고 해도 일이 완전히 해결된 것도 아니고, 우리 애들이 그동안 네게 여러 모로 신세를 진 것 같으니까.”
그 빚을 갚은 셈 치겠다고 말하던 릴리에트는 순간 무언가가 생각난 듯 짧게 탄성을 뱉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적의 영광이 소멸됐다지?”
릴리에트는 한때 아데나워의 이름을 가졌던 사람으로서 그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알고 있었다.
아네타는 영광을 포기한 것에 대한 타박이 돌아올까 걱정했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영광 없이도 가문을 지탱하다니. 제법이네.”
처음부터 소재조차 모르는 존재였지만,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컸다.
하지만 현재 가문의 영향력은 전보다 더 높았으면 높았지, 결코 덜하진 않은 것으로 보였다.
릴리에트는 아네타가 오기 전 집사를 통해 파악한 정세를 떠올리며 그녀를 칭찬했다.
“어떻게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편으로는 대단해 보이는구나. 나라면 절대 영광을 포기하지 못했을 테니까.”
“과찬이세요.”
“지금 보니 알겠어. 아데나워는 나보다 네게 더 어울려. 네가 진정한 주인이었기 때문에 내가 이을 수 없었던 거라고 생각하니까 조금은 속이 후련해졌어.”
“인정해 주시는 건가요?”
“그래. 내게 인정하고 말고 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릴리에트는 아네타를 높이 평가했고 그것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한때 그 자리를 진심으로 열망했던 사람으로서 하는 말들이었다.
또, 완전히 미련을 버렸기에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차라리 너 같은 아이와 후계자 자리를 두고 경쟁했다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구나. 그랬다면 적어도 패배가 억울하지는 않았을 텐데.”
릴리에트는 허무하게 좌절된 목표를 떠올린 것인지, 쓴웃음을 입에 걸었다.
그때였다.
릴리에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 밖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 저 왔어요. 들어갈게요.”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는 버논의 것이었다.
뒤늦게 릴리에트의 도착 소식을 듣고 퇴근한 그는 한 손으로 문을 밀며 들어왔다. 다른 손으로는 다구가 올라간 트레이를 든 채였다.
“생각보다 늦었구나, 버논. 소식은 한참 전에 전해진 걸로 알고 있는데. 내가 그리 그립지는 않았던 모양이지?”
“너무 그러지 마세요, 어머니. 사죄의 의미로 직접 차 배달까지 왔잖아요.”
버논은 릴리에트의 말을 자연스럽게 흘려 넘기며 남은 자리에 앉았다.
그는 각자의 앞에 찻잔을 놓아 주는 것과 동시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아네타와도 눈인사를 나누었다.
오랜만에 어머니를 만났기 때문일까. 그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밝았다.
“그리고 서운해할 사람은 어머니가 아닌 저예요. 바쁘다는 이유로 아들 결혼식에도 안 오셨잖아요. 다른 사람도 아닌 장남의 결혼식인데도 말이죠.”
버논은 이보다 서러울 수는 없다며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했다. 호선을 그리는 입매만 봐도 그의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요즘 누가 장남, 차남 따지니. 촌스럽게.”
릴리에트는 여전히 아이 같은 면이 있는 아들의 장난에 노련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버논은 과장되게 상처받은 척하며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그 촌스러운 사람이 바깥에 널렸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버논과 릴리에트는 그 이후로도 비슷한 식의 대화를 이어갔다.
아네타는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자신이 눈치껏 자리를 비켜 주어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러나 아네타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보다, 릴리에트가 몸을 일으키는 게 더 빨랐다.
“난 이쯤에서 다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구나.”
“벌써 가시려고요?”
버논이 놀라 물었다.
“그래. 겨우 짬을 낸 거라 어쩔 수 없어.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면 그때 다시 오마.”
“로디온은 제대로 챙겨 주고 계신 거죠?”
“내가 아무리 너희 일에 참견을 덜 한다고 해도 부모로서의 의무를 저버린 건 아니란다. 괜한 걱정 말고 너는 네 부인에게나 잘하렴. 늦었지만 두 사람 다 결혼 축하하고.”
릴리에트는 시선을 돌려 아네타를 응시했다.
“아네타. 다음 만남은 이번과 다르게 좋은 소식과 함께였으면 좋겠구나.”
다음을 기약하는 말에 아네타의 눈이 크게 뜨였다.
릴리에트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라움을 표하는 아네타를 보고도 모르는 척 몸을 돌렸다.
“뭐 하고 있어, 아네타. 배웅 안 해 드릴 거야?”
“……아니. 해야지, 배웅.”
멍하니 앉아 있던 아네타는 눈앞에서 손을 휘젓는 버논의 행동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몸을 일으킨 그녀는 릴리에트가 주었던 각서를 챙긴 뒤 버논의 뒤를 따라 응접실을 나섰다.
배웅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릴리에트는 자리에 없었던 크리스에게만 인사를 남긴 뒤 곧장 마차에 올랐다. 아네타는 릴리에트의 마차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자신도 마차에 몸을 실었다.
***
멜렛 남작가의 각서를 손에 넣은 아네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장부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각서 내용을 토대로 조부가 돈을 지급하기로 약속했던 날짜의 기록을 살펴보니 역시나 그때의 기록이 분명하게 남아 있었다.
조부가 거금을 넘겨주고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을 리 없다는 예상이 적중한 것이다.
각서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명확한 증거를 확보했으니 더는 시간을 끌 필요도 없었다.
아네타는 대리인인 알렉이 멜렛 남작가와 관련된 지출을 취합한 장부 내역을 넘겨주기 무섭게 재판소를 찾았다.
멜렛 남작가를 상대로 접근 금지를 신청하자, 재판장은 아네타의 손을 들어 주었다.
접근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거금을 받아 챙겼음에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제로프 멜렛은 승복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래 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네타는 길길이 날뛰는 제로프 멜렛에게 각서에 명시되어 있던 위약금을 언급했다.
조건을 위반했을 경우, 그가 아데나워 후작가에 지불해야 하는 돈은 받은 금액의 두 배였다.
아네타는 40억의 빚을 추가로 지고 싶지 않다면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경고했고, 제로프 멜렛은 그제야 파랗게 질린 얼굴로 줄행랑을 쳤다.
그 이후, 아네타는 멜렛 남작가의 저택이 다른 이의 소유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소중한 이들에게만 쏟아 붓기에도 모자란 것이 시간이다.
아네타는 되찾은 평화를 만끽하기 위해 자신을 안고 있는 칼로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책을 읽고 있던 그에게서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그래, 아네타?”
“그냥. 당신이랑 이러고 있으니까 좋아서.”